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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 창립 38주년 기념예배 [고전 15:10]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0.10.11
오늘은 우리 교회가 창립 38주년을 맞기까지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내가 했다’는 생각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어떤 일을 해내면 우쭐해지기 마련입니다. ‘아, 내가 이렇게 잘할 수 있구나’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교만해지기도 하지요. 하지만 저는 추호도 그런 마음을 품을 수 없었습니다.
권능의 기도로 강력한 허리케인이나 홍수 또는 가뭄, 전염병을 물리쳐 수십, 수백, 수천만 명에게 주님의 크신 은혜를 입혀 주기도 했지만 저의 마음은 감히 높아질 수 없었지요. 먹기보다 금식을 더 많이 하고, 자기보다 철야 기도를 더 많이 하며 하나님의 깊고 비밀한 말씀들을 풀이받아 전했지만 교만해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해 주지 않으시면 저는 아무것도 아님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 저는 두 눈만 성할 뿐 온몸이 병들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인생이었습니다. 가장의 역할은 고사하고 사람 노릇도 할 수 없어서 멸시 천대를 받는 비참한 사람이었지요. 이런 저를 하나님께서는 먼저 찾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 단번에 모든 병을 치료해 주셨지요. 또한 주님의 종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1978년 5월 어느 날 기도 중에 “만세 전에 택정한 내 종아, 내가 너를 들어 쓰겠고, 네가 산을 건너고 강을 건너며 바다를 건너가는 곳마다 내가 함께하며 기사와 표적으로 내가 살아 있음을 만방에 알리는 내 종이 되리라”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현실을 보면 순종하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치료는 받았지만 7년간의 병고로 얻은 산더미 같은 부채를 짊어지고, 단칸방에서 세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가장일 뿐이었습니다. 나이도 많고 기억력이 없어서 신학을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성격도 심히 내성적이어서 많은 사람 앞에 설 수 없을 것 같았지요. 그때 저에게 있는 것은 그저 모든 질병을 깨끗하게 치료받은 체험과, 주님의 보혈로 죄 씻음 받고 얻은 영적인 생명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제 마음과 형편을 잘 아신 하나님께서는 뒤이어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만세 전에 택하였고 모태 적부터 너를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 이 시간까지 친히 인도하였노라. 네가 하는 이 가게는 아내에게 맡기고 너는 이제 내 종의 길을 가라. 그러면 너희 둘이 버는 수입보다 더 나을 것이니라. 돈 궤에 돈이 떨어지지 아니하고, 쌀독에 쌀이 떨어지지 아니하고 넘칠 것이며 너희는 구제하며 살리라. 너를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놓은 것도 하나님이요, 지금까지 인도한 이도 하나님이니 앞으로도 인도할 것이니라. 내가 너를 가장 낮은 자리로 인도한 이유를 이제 알리라. 내 능력으로 너를 가장 높은 자리에 올리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대로 아무것도 아닌 저를 도구로 세우셔서 산과 바다와 강을 넘어 세계 곳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로써 무수한 영혼들이 헛된 우상과 흉악의 결박에서 놓임 받고 불치, 난치의 병을 치료받았습니다. 또 성결의 복음과 권능이 방송 전파를 타고 전 세계를 누비며 구원받는 수를 더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의 권능의 기도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마지막 때의 징조대로 각종 재앙 속에 신음하는 세계 곳곳에 재창조의 역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께만 영광 돌릴 때, 주님께서는 더 크게 영광을 돌리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둘째, ‘내 것’이라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지요.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베드로)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고전 9:4~7) 즉 주님의 사도로서 충성한 대가를 취할 권리가 있지만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12절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했습니다. 혹여라도 영혼들이 ‘바울은 물질을 탐한다. 주의 일보다 사적인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이렇게 오해하여 복음을 배척하는 일이 없도록 많은 권리를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러한 바울의 마음이 너무도 이해가 됩니다. 저에게 주어진 시간과 물질도 제 것이라 생각하여 임의로 써 본 적이 없습니다. 아내와 자녀들도, 나의 생명, 나의 마음도 다 하나님의 것이요, 주님의 것이라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왔지요. 그러니 이 모든 것을 어찌 조금이라도 허투루 쓸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의 시간과 물질을 어떻게 저의 사사로운 유익을 위해 쓸 수 있었겠는지요?
시간만 나면 기도하고 금식하며 충성했습니다. 또 시간만 있으면 성도님들을 만나 믿음을 심어 드리고 기도해 드렸지요. 교회를 오가는 잠시 동안도 쉬는 것이 아니라 성도님들의 손을 힘껏 잡아 드렸습니다. 수천 명의 손을 잡음으로써 손이 찢기고 패여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조금의 쉼이 주어져도 심지어 제 생일에도 ‘어찌하면 그 시간이 하나님의 나라와 성도들에게 유익이 될까’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내곤 했지요.
이에 많은 성도들이 암 같은 불치병, 난치병과 각종 연약함을 치료받아 주님께 영광 돌리는 소리가 교회에 끊이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루하루를 사는 이유는 저 개인의 삶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물론 ‘내 것’을 포기할 때 억지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가장 행복하기에 기꺼이 포기한 것이지요.
요한복음 4장 34절에 예수님께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때 참 만족과 행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의 주의 종, 일꾼들과 성도님들 또한 끊임없이 이런 믿음을 키워 오셨기에 오직 선교하고 구제하며 세계를 이루는 만민이 될 수 있었습니다.


셋째, 마음에 오직 ‘주께서 피로 사신 영혼들’만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장 1절을 보면 성령의 감동 속에 신약 성경의 많은 부분을 기록한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했지요.
저 또한 모든 질병을 치료받고 죽음 앞에서 영생을 맛본 뒤로 오직 위엣 것을 찾아왔습니다. 병들어 괴롭고 외로웠던 저를 찾아와 살려 주시고 구원해 주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지요. 그러자 불쌍한 많은 영혼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부유한 장로가 되어 예전의 나처럼 병들었거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어야겠다’는 꿈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는 너의 부모보다, 자녀보다, 너의 아내보다 나를 사랑하되 첫째로 사랑했느니라. 나만을 사랑했느니라. 그러므로 이후에 나는 누르고 흔들어 백배로 너에게 갚아 주리라.” 말씀하시며 영혼을 구원하는 주의 종으로 부르셨습니다.
신기하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영혼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인생들, 예수님께서 구원하시려고 대신 피 흘려 주신 무수한 영혼들을 향한 사랑이 불타올랐지요. 하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을 꼭 닮은 자녀들,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 자녀들을 얻고자 독생자를 내어주신 마음이 너무나 생생하게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무수한 영혼들을 천국은 물론 하나님과 주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까지 인도하기 위해 저의 모든 삶을 바쳤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5절에 사도 바울이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고백한 대로 영혼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을 내어주어도 아깝지가 않았습니다. 아무리 많은 수고를 해도, 모진 고난을 당해도, 영혼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당했습니다.
오늘의 만민이 있기까지는 역경도 많았습니다. 오직 영혼 구원을 위해 생명 다해 헌신해 왔음에도 교회가 부흥하자 이를 시기 질투한 이들이 교회를 무너뜨리고자 할 때도 있었지요. 이러한 때도 저를 눈물짓게 하는 것은 저를 향한 세상의 오해가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약하여 진리에서 떠나는 영혼들을 보는 것, 자기 악과 자기 유익에 영적인 눈이 가려서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는 이들을 지켜보는 일이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양 떼들이 죄악을 벗어 버릴 수 있도록, 축복받고 응답받을 수 있도록 목자로서 대신 중보하는 동안 목숨이 끊어질 상황을 수차례 넘겼지만 이때에도 제게 가장 큰 고통은 육신의 고통이 아니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다 내어주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는데도 여전히 죄 가운데 거하는 영혼들을 위해 더 이상 무엇을 내어줄 수 있을까?’ 이러한 막막함이 가장 큰 슬픔으로 다가왔습니다. 물론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공의로우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저를 전 세계의 많은 지·협력 교회를 비롯하여 무수한 성도들의 목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사람의 마음까지 변화시키는 재창조의 권능까지 허락해 주셨지요.
이에 이사야 60장 4절에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원방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워 올 것이라” 말씀하신 대로 날이 갈수록 더 큰 무리의 영혼들이 이 제단의 품으로 안기어 오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저와 함께 오직 영혼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사시는 많은 주의 종들과 일꾼들, 성도님들이 계시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에 영혼 구원에 대한 열망을 가득히 채워 주신 아버지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주의 영광을 위해,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며 헌신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께 마음껏 영광 돌리고 장차 영광스러운 천국 새 예루살렘에 함께 이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020-10-14 오후 9:09:20 Posted
2020-10-25 오전 11:50:28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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