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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제자들 어버이 주일 [눅 22:28-30]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18.05.13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인물과 사건들은 우리에게 교훈이 되므로 성결을 향해 달려가는 자신에게 대입하여 변화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과 함께 사역했던 제자들의 변화되기 전 모습을 통해 어떻게 해야 참 믿음과 참 신앙을 소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간의 공생애 동안 제자들을 부르셔서 사랑으로 가르치며 인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기사와 표적, 권능을 보았기에 핍박과 어려움 중에도 예수님을 붙좇았고 소중히 섬겼지요. 그러나 아직 믿음이 온전하지 않아 여전히 의심이나 육신의 생각이 있어서 예수님의 책망을 듣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할 때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다가 주님의 부활 후 뒤늦게 깨닫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할 것도 아셨지만 성령을 받으면 가르침을 깊이 있게 깨닫고 변화되어 온전케 될 것을 아셨기에 3년의 짧은 시간 동안 열심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셔도 ‘부족한 자신들이 변화될 것을 믿고 가르쳐 주셨지.’ 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가르침과 행하심을 기억하여 더 힘써 빠른 시간에 변화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리해야 할 것입니다.

1. 영적인 말씀에 부딪혀 예수님 곁을 떠난 제자들

예수님께는 12제자만이 아니라 70인의 제자들이 있었습니다(마 10:2~4 ; 눅 10:1). 요한복음 6장에 보면 또 다른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기사와 표적을 보고 붙좇았지만 영적인 말씀을 하시니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고 어렵다며 떠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 제단에도 지금까지 목자님의 권능으로 죽을 자가 살아나고 불치 난치병을 치료받으며,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받아 기뻐하며 간증한 수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세상을 끊고 죄악을 버리며 성결한 삶을 살라는 영적 가르침이 어렵고 무겁다며 떠났지요. 어떤 이는 한동안 세상을 끊고 기도하며 순종하여 하나님께 응답받고 교회에서도 인정받아 일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음 중심에 세상 사랑함을 버리는 참 믿음이 없으니 변개하여 다시 세상으로 빠진 이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셨지요(요 6:65). 우리도 하나님이 부르시고 붙들지 않으시면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습니다. 내 믿음과 신앙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변개한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사랑과 은혜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많은 응답과 축복, 치료의 체험도 주셨고 은혜와 감동도 주셨지만 짐짓 죄를 짓고 불순종하여 하나님께서 붙드실 수 없기에 스스로 떠난 것입니다.

2.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

예수님께서는 떠나는 제자들을 안타까워하시며 12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대답하지요.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십니다(요 6:70).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자임을 이미 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돈궤에서 도적질하는 것도 아셨지만 드러내시지 않고 돌이키기 원하며 선과 사랑으로 끝까지 품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을 붙좇으면 권세와 부를 누릴 것이라 생각한 것과 달리 무리들에 의해 예수님께서 죽임당할 분위기가 조성되자 권세자들에게 예수님을 팔아버립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면 ‘불이익이 올 거다.’라는 이기적인 마음에 함께했던 제자들이나 슬퍼할 많은 사람들, 무엇보다 선과 사랑만 행하고 가르치신 스승 예수님의 고통은 생각지 않고 큰 배신으로 나왔습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가룟 유다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마음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게는 배신의 마음이 있지 않은지? 은혜를 받았으면 중심에서 감사하며 잊지 않고 갚는지? 한 번 감사하다고 인사했으니 되었다 하지 않았는지? 은혜를 입었을 때는 감사하다가 서운한 일이 있으면 서운해하며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는지?’ 살펴 배신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벗어 버려야 합니다. 목자님께서는 큰 은혜나 작은 도움도 잊지 않고 소중히 여기며 변함없이 고마워하시고 그 은혜를 갚으십니다. 몇 번 감사 인사하고 할 바를 다했다고 하지 않으시지요. 이런 마음이 바로 배신과 전혀 상관없는 선의 마음입니다.

3. ‘누가 크냐’ 변론한 제자들

마태복음 18장 1절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여쭙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이 마가복음 9장 33절 이하에 더 자세히 나옵니다.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노중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저희가 잠잠하니 이는 노중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했지요. 이때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사람이 큰 자’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또 마태복음 20장 20절 이하를 보면 12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아와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이에 열 제자는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분하게 여겼습니다. 서로 더 높아지고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니 이런 반응이 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더 인정받고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는 있지 않은지 찾아내야 합니다.
천국에서 더 존귀하며 하나님 보좌 가까이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소망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온전한 소망과 믿음인지, 욕심의 마음인지,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을 가리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하지요. 목자님이 세계 선교를 이루실 때 누가 앞서고 인정받으니 낙심하고 힘들어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목자님이 마음껏 세계를 이루실 때 우리가 서로 하나 되고 소중히 여기며 협력하여 돕는다면 큰 힘이 되어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리며 재창조의 권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31절 이하에는 베드로가 은근히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가 가까웠기에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듣자마자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마음과 진실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말이지만 여기에는 다른 사람을 끌어들여 깎아내리는 모습이 보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선이 부족하면 남을 깎아내리면서 자신의 진실을 말하는 것을 봅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일할 때 인정받았다 해도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 것은 하늘에서 영광과 상급이 될 수 없고, 높임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아무리 낮은 곳에서 섬기는 일을 한다 해도 중심에서 선과 사랑으로, 들레지 않으며 겸손으로 행했다면 그가 천국에서 큰 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마 20:26~27).

4. 성령 받기 전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

베드로의 변화되기 전 모습 두 가지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 때가 되어 가룟 유다와 함께 온 무리들에게 잡히십니다. 이때 베드로는 의분을 참지 못하고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칼로 벱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고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하시며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말씀하셨습니다(마 26:52~54). 예수님께서 아무런 죄와 허물이 없으시지만 악한 이들에게 잡혀서 고문과 수치를 당하며 십자가에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을 보면서 큰 슬픔과 애통, 의분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우리에게도 베드로와 같은 의분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선과 진리를 핍박하고 어둠으로 가리려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여호와를 의뢰하여 선을 행하라”(시 37:1~3)는 말씀대로 모든 것에 선과 하나님 기준으로 행해야 합니다. 감정이나 의분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과 사랑, 믿음으로 힘써 기도하고 금식하며 충성해야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베드로에게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모습이 있지요.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담대했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끼니 너무도 초라한 육의 모습이 나왔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버려도 자신은 절대 그리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지만 그 다짐이 무너졌습니다. 이때는 성령 받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후에는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을 선택하는 모습으로 변화되었지요.
우리의 다짐도 충만하고 행복할 때만 유효하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연단과 시험 중에도 믿음과 신뢰, 선과 사랑으로 함께하는 것이 진실이요 참입니다. 그러기 위해 항상 불같은 기도로 성령의 충만함을 힘입어야 합니다. 더욱이 어둠과의 싸움에서는 사람의 지혜나 방법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 지혜도 주시고 형통케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목도하기 전, 성령 받기 전 제자들은 부족한 것도 있고 육의 모습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승천을 목도하고 성령을 받은 후에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히 주님의 이름을 전했습니다(행 5:40~42). 이는 사도들만이 아니라 초대교회 성도들도 그러했지요. 모든 성도님들도 새 예루살렘의 영광과 상급을 소망함으로 현재 당하는 축복의 연단을 믿음과 선, 충성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18-05-14 오후 10:05:02 Posted
2018-07-03 오전 10:22:50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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