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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악을 미워하는 것(8)  [잠 8:13]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15.07.19
믿음의 반석에 서지 못하게 하는 아홉 가지 악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이 마음 중심에서부터 싫고 미워지므로 신속히 악을 벗을 수 있지요. 오늘은 배신에 대해 증거합니다.

1.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

잠언 8장 1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말씀합니다. 마음에 악이 있는데 현재 드러나지 않는 대표적인 것이 교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인정받고 머리 되며 칭찬받을 때 많이 드러납니다. 낮은 자리에 있고 잘하는 것이 없거나 자신감이 없을 때는 교만함이 드러나지 않지만, 인정받고 칭찬받다 보면 드러나지 않았던 교만이 나오는 것을 봅니다.
그 예를 성경의 사울 왕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3장에 블레셋과의 전투에 앞서 사무엘 선지자가 정한 기한에 도착하지 못하니 사울 왕은 제사장이 드릴 번제를 자신이 드렸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도착해 “왕의 행한 것이 무엇이뇨”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백성은 나에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은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치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 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라고 이유를 댑니다.

그러면 전쟁에 앞서 너무도 급박한 상황이니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도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운 전쟁이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승리할 수 있다라는 것을 믿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사울 왕에게는 하나님을 온전히 경외할 겸손한 마음이 없었기에 당장의 유익에 따라 행한 것입니다. 사울은 많은 군대로 쳐들어 온 블레셋을 두려워하며 떠나는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고자 급히 번제를 드렸습니다. 진정 하나님께 전쟁을 부탁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의지한 것이지요.
이렇게 교만하면 자신의 유익을 앞세우며 월권하니 죄를 짓게 됩니다. 왕이 되기 전에는 겸손해 보이던 사울이 왕이 된 후에는 교만하여 하나님의 뜻도 어기며 자신의 생각과 유익에 따라 악을 행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현재는 상황상 드러나지 않았으나 마음 안에 내재되어 있는 교만이나 또 그와 같은 악이 무엇인지 찾아 힘써 버려야 할 것입니다.
2. 큰 배신으로 드러나지 않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배신

배신은 “어떤 대상에 대해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서로 비밀도 나누는 믿었던 친구가 시간이 지나 나의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말한 것을 알았을 때 배신감 느낀다 하지요. 또 서로 의지하며 친한 관계였는데 나보다 부요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 생기니 그 사람과 가까이 지내고 나와는 거리가 멀어질 때도 배신감을 느낄 것입니다. 연인 사이에서도 오랜 시간 연애하고 결혼을 약속했는데 나보다 배경이 좋은 다른 이성에게 간다면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겠습니까? 내가 배신당한 입장이라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겠는지요.
배신은 사람 사이에서만 성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나 주님 앞에 나의 믿음과 신앙에 대하여 더 깊이 정립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초신자가 믿음을 저버렸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께 대해 배신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요. 은혜 체험도 하고 응답도 축복도 받아 분명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예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었음에도 그 믿음과 신앙을 저버리는 것을 배신이라 합니다.

그러면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다 교회를 떠났을 때만 믿음과 신앙을 저버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 체험을 하고 진리를 알면서도 사망에 이르는 죄를 행하는 것 또한 배신임을 잘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말씀하십니다(히 6:4~6). 또한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였을 때도 용서되지 아니함을 분명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히 10:26~27).
지난날 우리의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어디서 볼 수 없는 권능을 체험하며 은혜와 감동 속에 신앙생활 하는 일꾼이요, 주의 종이면서도 짐짓 죄를 지어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을 아신 목자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매어 달리셨지요. 그 희생과 헌신으로 다시 용서의 기회를 얻었고 큰 감사 속에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이런 회개의 시간을 지나 어떤 이는 영으로 들어오고, 반석을 지나 영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는데 어떤 이는 겨우 3단계의 믿음을 지나거나 반석을 향해 힘겹게 가기도 합니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신속히 믿음의 성장을 이룬 사람들은 자신의 지난날의 허물과 죄가 하나님께 대해 주님과 목자님께 대해 얼마나 큰 배신이었고 잘못이었음을 중심에 깨닫고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켰기 때문입니다.
‘나의 배신으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나로 인해 목자님께서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셨을까?’를 중심으로 느끼고 회개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제 변화되어 아프셨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상해 드리고자 힘써 노력합니다. 이것이 진정 배신의 잘못을 깨달은 모습이지요.
우리가 배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목자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척 후 33년 동안 사랑과 헌신만 보았습니다.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권능을 나타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오직 영혼들을 위해 사신 그 삶들을 보았습니다. 목자님의 기도로 우리의 질병과 문제가 해결되어 감사의 고백을 할 때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가르치시는 목자님의 가르치심을 들었습니다. 가난한 성도, 힘든 일꾼들을 위해 힘써 구제하셨지 목자님께서 모으고 갖고 즐기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악한 이들이 거짓을 지어내어 말하니 듣고자 하고 정말 그런가 하고 의심하며 악한 말을 믿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꼭 미혹하는 말을 듣고 교회를 떠나서만 배신이 아닙니다. 거짓을 믿고 내 마음이 요동했다면 이는 온전한 믿음과 신뢰라 말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요, 이는 목자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배신과 같지요. 그러니 이런 일들이 죄의 담이 되어 시험 환난에 빠지고 사단의 역사를 받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때에도 목자님은 판단 정죄한 이들에 대해 조금의 감정도 갖지 않으시고 오직 중보와 사랑의 기도를 올려 주셨지요. 하지만 지금도 은혜를 저버리고 신뢰관계를 깨뜨린다면 그 사랑과 희생도 모르는 사람이며 여전히 자신의 유익에 따라 배신할 수 있는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변화가 더디어 목자님께서 안타까워하시니 배신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하고 있다면 됩니다. 하지만 큰 사랑을 받고 은혜를 입었음에도 뒤로 후퇴하거나 힘들다 멈춘다면 목자님의 희생과 사랑을 모르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있지 않은가?’ 항상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3. 배신의 악을 버리려면 배신에 관련된 악을 찾아 버려야

배신이 너무나 나쁘다는 것을 알기에 배신하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에 배신의 속성 즉 간사한 마음, 자기 유익을 구하는 마음, 교만함이 있을 때 이 악들이 환경이 맞아 떨어지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배신을 낳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의 한 사람인 가룟 유다가 그리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며 그 권능을, 기사와 표적을 보면서 예수님이 이렇게 백성들에게 인정도 받으시고 하니 ‘그 권세를 얻으실 때 나도 그 권세를 함께 가질 수 있겠다.’라고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힘 있는 이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하든 죽이려고 하는 이런 모습을 봅니다. 결국 ‘내가 예수님과 함께해 봤자 유익될 게 없구나.’라는 결론이 나니 그 스승을 팔아넘기는 배신자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의 유익을 위해 변개하는 모습, 나쁜 꾀를 쓰거나 상대를 어렵게 하는 악을 행하는 간사한 마음,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받기 위해 사람에게 잘 보이려 하는 모습의 간사함은 작게나 크게 배신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될 때는 상대를 좋아하고 함께하다가 다른 사람이 내게 더 유익되어 보이면 전에 내가 섬겼던 사람, 좋아했던 사람, 붙좇았던 사람은 끊어내고 더 유익되는 사람에게 옮겨 가지요. 내게 유익이 되는 사람에게는 상냥하고 친절하다가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함부로 대하고 하대한다면 이 또한 간사함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자기 유익에 따라 간사하게 움직여 가는 모습,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또 교만함으로 인해 배신이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가난하고 어려울 때 도와준 사람이 시간이 지나 어려워졌는데 내가 돕지 않는 건 물론이고 무시합니다. 내가 도리어 어깨에 힘을 주고 상대에게 주장하는 자세입니다. 이런 모습도 교만함으로 인해 은혜를 갚지 못하는 배신으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승보다 더 머리가 되고자 하는 교만함도 큰 악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청출어람’이라는 말이 있어 스승과 비교하여 더 나은 학식과 능력을 갖추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마 10:24) 하신 말씀처럼 더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은 교만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목자님은 교역자들이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으면 기뻐하시고, 목자님보다 십일조를 더 많이 하는 성도가 나오기를 중심으로 바라고 기도를 해 주십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목자님보다 더 큰 권능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없는 것이고 “목자님보다 더 많은 십일조 드리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선한 기도는 아니겠지요.
이처럼 현재 배신으로 나오지 않았다 해도 내 마음에 배신으로 나올 수 있는 속성이 있는지 잘 살펴보아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악을 버릴 때 악을 버리기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는 것은 물론, 선을 심으면 그 반대의 악이 빠져 나가기도 합니다. 배신은 악이지만 은혜를 알고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은 선입니다. 그러니 배신과 반대인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을 줄 아는 행함으로 변화되고자 노력하여 배신이라는 악을 신속히 버리시고 하나님 앞에 사랑과 인정을 받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2015-07-20 오후 11:21:00 Posted
2015-08-20 오전 10:37:08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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