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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악을 미워하는 것(5)  [잠 8:13]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14.10.26
우리가 신속히 변화되려면 자신에게 있는 악이 어떠함을 마음 중심에서 인정하고 악을 미워해야 합니다. 내 안에 악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세세하게 찾아야 합니다. 또 발견하지 못했던 악도 발견하여 그 악이 내 주변과 나에게 얼마나 큰 해와 고통을 주는지 깨닫는다면 더 신속히 악을 벗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믿음의 반석에 서지 못하는 아홉 가지 중에 거짓과 속이는 마음, 판단과 정죄에 대해 증거합니다.

1. 마음에 남아 있는 근본의 악까지 빼내 버려야

믿음이 있고 천국에 소망이 있는 성도라면 이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영과 온 영을 사모하며 신속히 변화되어 아버지 하나님을 닮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러기에 쉬지 않고 기도하며 믿음의 성장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잠깐의 노력이나 수고로 되는 것이 아님을 잘 깨우쳐야 합니다.
우리가 죄악 속에서 태어났고 성장하면서도 죄가 죄인지, 악이 악인지 모르며 자랐으니 변화되고자 결심했다고 금방 변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죄악을 버리기 위해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히 12:4). 어느 정도 노력하다가 힘들다고 멈추거나 포기하면 버린 악이 다시 살아나 또다시 육체의 일로도 발전할 수 있습니다.
간음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하여 전에 행했던 육체의 일을 끊었습니다. 금식하며 마음에 있는 이성에 대한 간음의 생각도 버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니 많이 변화되어 이성을 보면 설레고 대화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간음의 속성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말고 계속하여 변화되기 위해 기도하고 힘써 나가야 내가 알지 못하는 간음의 남은 것도 발견케 하시고 온전히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자만하여 자신을 돌아봄이 부족하거나 기도를 쉬고 충만함이 식으면, 버렸던 것들이 다시 올라옵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서 문득 ‘저들은 마음대로 살아가니 참 좋겠다. 부럽다. 편하겠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단은 이러한 육신의 생각을 놓치지 않고 계속 발전하게 만들고 주변을 통해 미혹합니다.
이러한 육신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신앙생활이 힘들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지 말라, 버리라.” 하신 하나님 말씀이 나를 감시하는 것 같고 얽매이는 것같이 생각됩니다. 이때라도 정신을 차리고 신속히 돌이켜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육신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죄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전에 행했던 육체의 일이나 세상 것들을 취했던 것들이 다시 좋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이때 주변의 이성이나 전에 만났던 이성으로부터 연락이라도 오면 금세 넘어가게 됩니다. 처음에야 ‘그냥 대화만 하리라.’ 생각하겠지만 내 안에 남은 육은 불씨와 같아서 주변에 불붙을 무언가가 있으면 금방 옮겨 붙어 큰불로 번질 수 있습니다. 분명 육체의 일을 다 벗고 육신의 일도 많이 버렸는데 다시 육체의 일로 발전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의 속성은 조금 있는 악의 모양이라도 끝까지 벗지 않고, 버리기를 멈추면 미혹이 올 때 다시 죄악이 자라날 수 있지요. 그러니 영의 사람이라 해도 자신에게 있는 육의 흔적을 찾아 온전한 성결에 이르기까지 교만하지 말고 항상 자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하겠습니다.

2. 거짓과 속이는 마음을 벗어 버리려면

거짓과 속이는 것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순간의 어려움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상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보태거나 숨기는 등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 물질의 유익을 위해 상대를 속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자그마한 거짓이나 속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악이라 생각지 않는 모습이 있으면 변화와 믿음의 성장이 더딥니다. 명백한 거짓과 속이는 마음은 큰 악임을 잘 알지만 거짓인지 모르고 넘어가는 거짓, 속이는 마음, 악도 얼마나 많은지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보고하거나 말을 전할 때 더 정확하고 진실하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에게 거짓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령, 당회장님께서 전화해 주시는 꿈을 꾸었는데 꿈이라는 얘기는 쏙 빼고 당회장님께서 전화해 주셨고 축복받을 것이라 말씀하셨다고 한다면 이는 거짓이지요.
또한 A와 B가 다툼이 일어나 윗사람에게 보고를 해야 한다면 이때 양쪽 입장을 다 들어보고 치우침 없이 보고해야 합니다. 그런데 평소 A와 친분이 있었기에 A 입장에서 말을 합니다. 이것이 진실함, 정직함이 결여된 모습이지요. 일부러 거짓말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내 안에 치우치는 마음, 공평하지 못한 마음이 있기에 거짓이 나옵니다.
이런 거짓은 일상생활에서 말을 전하거나 어떤 상황을 설명할 때 쉽게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큰 잘못으로 인식하지 않기에 회개하지도 않고 버리려는 노력도 부족한 경우를 봅니다. 하지만 나의 거짓말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보지요.
A에 대해 안 좋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에게 그 얘기를 전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 A에 대한 얘기가 오해였음을 알았지요. 그러면 내가 전한 사람에게 다시 정정해야 하는데 그냥 넘어갑니다. 내가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닌데 하며 자신이 잘못 전한 말을 바로잡지 않습니다. 이는 얼마나 많은 죄를 쌓는 것인지요. 남의 험담을 듣지 말아야 하는데 들었고 판단도 했습니다. 또 그것을 남에게 전했으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정정하지 않으므로 상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비진리는 듣지도 말고 나쁜 말은 전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공지사항이나 필요한 내용을 전하면서도 가감하여 전하기 때문에 처음 내용과 달라지는 경우도 있고 전혀 다른 말이 되기도 합니다. 듣는 사람의 느낌을 가미하여 전달하니 오해를 낳기도 하지요. 이 외에 교회와 목자를 속이는 것도 하나님을 속이려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당장은 속인 것 같다 해도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기에 결국 시험 환난으로 오고 죄의 담을 만든 것이니 언젠가는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니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속이려는 마음, 거짓말하거나 숨기려는 마음 자체가 없어야 하며 자신의 말과 생각, 행함이 진실한지 항상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3. 판단은 하나님께서 엄히 경계하는 악이니 신속히 버려야

사람은 자기 생각이나 지식 또는 자기 보기에 선과 의를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또한 무엇을 보거나 들을 때 느낌을 갖고 그것으로 생각하고 평가하고 전달합니다. 그러니 그 마음에 악이나 세상 것이 많이 있을 때는 선한 것을 보아도 오해하거나 악하다 판단합니다.
예를 들어, 열심히 구제하는 사람을 보고는 ‘저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려고 저렇게 구제하지.’ 하고 판단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은 선을 행할 때 남에게 보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 시대에 율법사, 제사장들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선만 행하시는 예수님을 악하다 판단하였지요.
이렇게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악과 비진리 안에서 상대를 판단합니다. 하지만 마음에 선과 사랑, 진리로 가득한 사람은 판단하지 않습니다. 선으로 생각하기에 오해하지 않으며 이해하지요. 무례한 상대에게도 성격인가 보다 하며 오해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지?’ 하며 판단하여 감정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판단은 하나님께서 엄히 경계하는 악이요, 교만함입니다. 야고보서 4장 11~12절에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말씀하십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보장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곧 하나님께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제단과 목자님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이 아니면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전히 세상을 짝하여 죄를 짓고 마음에 악이 가득하면서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사람에 대해 평가하거나 말을 낸다면 이는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깨달아야 합니다. 아직 내 믿음이 미치지 못하면 잠잠히 기다리면 되고, 나타나는 열매로 평가하면 됩니다.
이 제단은 항상 하나님의 보장하시는 놀라운 일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큰 물질의 축복을 바라며 나아오는 시간의 흐름에도 크고 놀라운 권능의 역사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보고 체험하는 목자의 권능은 너무도 위대합니다. 제가 해외 손수건 집회를 가 보면 한결같이 “만민의 역사가 아니면 이런 권능을 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수십 년 목회를 하고 여러 교회를 세운 목회자들도 기도받기를 사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큰 권능을 행하시는 목자와 제단에 대해 자기 생각에 맞추어 “맞다, 맞지 않다.” 하거나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좋은데.” 한다면 그런 사람은 목자보다 더 큰 권능이 나타나며 하나님의 보장하심이 임하는 것입니까? 결코 이런 죄는 없어야 합니다.
또 판단을 하면 대부분 수군거림과 헤아림, 비방과 정죄가 따르게 되니 죄에 죄를 쌓는 것입니다. 특히 ‘분별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며 “이것은 진실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직접 보고 전해 준 것이다.” 하거나, 좋지 않은 것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겠습니다.
이제 ‘판단’에 대해서 정확히 정립하시기 바랍니다. 판단은 내가 재판장 곧 하나님이 되는 큰 교만이니 판단은 나의 생각으로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보실 때 “맞다, 틀리다.” 하시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또 마태복음 7장 1∼2절에 보면 ‘나의 비판과 헤아림으로 나도 비판과 헤아림을 받는다’ 말씀하십니다. 누가 나를 판단하고 말을 지어낸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픕니까? 그런데 내가 그런 악을 행하고 있다면 그 악은 결국 나를 향한 화살로 돌아온다는 사실을 깨우쳐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짓과 속이는 마음, 판단과 정죄는 바로 거짓말이나 수군거림으로 나오지요. 그러니 거짓과 속이는 마음, 판단과 정죄를 벗어 버리려면 먼저 말과 입술부터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곳곳에 말, 혀, 듣는 귀를 주의할 것을 말씀하십니다(잠 18:21, 21:23). 그러니 악한 말이나 거짓된 말, 수군수군하고 남을 험담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항상 입과 귀, 말과 행동, 생각과 마음을 선과 진리로 비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아름답게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2014-10-27 오후 11:14:42 Posted
2018-06-07 오전 11:44:04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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