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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2)  [말 3:7-10]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15.03.22
지난 시간에는 십일조의 개념과 유래, 십일조를 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축복받는 이유에 대해 증거하고자 합니다.


십일조란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드리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에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가 구약 시대의 율법일 뿐 신약 시대에는 굳이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과 규례는 항상 우리 안에 있고 지켜야 합니다(마 5:18).
신약 시대에 와서 하나님의 율법이 구약 시대와는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 것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씀이 신약 시대에는 성령을 받아 마음에 할례할 수 있기에 주님의 가르침과 같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로 변한 것들이 있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담긴 뜻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1. 십일조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표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17절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으로 인해 율법대로 행하는 형식뿐 아니라 율법에 담긴 의미를 깨달음으로써 더 중요한‘마음’을 담아 온전하게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신약 시대라 해서 율법을 폐할 것이 아니라 십일조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알아 더 온전히 지켜야 합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즉 십일조를 드리되 의와 인과 신 곧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정성을 더하여 규례를 두신 목적에 맞게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십일조는 우리의 소득은 물론 모든 물질에 대한 주권이 창조주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믿는다는 표현입니다. 또한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의 생명과도 같은 물질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지요. 결국 십일조는 주일 성수와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구원과도 상관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할 마음이라면 당연히 구원받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물론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믿음의 분량을 고려해 주십니다.
육으로도 갓난아이는 너무 어려서 자신이 부모의 것으로 먹고 입는 줄을 알지 못하듯이, 갓 주님을 영접한 믿음의 1단계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이런 것을 분별할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이를 참작해 주시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압니다. 그런데도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면 이는 물질이 아까워서이며 하나님 앞에 계산하고 있는 모습이니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구원의 차원에서 십일조를 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해 십일조를 드리라 명하신 것이지요.

2. 십일조는 가난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축복

말라기 3장 9절에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기록될 당시 이스라엘은 이방인의 침략으로 나라가 멸망하여 성전이 훼파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갔지요. 나중에 일부 백성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성전과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했지만, 그들의 삶은 여전히 고달프고 불안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고난은 바로 이스라엘 온 나라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아서 임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므로 저주를 받은 결과라고 하셨지요. 이처럼 가난은 단순히 사람이 게을러서 또는 환경이나 조건이 안 좋아서 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영적으로 가난은 바로 죄로 인한 저주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저주에는 크게 영적인 저주와 육적인 저주가 있습니다. 영적인 저주란 범죄함으로 인해 영혼이 영원한 사망 곧 지옥에 이르게 된 것을 의미하지요. 육적인 저주란 육의 삶을 영위하는 데 있어 임한 모든 저주를 말합니다. 가난은 육적인 저주에 해당합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에게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땅’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천지 만물을 다 포함합니다.
만물의 영장인 아담이 저주를 받으니 그에게 속한 이 땅의 만물도 다 같이 저주를 받았습니다(롬 8:22).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저절로 풍성하게 맺힌 과실들을 그냥 따 먹으면 되었지만 이제는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므로 땀 흘려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난의 고통도 이때로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이 저주에서 속량되어야만 가난에서 벗어나 참된 부요를 누릴 수가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이런 저주가 끊어지고 축복의 물꼬가 트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물질이 없어서 십일조를 드릴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결코 믿음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왜 십일조를 드려야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저주에서 속량받으려면 우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로 인한 저주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즉 영혼의 영원한 사망을 면하게 하셨지요. 이뿐만 아니라 육적인 저주 곧 가난도 대속해 주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합니다.
또한 천하 만물, 금도, 은도 다 아버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니 아버지 것이 아들 것이고 아들 것이 아버지 것입니다. 이렇게 부요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이처럼 인생들의 가난의 저주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가난하게 태어나시고 짐승의 구유에 누이시고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영육 간에 저주에서 놓임 받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한 후에는 하나님의 규례를 열심히 지켜 나가므로 그 저주에서 온전히 놓임 받을 수가 있지요. 다시 말해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은 가난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3.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은 축복의 지름길

그런데 하나님과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가난의 저주, 건강의 문제 등에서 해방되지 않는 성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왜일까요? 말라기 3장 7절 전반절에 하나님께서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 말씀대로 행치 않기 때문에 인생의 문제, 시험 환난, 가난의 저주에서 놓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안식일의 거룩함을 알아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예배하지만 마음과 생각은 성전 밖 딴 데 있으니 하나님께서 “너는 나에게 오지 않았다. 나에게 와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말씀대로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 앞에 돌아간 것이고 그런 자녀들에게 하나님께서도 함께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녕 하나님께 돌아왔다면 하나님 말씀대로 빛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규례 중에서도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는 행함으로 물질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해 드릴 때 우리는 육적인 저주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이처럼 저주에서 속량되고 개인의 공의에 맞게 육적인 조건도 충족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고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할 때는 여전히 저주 가운데 매여 있게 됩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 중에도 성실해서, 능력이 있어서, 조건이 맞아서 큰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있지요.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축복이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 부유함은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경제적으로 여유는 있는데 질병, 사고, 가정불화, 자살, 자녀들의 여러 문제들로 얼마나 불행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무엇보다도 그 영혼이 장차 지옥에 가게 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요.
십일조 설교를 하면 마음에 부담을 갖거나 물질을 강요한다고 오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옥의 참상을 알기에 당회장님께서는 십일조와 주일성수에 대해 상세하게 말씀해 주실 수밖에 없으신 것입니다. 또한 구원받음은 물론이요, 이 땅에서도 넘치는 축복받기를 원하시기에 복 받는 길을 제시해 주고 계십니다.
당회장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가난을 잘 아시는 분입니다. 병상에 누워 있는 7년 동안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부채를 볼 때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읽고 보니까 모든 것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성경에 십일조나 심고 거두는 축복의 말씀들이 있었기에 초신자 때부터 기쁨과 감사로 행복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지요. 처음 참석한 부흥성회 시 십일조에 대한 말씀을 듣고 나서부터 십일조를 온전히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의 이조, 십의 삼조, 사조를 항상 드려 오셨더니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차고 넘치는 축복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이뤄가게 하셨지요.
다음 시간에는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방법에 대해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축복받는 공의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여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로 심어 나가면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마지막 양식을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에게 믿음으로 심어 기적을 체험한 사르밧 과부를 통해서도 넘치는 축복이 임하는 지혜로운 방법, 축복받는 공의를 터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사르밧 과부와 같이 믿음으로 행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서는 기름병과 가루통이 다하지 않는 놀라운 물질의 축복과 형통함의 복을 받으며 장차 천국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세세토록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끝]


2015-03-23 오후 11:26:29 Posted
2015-03-27 오전 8:26:55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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