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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순전(1)  [마 12:19-21]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18.07.08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들이 흠이 없고 순전하여 세상에서 빛이 될 뿐 아니라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참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시간 증거하는 ‘순전’이란 말씀을 통해 자신을 점검하며 발견되는 부족함을 신속히 변화시켜 새 예루살렘을 향해 더욱 힘차게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순전의 사전적인 의미는 ‘순수하고 완전함’을 말하며 ‘순전한 사람’이란 일반적으로 ‘덕행이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욥에 대해 순전하고 정직한 자라 말씀하십니다(욥 1:1). 욥은 중심의 악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행위적으로 범죄하지 않았고,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많은 덕행을 쌓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전함은 마음의 악을 벗어 버려 흠도 티도 없이 깨끗한 마음 안에 영의 열매가 가득 담겨 있는 순수함과 완전함을 모두 갖춘 모습입니다.
성경 인물로는 엘리야, 에녹, 아브라함, 모세와 같은 분들이 순수함과 완전함을 두루 갖춘 분들이지요. 그 누구보다도 순전하신 분은 우리 주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본문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어느 누구와도 다투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역하시는 동안 누구와도 걸리거나 다툼이 없었으며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화평 속에 이루셨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하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며 소외당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소망을 갖게 해 주셨지요. 이렇게 선한 일만 하셨는데도 예수님을 배척하며 죽이려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기득권자였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율법학자, 바리새인들은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하신 말씀대로 참 빛 되신 예수님으로 인해 자기의 악함이 드러나는 것을 견디지 못했습니다(요 3:20). 이들은 올무를 잡고자 여러 가지 말로 예수님을 시험하기도 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의도를 아시면서도 미워하거나 불편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참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선하고 지혜로운 말씀으로 일러 주실 뿐이었지요. 그래도 깨우치지 못할 때는 변론하거나 다투지 않으시고 조용히 물러나셨습니다.
때가 되어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해 잡히신 후,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실 때에도 어떤 변론이나 항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애매히 고난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해 아무와도 다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혹여 여러분은 상대가 어떤 해를 가한 것도 아니고 애매히 곤경에 처하게 한 것도 아닌데 내 마음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불편해하지는 않습니까? 상대와 부딪치고 좋지 않은 감정이 일어나며 변론하거나 다투는 분은 안 계신지요? 어느 정도 참아 보다가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 생각될 때 ‘이 사람만은, 이 일만은 도저히 참을 수 없다’ 하거나 ‘내가 부딪쳐서라도 상대의 옳지 않음을 깨우쳐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신 적은 없으신지요?
상대가 깨우치고 돌이킨다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을 때 결과는 어떻습니까? 화평이 깨어지고 감정이 쌓이고 서로 좋지 않은 사이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도 악으로 나오는 상대가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다면 깨우쳐 주지만 변론밖에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피하셨습니다.
그런데 혈기를 내고 언성을 높이는 것만이 다툼이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으나 마음속으로 내 틀에 맞지 않은 상대를 못마땅해하고 내 의를 주장한다면 아직 다툼이 있는 것입니다. 의견이 다른 상대와 다투거나 변론하지 않지만 그에 대한 불편함을 주변에 말하는 것도 다툼의 속성이 있는 것이지요. 자신과의 화평이 이미 깨진 것이며 결국 모든 사람과 화평을 좇지 못한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에게 아직 마음에 불편함, 자기 의가 있다면 그 다툼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함으로 내 안의 악을 뽑아내 버려야 하지요. 화평이 깨진 것은 상대가 나를 힘들게 해서, 또는 내 마음에 맞지 않게 행동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상대를 품지 못하는 작은 그릇이고, 부딪치면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강한 틀이 있기 때문이지요. 포근한 솜에 무엇이 부딪친들 소리가 나겠습니까? 그릇에 맑고 깨끗한 물이 있다면 아무리 흔든다 해도 물은 여전히 맑고 깨끗한 것을 볼 수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연단을 통해 여러분 안에 있던 악을 발견하게 하십니다. 평안할 때는 올라오지 않았던 악이 올라오기도 하지요. 이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며 매사에 작은 비진리도 용납하지 않고 버려 나간다면 예수님처럼 순전함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해하지 못하고, 품지 못할 사람도 없으며 포근하고 따뜻하게 감싸 줄 수 있지요. 마음에 항상 평화가 있으니 무엇보다 여러분 자신이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사랑하셔서 애매히 어려움을 당할 때 역사해 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이기기 위해 다투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여러분 편이 되어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뤄 주십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들레지 아니하셨습니다

들렘은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자신을 알아주기 원하고 대접받기 원하는 마음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큰 권능을 베풀면서도 들레지 않고 겸손히 행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말씀하신 대로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셨지요(요 17:4). 예수님은 오직 하나님을 나타내어 인생들이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이르게 하기 위해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신 이유는 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심을 사람들이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한 사람들은 권세 있는 말씀과 따르는 표적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 되심을 믿었지만, 마음이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악으로 인해 깨닫지 못했고 오히려 예수님이 하나님을 욕되게 한다며 비방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비방과 핍박을 개의치 않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온전한 구세주가 되시기 위해 십자가 고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로서 태초에 천지창조 역사도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이루신 예수님께서 한낱 피조물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감사함으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가 없는 모습이지요.
이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사람들이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2) 하며 비아냥거렸지만, 들레고자 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으셨기에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순전하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는 높이시고 인정해 주십니다. 빌립보서 2장 9~11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신 대로 원수 마귀, 사단, 더러운 귀신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면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 뜻에 따라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큰 영광을 받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이룰 때에 예수님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좇아 순종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누군가 알아주기를 원하고,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또는 자신이 기대한 만큼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에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면 그로 인해 힘들어하고 서운해하기도 하지요.
누가복음 14장 11절에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8절에는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스스로 높아지려 하거나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겸손함으로 자신을 낮추는 자가 되어 하나님께 인정받고 칭찬받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초신자 때는 작은 것을 응답받아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온전히 하나님께 돌리지요. 그런데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서 큰 사명을 감당할수록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얻으려는 마음이 드러나는 경우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초신자 때는 자신의 믿음이 부족한 것을 알기에 어떤 응답이 왔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믿음이 성장하면 하나님의 은혜라 했던 마음이 희석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편 마음에서는 ‘나도 믿음과 순종으로 힘써 일하였기에 이만큼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었다’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지요. 일꾼 되신 성도님들은 혹여 이런 마음이 자신에게 있지 않은지 살펴봐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크고 놀라운 권능의 역사로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렸지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하며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했으며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렸습니다. 여러분도 순전한 마음으로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심으로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의 영광을 구해 주시며 높여 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순전하신 예수님의 모습, 곧 다투지도 아니하시고 들레지도 아니하신 예수님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극한 선과 겸손함, 그리고 영적인 사랑으로 가득한 내면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항상 진리의 말씀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생각하면서 말과 행동에 주의하는 노력이 쌓이면 예수님의 순전하심을 닮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신랑 되신 주님으로부터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라고 칭찬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8-07-09 오후 10:15:11 Posted
2018-07-19 오후 11:31:15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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