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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팔복(12) 화평케 하는 자의 복 2 [마 5:9]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16.06.26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 중에 일곱 번째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을 받기 위해 이루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의 복 첫 번째 시간에는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 해도 각기 아들의 권세가 다름을 설명하고 예수님께서는 어떤 화평의 직책을 감당하셨는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도 맏아들이신 예수님을 닮아 모든 것에 화평을 이룰 때 예수님이 가지신 아들 된 권세를 누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에 화평케 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님과의 화평은 물론, 자기 자신과의 화평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구체적으로 살펴보았고 오늘은 이어서 설명합니다.

둘째, 양선의 마음을 이루어야 합니다.
양선은 성령 안에서 선을 추구하는 마음, 진리 안에서 선을 좇아 행하는 마음입니다. 흠도 티도 없이 깨끗한 주님의 마음이지요. 양선의 모습으로 모든 사람 과 화평을 이루신 예수님의 마음을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라고 했습니다(마 12:19~20).
사실 예수님은 그리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율법자들이나 권세자들이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훼방을 하거나 율법으로 꼬투리를 잡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오직 선으로만 행하심으로 모두와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만일 다툼이 일어났다면 당연히 화평이 깨진 것입니다. 들레는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고 높아지려 하니 남을 무시하여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줍니다. 혹 자기를 자랑함이 많아서 상대를 힘들게 하는 모습이 있는데도 나는 상대에게 악을 행하지도 않고 불편케 하지 않았다 생각하면 큰 착각입니다.

그러므로 다투지 않고 자랑하거나 높아지려는 마음이 없으며 요란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양선이요, 화평의 길입니다. 또 상한 갈대나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이 심히 악한 사람, 죄로 심히 물들어 있는 사람이라도 긍휼히 여기며 어찌하든 변화되기를 바라며 상대를 품는 마음이 양선이지요.
이렇게 양선의 마음이 있는 사람은 어떤 일을 이룰 때 다른 사람의 마음을 두루 살핌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감싸주며 많은 사람을 포용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나와 의견이 맞고 뜻이 맞는 사람, 착하고 선한 사람뿐 아니라 나를 미워하고 악한 사람도 사랑하고 포용할 수 있지요. 상대가 변화되어야 화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기 전에도 싫어하지 않고 이해하며 안타까이 여겨 품었을 때 화평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요 상대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미움, 판단, 정죄 등 악한 마음이 있어 화평이 깨어진 것이 아니어도 상대의 입장이 되어주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므로 화평이 깨어지는 일도 봅니다. 일꾼 중에는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하지만 믿음이 약한 상대나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화평이 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어떤 일을 이룰 때 하나님의 나라에 더 유익이 될 것 같다 생각하면 앞뒤를 보지 않고 열정적으로 일을 추진해 나가다가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반대의 의견이 있거나 걸림이 되는 사람들이 있어도 내가 보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더 좋은 쪽을 택하였으니 계획대로 추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는 그 열심은 기특하지만, 실족하고 상처받는 영혼들에 대해서는 마음 아파하실 것입니다. 비진리가 아니라면 상대의 연약한 믿음도 고려하여 화평을 좇아가는 것, 몇몇 사람이 뜨겁고 충만하게 많은 일을 이룸보다 많은 사람과 화평 속에 적은 일을 이루었다 해도 이것이 하나님께 더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일을 크게 이루는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닮기를 더 원하십니다. 그렇다고 ‘내가 하나님 마음을 닮지 못했으니 이제 충성은 뒤로 하고 하나님 마음을, 선을 닮는 것부터 해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닮기 위해 힘써 노력하면서 혹여 뒷쳐진 사람은 없는지 항상 살피는 눈과 마음을 가진다면 더 신속히 변화될 것입니다.
교회의 일만이 아니라 부부, 가정, 일터, 사업터에서도 비진리가 아니라면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여 화평을 좇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화평을 이루기 위해 양선의 마음이 필요한 것이며 범사에 선을 좇되 악한 사람이나 부족한 사람이라도 이해하고 품어야 모두와 화평할 수 있습니다.

셋째,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야 합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이 함께 거할 때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습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롯은 거처를 나누어 각자 어느 편으로 갈지 정해야 했습니다. 질서를 따져도 아브라함이 어른이요, 롯이 받은 축복도 아브라함 덕분이었으니 먼저 좋은 땅을 택하여 갈 권리는 당연히 아브라함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먼저 선택권을 줍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중심에서 조카가 더 좋은 땅을 택하기를 원하는 마음, 상대의 유익을 구하는 마음이었기에 롯과도 온전히 화평을 좇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더욱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상대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나를 힘들게 하며 이것 달라 저것 달라 요구만 하여도 사랑하여 화평할 수 있나요?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하면서 너무 무례하며 교양도 없이 행하는 사람에게도 사랑으로, 섬김으로 대하셨습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함만이 아닌 마음 중심에서의 섬김입니다. 겉으로는 희생하고 섬겼는데 상대가 변화되지 않고 여전히 자기 유익만 구하니 마음에서는 불편해하고 피한다면 온전한 화평이 아닙니다. 중심에서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의 마음에 맞춰 줄 때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먼저 섬겨 주고 순종할 때,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내 의견과 생각이 가장 좋다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여 섬길 때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내가 옳다 해도, 상대로 인해 내가 좀 불편하더라도 희생할 수 있어야 화평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부부, 부모와 자녀, 형제간에도 진리를 따라 내가 먼저 상대의 입장을 생각해 주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부모님이 자녀에게 “나는 아버지니까 무조건 나에게 순종해라” 한다면 어릴 때는 따른다 해도 마음 속에서는 불평 불만이 자라나 성장해서 반항하거나 비뚤어진 성격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부모 자녀 사이에도 먼저 섬겨 주고 상대의 마음에 맞춰 줄 때 화평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도 오히려 못 박는 저들의 죄를 사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렇게 마음 중심에서 원수까지도 사랑하여 모든 사람 앞에 상대의 유익을 구해 줄 때라야 참으로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핍박하고 찌르고 헐뜯고 말을 지어내서 욕하는 악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오히려 중보 기도를 해 줄 수 있는 마음이라면 어느 누구와도 화평을 이룰 수 있으며(마 5:44) 하나님의 참 아들로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갖추어진 것입니다.

넷째, 자기를 부인하고 상대를 위해 죽어지는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믿음의 분량이 다르고 자기 의와 생각이 다릅니다. 타고난 성품과 받은 교육, 자라온 환경과 습관도 다르기 때문에 각기 옳다 생각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다르지요. 이렇게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른데 서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장하면 화평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내가 옳다 해도 상대를 위해 희생할 줄 알아야 화평을 이룰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깔끔하고 정갈한 것을 좋아하는 A라는 사람이 있는데 같은 방을 사용하는 B라는 사람은 지저분하고 어지르는 성격입니다. 분명히 하나님 앞에서는 깨끗한 것이 합당하지만 상대가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감정이 상하거나 상대를 찌르고 부딪침으로 다툼이 생긴다면 그 또한 하나님 앞에 합하지는 않지요. 지저분하면 내가 치워 주고 불편하더라도 상대가 변화될 때까지 기다려 주며 화평을 이루는 것이 더 합당한 모습입니다.
한 가지 주의할 것은 화평하기 위해 오래 참고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는 것과 상관하기 귀찮아서 모른 척하는 것은 다릅니다. 상대의 일에 관심이 없거나 그저 부딪히기 싫으니 사랑의 권면도 하지 않는 무관심한 것과 화평하기 위해 기다려 주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상대와 화평하기 위해 비진리를 행하는 사람과 타협하여 비진리를 행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믿지 않는 가족들과 화평을 이루기 위해 우상 앞에 절을 할 수는 없지요. 주님을 믿지 않는 직장 동료들이 주일에 친목회를 하자고 한다거나 회식자리에서 술을 딱 한 잔만 마시라고 하면 단호하게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쪽을 택해야 합니다. 물론 최대한 지혜롭게 해야 하지만 비진리를 행하면서 사람과 화평을 좇는다는 것은 세상과 타협하고 범죄하는 것입니다.
또한 회사에 갓 입사했는데 사장님이 주일에 친목회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나님과 화평을 깨지 않기 위해서 “사장님, 저는 교회 다니고 있습니다. 주일을 지켜야 하니 저는 불참하겠습니다.”라고 단호히 말하면 되겠습니까? 지혜롭게 해야지요. 말을 해도 사장님이 기분 좋은 때를 택해서 해야 하고, 평소보다 회사를 위해서 더 열심히 일하면서 상사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행함도 없이 주변 상황도 살피지 않고 말한다면, 더구나 상대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분이라면 도리어 교회를 싫어해서 구원받는 길도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세상 사람과 화평을 깨지 않기 위해서도 지혜와 선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두루 화평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더 희생하고 섬기며 헌신해야 합니다. 밀알이 죽어져야 열매를 맺음같이 때론 내가 더 많이 수고해야 한다 해도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생각하며 기쁨으로 희생할 때 화평을 이루고 더 나아가 상대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세기 17장 1절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이 주님을 닮아 온전히 성결되고 하나님의 선과 사랑을 이룬 완전한 자가 되기를 원하시지요. 모두와 화평케 하는 자가 될 때 바로 하나님을 닮은 완전한 자녀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자녀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주님의 마음을 닮아 모든 것에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며 하늘의 영광과 권세를 누리고 천국에서도 하나님의 보좌가 계신 새 예루살렘에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16-06-27 오후 11:02:20 Posted
2018-06-07 오전 11:39:09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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