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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팔복(7)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 1 [마 5:7]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16.01.24
오늘은 우리가 가장 아름다운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이뤄야 하는 팔복 중 다섯 번째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에 대해 증거합니다.



1. 팔복의 영적인 깊이와 넓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영원한 천국 새 예루살렘 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사랑장, 곧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그리고 팔복이 맺혀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성령의 열매가 다 맺히면 성결을 이루어 영으로 들어가고 팔복이 온전히 임하면 온 영의 사람이 됩니다.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리의 항목들이 우리 마음에 맺혀 있는 것이고, 팔복은 마음에 맺힌 성령의 열매들을 행함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온유’라는 항목은 사랑장에도 성령의 열매에도 팔복에도 나옵니다. 물론 이 세 가지는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의미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곧 ‘유순하고 부드러우며 사랑과 덕이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영적인 깊이와 넓이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사랑장의 온유가 영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온유함을 말하는 것이라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온유는 좀 더 포괄적으로 범사에 온유한 것입니다. 또한 온유라는 덕목이 마음에 열매로 맺힌 것이 성령의 열매라면 팔복은 마음에 맺힌 열매가 온전히 삶 가운데서 행함으로 나타나 효력을 발하여 축복을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면, 아름다운 나무에 탐스럽고 실한 천국의 과실들이 주렁주렁 맺혀 은혜로운 모습을 이루었을 때 이것이 성령의 열매가 맺힌 것이라면 팔복은 천국의 과실을 따서 먹음으로 유익을 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팔복의 온유는 온유함으로 많은 사람을 품는 것뿐만 아니라 내 마음에 품어 그를 변화시키고 더 좋은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온유한 사람들이 여러 명 있어서 “아, 저 사람들은 온유하다.”라고 말할지라도 각 사람이 이룬 믿음의 단계에 따라 온유의 깊이는 서로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팔복이 가장 높은 말씀이고 온 영의 말씀이니까 팔복 말씀만 듣고 무장하면서 팔복 말씀만 좋아하면 되겠다.” 하면 안 됩니다. 팔복에 대해서 많이 듣고 이해하는 것 같아도 이루지 못하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장의 사랑부터 하나하나 이루어야 온전히 팔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팔복은 진리가 마음에 열매로 맺힌 것만이 아니라 그 하나하나가 행함으로 나타나므로 삶의 매 순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 팔복에 나오는 ‘긍휼’의 영적인 의미

마태복음 5장 7절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했습니다. 여기서 긍휼히 여긴다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가엾게 여긴다, 불쌍하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긍휼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양선의 마음과 비슷합니다. 양선이란, 간단히 말해서 마태복음 12장 19~20절 말씀대로 ‘다투지 아니하고 들레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는 마음’입니다. 바로 주님의 마음이지요.
만약 갈대가 상했다면 쓸모가 없으니 고민 없이 꺾어 버릴 것입니다.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면 오히려 검은 연기, 그을음만 나고 냄새가 나기에 꺼 버리는 게 더 낫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셨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는 마음이셨습니다. 장차 자신을 팔 자인 가룟 유다도 끝까지 사랑으로 권면하시며 깨우쳐 주려고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양선의 열매가 우리 마음에 맺혀 행함으로 나타나되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이 팔복의 긍휼입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긍휼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용서의 긍휼입니다.
양선이란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 예수님의 마음이라 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아직 그 양심이 화인 맞지 않고 구원받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에 대해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악을 행했다 해서 즉시 징벌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 구원에 이르기까지 참아 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시편 103편 8~10절에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는다는 것은 성령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진리대로 살지 못한다 해서 그를 즉시 버리지 않으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아직 온전치 못하여 죄를 범하는 사람이라 해도 어찌하든 성령으로 깨우치고 진리 가운데 변화되어 갈 수 있도록 끝까지 인내하며 인도하시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 주님의 마음을 닮아 누가 여러분에게 악을 행해도 그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바른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이렇게 바른길로 인도하고 용서하는 데 있어서의 필요한 순서가 있는데 바로 상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자기 입장에서 자기 유익을 좇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그의 유익을 좇아 주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이해할 수 있고 긍휼을 베풀 수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가 상대를 긍휼히 여길 때에 우리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기에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우리의 죄악도 용서받을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으며 신속히 응답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 왕도 선한 일을 했기에 병들어 죽어갈 때 하나님 앞에 면벽하며 통회자복하고 또 지난날 이런 선한 일을 아뢰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니 그 생명을 15년이나 연장해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 크신 긍휼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사해 주시지 않으셨다면 지옥에 떨어져 세세토록 고통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용서받고 구원을 얻었지요. 또 주를 믿으면서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심히 아프게 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집 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기다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진심으로 돌이켜 통회자복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하시고 동에서 서가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기억하지도 않으십니다(시 103:12~13).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용서의 긍휼을 받으려면 우리도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했습니다. 우리가 범죄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 때라야 우리가 범죄한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긍휼히 여겨 달라고 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주기도문은 매일 하면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긍휼을 베풀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를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도 그런 예가 나와 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쭙는 것이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하셨습니다. 몇 번인가 헤아려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히 용서하고 긍휼을 베풀어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비유를 들어 주셨습니다. 어떤 종이 자기 왕에게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는데 갚을 길이 없으므로 모든 소유뿐 아니라 자기와 아내와 자녀들까지 다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종이 왕에게 엎드려 자비를 구함으로 왕이 불쌍히 여기고 그 빚을 탕감해 주었지요. 그런데 이 종은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이 자비를 구하는데도 그를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이를 알게 된 왕은 심히 노하여 이 종을 다시 불러 그 종 역시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비유를 들어 주신 예수님께서는 결론적으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8:35).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전에 지은 죄 또한 하나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온전히 용서하였다면 사랑하는 것이 참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용서를 구하는데 “나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 하며 원수 맺고 있다면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는 성도라 할 수 없습니다.
형제를 용서하라는 것은 꼭 상대가 용서를 구할 때만이 아닙니다. 아예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과 자기가 잘못한 것도 모르는 이런 사람도 용서를 해야 합니다. 진정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사랑을 알고 믿는 사람은 상대가 어떠하든 내 편에서 끝까지 용서하는 것입니다. 형제의 티가 보인다면 이 또한도 온전치 않습니다. 아직도 형제의 티를 보고 있거나 형제의 허물을 말하는 사람은 큰 악이라는 것을 알아 신속히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상대가 하나님 앞에나 교회나 목자 앞에 담이 있다면 잘못된 것은 돌이킬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지요. 그런데 상대를 권면한다고 하면서 상대의 허물을 말한다면 안 되지요. 상대가 악을 행한 것이 내 의와 틀에 맞지 않으므로 불편함 가운데 찌르는 것을 사랑의 권면인 것처럼 포장해서도 안 됩니다. 내 의와 틀로 허물을 지적하면 상대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겉으로는 진리의 말씀을 인용한다 해도 사랑으로 하지 않고 악한 마음으로 말씀을 인용한다면 하나님 앞에서도 합당하지 않으며 성령의 역사를 받지 못하니 상대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또 내가 높은 마음이 되어 상대를 가르치고 내 뜻대로 주관하려고 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참으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는 긍휼 가운데 그를 위해 대신 죽어 줄 수 있는 사랑의 마음으로 기도하며 권면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긍휼히 여기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주님의 마음이십니다. 내게 악을 행하고 불이익을 끼치며 힘들게 하는 사람도 용서하되 용서라는 단어가 필요 없는 조금의 악한 감정도 없는 사랑의 마음, 도리어 상대를 위해 기도해 주며 변화시킬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을 이루어 새 예루살렘 성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16-01-26 오전 2:04:24 Posted
2016-03-04 오후 5:21:35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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