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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용서하는 마음  [겔 18:21-24]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0.02.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 의학적 통계에 의하면 질병은 많은 부분이 스트레스로 인해서 온다고 합니다.
이 스트레스 중 대부분은 정신적 질병 곧, 미움과 증오 그리고 용서하지 않는 마음에서 생긴다고 하지요.
결국 미움과 증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 암, 고혈압, 심장병, 뇌졸중, 치매, 우울증 등의 원인이 된다고 의학적으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정신과나 심리 치료에 ‘용서 치료’ 프로그램을 활용하기도 하는데, 이 치료를 받은 환자들은 분노, 우울증, 근심이 줄어들고 자존감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또한 스트레스를 완화시키고 혈압과 심박동을 안정시킨다는 실험 결과도 있지요. 이렇게 용서는 마음의 평안과 함께 건강도 가져다줍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이런 체험을 해보셨을 텐데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했을 때,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흐뭇했는지 행해 본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도 이런 평안과 쉼을 가져 보시길 바랍니다.
미움과 짜증, 원망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내려놓고, 용서와 사랑의 마음을 느껴 보고 또 가져 보십시오.
그러할 때 그저 알고만 있었던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 마음 깊이 용서와 긍휼, 참된 사랑으로 임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를 받았으니 용서하지 못할 일이 없어야 하지요.
오늘 말씀을 통해 원수 맺거나 미워하며 용서하지 못한 일을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는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문제도 질병도 다 해결받을 수 있지요.
이 시간이 응답과 치료의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만약 평상시 여러분을 괴롭히거나 힘들게 하고 피해를 입힌 사람이 큰 어려움을 당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 드시나요?
세상 사람 중에는 손뼉을 치며 좋아하거나 ‘잘됐다!’ ‘속 시원하다!’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한 사람들은 ‘죄를 지은 것도 불쌍한데 어려움까지 당하니 안 됐다’고 생각하지요.
마음에 선과 진리가 가득할수록 자신을 힘들게 하고 해를 끼치는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마음이 전혀 기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 아파하며 어떻게든 돕고 싶어 하지요.

다윗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미워하여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 있던 사울왕을 죽일 기회가 왔는데도 결코 해를 끼치지 않지요. 더 나아가 “아버지여” 부르며 선한 고백을 합니다.
하지만 악한 사울은 잠시 감동을 입어 다윗에게 미안해하다가 이내 그 마음이 변하여 아무 잘못 없는 다윗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지요. 자신의 시기, 질투로 다윗을 오해하고 미워한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 악을 행하던 사울왕은 결국 전장에서 죽게 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금식하며 애곡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나를 힘들게 하고 이유 없이 악을 행한 사람이라도 상대가 해를 당할 때 마음 아파하였던 것이지요.
이렇게 사람의 마음에 선과 악의 차이가 상대를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기도 하며 미워하거나 원한을 갖고 저주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자녀들이라면 용서의 마음을 이루어야 합니다.
더욱이 용서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우리 자신도 용서받고 응답받는 축복의 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용서가 하나님의 마음이라 말씀드리니 혹여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멸하는 장면을 떠올리며 하나님을 오해하는 분이 계십니까?
이는 각 사건에 담긴 영적인 뜻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 내용을 정확히 알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먼저 창세기 18, 19장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죄악이 극에 달한 도시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바로 멸하지 않고 그들을 살릴 수 있는 작은 근거라도 찾고자 하셨지요. 이에 직접 천사들을 보내어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죄악이 심히 중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살펴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이 일을 미리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마음을 닮았던 아브라함은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으면 용서해 주실 수 있을지 조심스럽게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내가 만일 소돔 성중에서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에 힘을 얻어 간청을 드립니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 오십 의인 중에 오인이 부족할 것이면 그 오인 부족함을 인하여 온 성을 멸하시리이까” 하며 다시 여쭈었습니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용서하겠다고 말씀하시지요.
아브라함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40인, 30인, 20인, 10인의 의인을 찾으면 어떻게 하실지 여쭙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를 약속하셨습니다. 이미 그 땅엔 롯을 제외하고는 의인이 없음을 잘 알고 계심에도 아브라함의 청을 물리치신 것이 아니라 끝까지 들으시며 어찌하든 기회를 주길 바라셨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돔성에는 의인 열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악함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살피도록 보내신 천사들은 소돔땅에 거하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었지요.
이에 소돔, 고모라 사람들은 롯의 집에 몰려가 “너희 집에 온 사람들을 내놓으라”며 그 여인을 자신들이 취하겠다 합니다.
그러자 롯은 자신의 두 딸을 내어줄 테니, 그들에게 아무 짓도 하지 말라고 간청합니다.
하지만 심히도 악한 그들은 도리어 롯을 해하려 하며 대문까지 부수려 했습니다.
처음 보는 여인을 탐하고자 하는 이 사건만으로도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악이 어떠한지를 잘 알 수 있지요.
그들은 죄에서 돌이킬 수 없는 한계에 달했기에 아무리 사랑의 하나님이실지라도 공의에 의해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보고 롯과 그 가족을 구원하고자 하셨지만, 롯의 사위들은 하나님께서 성을 멸할 것이라는 롯의 말을 믿지 않다가 결국 그 땅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롯의 아내는 함께 탈출했지만, 뒤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소돔에 미련이 남아 뒤돌아봄으로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지요.
이렇게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한 번 두 번 잘못하니 곧바로 심판하고 멸하시는 것이 아니라, 또 살피고 깨우쳐 주시며 어찌하든 기회를 주고자 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심히 악하여 멸망을 자초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하지요.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의 권면을 듣지 않고 악에 악을 쌓아 간다면 당장 심판을 당하지 않는다 해도 결국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그 땅에 살고 있던 아모리 족속을 진멸하게 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당시에도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아모리 족속의 죄악에 대해서 알고 계셨습니다. 또 그들이 이후로 더욱 악해질 것도 아셨지만, 400년간 참고 기다리며 그들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창 15:13-16)
즉, 아브라함 당시에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하지 않았기에, 그 땅을 허락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래 참으시며 기회를 주셨지만 아모리 족속은 돌이키지 않았고 악을 더 쌓아감으로 결국 죄악이 가득 찼을 때,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더 이상 죄에서 돌이킬 가능성이 없는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그들을 진멸케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여리고성에 살았던 라합과 그 친족은 구원해 주셨지요.
라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놀라운 일들에 대해 듣고 하나님을 믿고 경외함으로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 주는 선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고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의로운 사람은 멸하지 않음은 물론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또 아모리 족속을 진멸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들을 남겨두면 이스라엘 자손들마저 우상을 섬기고 각종 사술을 행하며 음란하고 패역하고 부도덕한 악행에 물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도 사람들에게 심히 악을 행하며 사기치고 괴롭히는 사람을 용서만 하고, 어떤 제재도 가하지 않는다면 사회가 얼마나 혼란스럽겠는지요? 죄를 지어도 잘못인지 모르고 그저 자기의 유익에 따라 속이고 때리고 빼앗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런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인간 경작에서나 내세에서 공의를 세워 운영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런 섬세하신 사랑과 긍휼을 깨닫고 ‘무서운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으로 오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에스겔 18장 21-22절에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하신 대로 악인이 돌이키면 용서하심은 물론 그 죄를 기억지도 않는 분이시지요.
이런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사랑의 하나님의 용서와 복을 받은 경우를 요나 선지자 시대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당시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적국 앗수르의 수도였습니다. 이 니느웨도 심히 부패하여 그들의 악행이 하나님 앞에 상달될 정도였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곧바로 멸하지 않고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해 요나 선지자를 보내 경고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 선지자는 의외의 태도를 보입니다. 니느웨로 가라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다시스로 향했지요.
그는 자기 민족을 괴롭히는 적국인 니느웨가 멸망당하길 원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가서 경고할 때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줄 알았기에 니느웨로 가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이에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해 다시스행 배에 올라 배 밑창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배는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고 벗어나려고 최선을 다해보았지만 파선할 위기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이 재앙이 누구 때문인지 알기 위해 제비를 뽑았을 때, 영락없이 요나가 뽑혔고 요나를 바다에 던지니 바다는 이내 잠잠해졌습니다. 이제 요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용서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불순종한 요나마저도 그냥 멸해버리지 않고 한 번 더 기회를 주십니다. 요나가 자신의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행했다는 것을 알기에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지요.
큰 물고기를 예비해 두셨다가 그를 삼키게 하셨고, 요나는 그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지내며 불순종한 것을 철저히 회개합니다.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시고 물고기가 그를 육지에다 토해내도록 하셨고, 결국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외쳤습니다.
니느웨는 규모가 큰 성읍이라 그 전체를 돌려면 삼 일이 걸리지만, 하루만 외쳤는데도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였고, 그 소문이 왕에게까지 들리자 왕도 마찬가지로 회개하며 조서를 내려 선포합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떼나 양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시고 그 진노를 그치사 우리로 멸망치 않게 하시리라 그렇지 않을 줄을 누가 알겠느냐”(욘 3:7-9) 하였지요.
입술로만이 아니라 행함으로 온전히 돌이키는 철저한 회개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니느웨는 이방인들이기에 ‘혹시’란 말을 사용했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혹시’ 하는 의심을 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돌이키면 반드시 용서해 주십니다. 에스겔 33장 14-16절에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죽으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돌이켜 자기의 죄에서 떠나서 법과 의대로 행하여 전당물을 도로 주며 억탈물을 돌려보내고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아니하면 그가 정녕 살고 죽지 않을지라 그의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정녕 살리라 이는 법과 의를 행하였음이니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회개할 뿐 아니라 ‘다시는’ 죄악을 짓지 않고 계명대로 지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38년 된 병자나 간음한 여인을 용서해 주시고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당부하셨지요. 또한 베드로후서 2장 20절에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22절에 죄를 짓고 회개한다 해 놓고 돌아서서 또 죄를 짓고 다시 회개하고 하는 모습을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비유 들어 설명하시며 이런 사람은 용서받지 못함을 말씀하시지요.
그러나 회개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않으면 용서받음은 물론 전에 범한 모든 죄도 기억지 않겠다 하십니다. 니느웨 백성들 역시 철저히 회개하니, 하나님께서 뜻을 돌이키시고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요나는 이를 기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화를 내고 불평합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욘 4:3) 하며 속상해했지요.
그러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에서 나가 초막을 하나 짓고 그 그늘에 앉아 이제 성읍이 어떻게 되나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요나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해 박 넝쿨을 자라게 하여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시니 요나는 몹시 기뻤지요.
니느웨가 있는 중동지방은 태양이 매우 강렬한 반면 습도가 적어 그늘 아래 있으면 더위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하나님께서 벌레를 보내 박 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니 이내 시들어 버렸습니다.
아침이 되어 햇볕이 강하게 내리 쬐는 데다가 뜨거운 동풍까지 부니, 요나는 너무 더워 정신이 몽롱하여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지요.
그때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하며 하나님께 대들기까지 합니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이런 요나의 대답에 진노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으로 그를 깨우쳐주십니다.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 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욘 4:10-11)
이렇게 니느웨 백성은 악독하였지만, 자비하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악인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들이 돌이켜 용서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툭 하면 성을 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요나에게 비유까지 들어가며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용서의 마음을 느껴볼 수 있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저런 악한 사람은 잘되나? 하나님께서는 왜 저런 사람들에게 벌을 내리시지 않을까?”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자신이 악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선에 비추어 악인을 멸해 버리신다면 구원받은 성도라 하더라도 살아남을 사람이 거의 없지요.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기에”(딤전 2:4) 오래 참고 기다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인내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중심에서 회개하며 돌이킬 때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하심과 같이 기뻐하십니다.

또 철저히 회개하여 돌이키면 전에 지었던 죄나 잘못을 기억지도 않으심을 사도 바울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원래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몹시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각 집에 들어가 예수님을 믿는 남녀를 끌어내어 옥에 가두고 교회를 완전히 진멸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이처럼 위협과 살기가 등등했던 그를 깨뜨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대사도로 만드셨습니다. 또한 철저히 깨닫고 돌이킨 그의 죄를 이후 다시 묻지 않으셨지요.
사람들은 상대의 허물을 두고두고 기억하며 말하기도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고”(시 103:12)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무조건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 즉 회개하고 돌이킨 자에게 그렇게 하신다는 말씀이지요.

이렇게 용서하시고 복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 계신데 아직도 세상 어두움을 짝하며 죄의 짐에 고통받는 분이 계십니까? 이제 용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께 철저히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돌이켜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때 용서받고 구원받은 참 평안과 기쁨이 임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도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정죄하던 사람들을 물리치시고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 하시며 참된 평안을 주셨지요.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는 것이지 죄에서 돌이킬 때에는 악인을 악인이라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죄를 없게 해 주시며 의인이라 칭해주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회개하는 심령을 찾으시며 그가 통회자복하면 과거의 모든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하시지요.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큰 용서와 사랑을 받은 우리가 아직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며 원망하고 원수를 맺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용서에 감사하는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더더욱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화목을 이룰 때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23-24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 드리기로 한 예물은 반드시 드리되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 용서하지 못한 마음을 돌이켜 화목을 이루고 예물을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축복하신다는 것입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나는 남을 용서하지 못하면서, 나 자신의 죄와 허물을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습니다.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감정을 품고 화를 낸다면 하나님께서도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마태복음 18장에 두 채무자를 통해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 빚을 졌습니다.
이 액수는 평생을 벌어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큰돈인데, 주인이 불쌍히 여겨 그 빚을 탕감해 주었지요.
탕감받은 후, 그는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을 만났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니 백 데나리온이라 해도 일만 달란트에 비교할 수도 없는 작은 액수이지요.
그런데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은 자신이 입은 은혜도 잊어버린 채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윽박질렀습니다. 그 동관이 엎드려 꼭 갚을 테니 조금만 참아달라고 간청했지만, 용서하지 않고 옥에 가두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알게 된 주인은 그를 불러 “이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며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옥졸에게 넘겼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나는 어떠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기까지 큰 사랑을 베풀고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말로 할 수 없는 큰 용서를 받은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상대의 죄와 잘못이 무엇이 있겠는지요?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과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늘 기억하여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화목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행복,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는 마음을 느껴 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사랑하십니다. 죄를 미워하실 수밖에 없음은 그 죄로 인해 우리가 사망으로 가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악인이라 할지라도 죄에서 돌이켜 진리 가운데 행하기만 하면 용서하심은 물론 복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고 끝까지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용서의 마음을 우리도 이루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1-22) 하시며, ‘완전한 용서’를 말씀하셨지요.
몇 번 용서하고 ‘더 이상은 용서하지 못하겠다’ 하거나 ‘저 사람은 도무지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 없다’ 해서는 안 됩니다. 용서한다 하고는 상대의 잘못을 기억하고 있어서 스스로 고통받는 어리석음도 없어야 합니다.
이렇게 부부간에, 부모 자녀 간에, 형제, 이웃, 친구 사이에 온전히 용서하였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나는 하나님과 또 하나님께서 세우신 주의 종과 화목하고 있는지도 돌아보아 왜 응답받지 못하였는지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용서하지 못함으로 비롯된 미움, 시기, 질투, 판단, 정죄 등 여러 가지 악의 모양을 버리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룰 뿐만 아니라 모두와 화목한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치료하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응답과 복이 이 시간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2020-03-03 오후 8:04:03 Posted
2020-03-09 오후 3:42:11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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