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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 11:39-44]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16.10.02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살리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큰 권능과 나사로 가족의 ‘믿음의 행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나사로 가족처럼 참 믿음과 사랑을 소유하면 무엇이든 응답받아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병든 나사로에게는 마리아와 마르다라는 두 명의 누이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라는 동네에 살았지요.
마리아는 예수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발을 씻기던 여인으로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입니다(요 11:1~2). 하지만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막달라 마리아와는 다른 여인이지요. 그러면 유명한 선지자나 예수님의 제자도 아닌 평범한 이들 남매가 어떻게 예수님의 크신 권능의 증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요?

1.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유대로 다시 가셨습니다. 그리고 병든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오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요한복음 11장 21~22절에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고백합니다.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서는 매우 애통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입니다. 물론 마르다는 지금 나사로가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고백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하시자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답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마르다는 창세 이후 죽어서 썩은 냄새가 나는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마음 중심에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믿음으로 구하면 반드시 응답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믿고 의지했습니다.
만약 마르다가 그런 기적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나사로를 다시 살려달라고 청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혹여 ‘그런 고백이 뭐 어렵나?’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위독할 때, 또는 경제적으로 파산 밖에는 길이 없을 때 등 더는 가망이 없는 상황에 놓일 수 있지요. 이럴 때도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면 소생될 줄 믿습니다!” 이렇게 마음 중심으로 믿음의 고백을 하실 수 있겠는지요?
그런데 응답을 받으려면 지식적인 믿음을 영적인 믿음으로 바꿔야 합니다. 마르다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사와 표적, 권능을 보고 들었기에 아는 지식 안에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아직 지식적인 믿음이긴 하지만 마르다의 고운 중심을 아셨기에 참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심으로(요 11:25~27) 결국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또한 마르다는 ‘나사로가 다시 살아 무덤에서 나오는 체험’을 통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견고한 믿음을 갖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오늘날도 여러분을 이런 믿음으로 이끌어오셨습니다. 교회 개척 이래 이 제단에 기사와 표적과 권능의 역사들을 늘 보여주셨습니다. 가까이는 지난 수련회를 통해서도 각색 질병과 연약함이 치료되었을 뿐 아니라 소경이 다시 보게 되는 놀라운 표적들까지 나타났습니다. 특히 교육 후 은사집회 때는 아버지의 근본의 공간을 열어 신령한 기운을 느끼게 하셨습니다.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출 40:35) 하신 말씀이 피부에 와 닿는 시간이었습니다. 어디 이번 수련회뿐이겠습니까? 마치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하시는 것처럼 여러분 모두가 참 믿음을 가질 때까지 끝도 없이, 무수한 역사들을 보여주셨습니다.
저 또한 어찌하든 성도님들에게 믿음을 심어주고자 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보고 있는 권능은 바로 40년이 가깝도록 기도하고 또 기도해온 세월의 결실입니다. 보여주고 또 보여주어도 왜 그렇게 믿음을 못 가지느냐고 질책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하든 늘 더 큰 권능, 더 새로운 차원의 권능을 보여주어 믿음을 심어주기만을 원했지요. 이렇게 해서 권능의 차원이 계속 달라지고 있기 때문에 이번 수련회 때에도 많은 분들이 믿고 응답받아 영광 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만이 아니라 누구나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제3도약기의 원년인 2010년부터는 영, 더 나아가 온 영의 흐름을 주심으로 좁고 협착한 믿음의 길이 넓게 열렸습니다. 혹 자신의 믿음이 작다 하시는 분도 목자를 통해 나타나는 일들을 보고서라도, 목자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목자로 하여금 대신 쌓게 하신 99%의 공의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나사로의 가족들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을 믿었듯이 여러분도 믿고 응답받아 크게 영광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 3절을 보면 나사로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기별을 합니다. 그런데 이때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만 합니다. 이 짧은 한마디만 보아도 예수님과 이 가족이 얼마나 끈끈한 사랑으로 하나된 관계였는지, 한 가족처럼 얼마나 마음이 잘 통하는 사이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두 자매는 ‘전갈을 보내는 이가 누구이고 지금 어떤 상황이고 어떻게 해주시라’고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절친한 사이일수록, 깊이 신뢰하는 관계일수록 여러 말 하지 않아도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원하는 것을 해줄 수가 있지요. 또 어려운 부탁을 한다 해도, 하는 사람이나 부탁을 받은 사람이나 거리낌이 없습니다. 나사로의 가족이 예수님과 바로 이런 관계였던 것입니다. 이런 신뢰의 바탕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즉 평소에 쌓아온 사랑이 신뢰의 바탕이 되었고 이 신뢰와 사랑이 있었기에 죽음이라는 문제도 능히 해결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사로와 그의 가족들은 평소에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했을까요?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린 행함이 그 사랑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향유를 부어드리고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어드리는 행함은 참으로 감동적인,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었지요. 그런데 이런 표현이 하루아침에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극진히 섬겼기 때문에 나온 행함이었지요.
마리아와 그의 가족들은 예수님께 은혜를 받은 후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이든 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느라 잘 주무시지도 잘 잡수시지도 못하고 밤에도 기도하시기 위해 홀로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이런 삶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고된 사역을 하셨지요(마 8:20). 이를 잘 아는 마리아와 가족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편안케 해 드릴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까?’ 이런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근처에 오시기만 하면 자신들의 집으로 모셔서 정성껏 공궤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38절에는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지요. 어떤 육적인 것을 기대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기에 영접했지요.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으로 믿는 동시에, 함께하면 너무나 편안하고 행복한 가족처럼 따뜻한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마리아와 가족들의 이런 고운 마음의 향이 우리 예수님께도 전달되었기에 예수님께서도 이 가족을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육의 사람도 상대가 너무 사랑스러우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고 싶어 합니다. 성경의 예를 보면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이 의붓딸인,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어 기쁘게 하자 원한다면 나라의 절반까지 주겠노라 말합니다. ‘에스더’서를 보면 바사 왕 아하수에로 역시 왕비인 에스더가 심히 사랑스러워 보이자 나라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하지요. 비록 순간적인 감정에 이끌려 경솔히 말했을지언정, 그 순간만큼은 무엇이나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던 것입니다. 하물며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은 어떠실까요? 사랑하는 이들에게 얼마나 주고 싶어 하시겠습니까?
성경 곳곳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하나 된 이들에게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거듭 말씀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지요. 저는 담대히 간증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끈끈한 사랑으로 하나 되고 마음이 밝히 통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응답과 축복을 받았는지요.
한 예로, 제가 아버지 앞에 기도한다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아버지 나라와 영혼들을 위해 구할 뿐 저 개인을 위해 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하는 기도는 대부분 “아버지 사랑합니다. 뵙고 싶어요. 빨리 아버지 품에 안기고 싶습니다.” 이런 고백이지요. 이렇게 제 마음이 아버지 하나님과 사랑으로 하나 된 후부터는 구하지 않아도, 무엇을 마음에 품기만 해도, 무엇을 품었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할 때에도 알아서 척척 주시는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도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사랑으로 하나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시편 37편 4절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하신 말씀이 여러분의 말씀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사로가 병들어 죽은 상황에서도 마리아와 마르다는 하나님과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에도 예수님께 받은 은혜와 사랑이 마음에서 결코 식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평소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는 이런 고운 마음을 착실히 쌓아갔기에 절체절명의 순간에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또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에게 알렸습니다. 이들의 행함이 성경에 기록되어 후대의 사람들에게까지 알려짐으로써 크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제단에 오셔서 목자를 통해 은혜 받으신 분들도 그 순간들을 늘 되새기신다면 그 사랑과 신뢰가 결코 흐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자의 공간 안에서 항상 응답과 축복을 받아 영광 돌리게 되지요. 더 나아가 결국 목자와 함께 그리운 아버지, 주님이 계신 곳 새 예루살렘까지 함께 가게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 주님을 사랑하고 신뢰하면 죄가 너무 미워져서 결국 벗어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장차 만민의 제3도약기의 영광은 상상 그 이상일 것입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한 믿음이 더 견고해져서 여러분 모두가 진정 “믿으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항상 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6-10-04 오후 7:45:49 Posted
2016-10-12 오후 1:50:54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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