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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3)  [계시록 1:4-8]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1.08.20
본문에 하나님의 ‘보좌’가 나오는데, 여러분이 이 보좌를 단순히 ‘의자’ 정도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보좌의 모습은 참으로 대단한 장관이지요.

왕상 22:19에 보면,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서 있다’ 했습니다. 천사장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천군과 천사와 그룹 등 천상의 여러 존재들이 하나님의 보좌 좌우편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지요.

또한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서 이십사 장로들의 보좌가 있으며, 보좌 앞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습니다.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는 네 생물이 자리하여 그 대단한 위용을 과시하고 있구요.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도 더한 장관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엄청난 빛들과 그 보좌를 두르고 있는 무지개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이루 형용할 수 없는 형형색색의 영롱한 빛들이 나오고 보좌 주변으로는 무지개빛 광채가 가득하지요. 사도 요한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보좌를 환상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을 보았는데, 이 일곱 영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대략적인 개념을 설명드렸지요. 일곱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영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살핀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속성들 중에 대표적인 일곱 가지 측면에서 각 사람의 신앙의 전반적인 것을 측정하여 응답과 축복과 문제 해결의 여부를 결정하지요. 그래서 일곱 영은 마치 응답의 저울과 같다 했으며 이 일곱 영이 각 사람의 신앙을 살펴서 하나님의 정하신 기준에 비추어 합당할 때 바로 응답이 주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일곱 영이 측정하는 분야는 믿음, 기쁨, 기도, 감사, 계명을 지키는가, 충성, 사랑인데 이 각각에 대해서는 요한계시록 5장에 가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5-6절에 보면,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했습니다.

여기서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의미하지요.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복종하며 철저히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 내신 분입니다. 충성의 본을 보이신 증인이시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주님의 모습에 비추어서 ‘과연 여러분은 얼마나 충성된 증인으로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는지’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얼마나 귀하게 여겼으며,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얼마나 잘 지켰는지, 또 얼마나 사명 감당하기 위해 충성했는지 이러한 것들을 점검해 보시라는 말이지요.

아버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목숨을 드리면서까지 하나님 앞에 충성하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 앞에 충성하기 위해 죽기까지 순종하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지요. 그리고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어떻게 해 주셨을까요?

빌 2:9-11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했지요.

본문에서도 주님에 대해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임금은 백성들의 대표이며 머리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다는 것은 곧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신 것을 뜻하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처럼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면서도 결코 섬김 받으려 하시거나 들레지 않으셨습니다. 정말 참된 임금이라고 하면 자신이 섬김 받으려 하거나 권세를 휘두르기보다는 어찌하든 백성들을 위하는 길을 찾지요.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백성들에게 평화와 행복을 주기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임금의 모습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오직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고, 대신 우리에게는 은혜와 평강을 주셨습니다.

마 11:28-30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했지요.

마음 안에 미움이 있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교만이 있기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이며, 죄악의 짐이 있기 때문에 마음의 평안과 쉼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지고 가던 이 무거운 죄악의 짐들을 예수님께서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들에게는 참된 평안의 길이 열리게 되었지요.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알았으니 이제 ‘나’를 버리고 자기 안에 있던 더럽고 추한 죄악들을 하나하나 벗어서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죄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열리게 되었지요.

본문에는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했습니다. 먼저 ‘우리를 나라로 삼았다’는 것은 성령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죄 사함을 받고 나면 성령을 선물로 받지요. 그러면 우리의 몸은 거룩한 하나님의 성령께서 친히 거하시는 성전이 됩니다. 그리고 성령을 모시고 있는 우리의 마음 안에는 곧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지요.

눅 17:20-21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또한 이렇게 마음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 거룩한 지체들이 모이는 교회 역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되는 것이구요.

다음으로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했는데, 혹시 ‘제사장이라고 하면 오늘날의 주의 종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실 수가 있지만 여러분 모두도 제사장이 될 수가 있습니다.

벧전 2:9에 보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지요.

즉, 하나님의 자녀 된 여러분은 택하신 족속도 되고, 왕 같은 제사장도 되며 성령께서 거하고 계신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의 소유가 된 천국 백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여러분 모두도 제사장이 될 수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오직 제사장만이 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성소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성소 밖의 뜰에서 제사를 지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성소의 휘장이 저절로 갈라지며 둘로 나뉘어집니다.

막 15:38에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했지요. 그리고 이때부터는 일반 양 떼들도 성소, 곧 오늘날로 말하자면 교회 성전 안에 들어와 이처럼 함께 예배드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각자의 마음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하나님과 직접 교통을 이루는 제사장과 같이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오늘날 꼭 주의 종만이 제사장이 아니라, 성령 받은 모든 성도들도 영적으로 제사장이 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데에는 또 다른 의미도 있지요. 바로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이 각각의 그릇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쓰임 받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주님의 몸 된 제단에서 모두가 각각의 지체로써 쓰임 받게 되지요. 제사장의 직분으로 쓰이는 사람도 있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직분과 사명을 맡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합당하게 쓰이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기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들을 구원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아 주시고 일꾼이요, 사명자로서 쓰임 받도록 축복해 주신 주님께 영원토록 영광과 능력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사도 요한이 원한다고 해서 주님께 영광과 능력이 영원토록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는 당연히 있으신 것이지만 사도 요한은 “원하노라”라는 이 고백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그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으며 기뻐하고 있는지를 표현한 것이지요.

7절에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했습니다.

주님께서 장차 우리를 데리러 오실 때는 구름을 타고 오시는데, 이 구름은 그냥 보통구름이 아니지요. 아름답고 광채 나는 영광의 구름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때를 보면 행 1:9에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했는데,

이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천사가 말하기를 11절에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하지요. 구름 사이로 올리워 가신 주님께서 장차 오실 때도 구름과 함께 오실 텐데 이를 두고 본문에도 ‘구름을 타고 오신다’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살전 4:16-17에 보면 그때는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천지가 진동하며 주님이 하늘로부터 좇아 강림하시게 되지요.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살아서 주님을 영접하는 자들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져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된다 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승천도 또한 공중 강림도 구름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구름이 곧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와 같은 역할을 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강림하실 때를 보면 꼭 구름이 함께 등장하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도 바로 이 구름을 타고 오시게 되는데,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다’ 말씀합니다.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주님의 재림을 보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렇다하여 재림하시는 주님을 모두가 다 직접 눈으로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누구나 주님께서 재림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 성경에는 주님이 도적같이 오신다 했는데 어떻게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렇게 생각하실 분이 계십니까? 물론 성경은 주님께서 도적같이 오신다 했습니다. 벧후 3:10 전반절에도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말씀하고 있지요.

그러나 이처럼 도적같이 오신다는 것은 주님 맞을 준비를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즉, 기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 신부단장 하지 못한 그러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예상치 못한 때에 갑자기 도적같이 임하신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계 3:3에 보면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하여 회개하지 않고 깨어 있지 않을 때 주님께서 도적같이 이른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살전 5:4-6에는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하여, 깨어 신부단장 하며 주님 맞을 준비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못한다 말씀했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해 너무나 초라하게 오셨지만, 장차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데리러 오시므로 너무나 웅장하고 권세 있게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때는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했는데, 여기서 그를 찌른 자들이란, 꼭 예수님 당시에 정말로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장본인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요. 바로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사람들, 즉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고 하나님을 욕하고 대적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전부 예수님을 찌른 자들이 됩니다.

또한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란 이처럼 주님을 믿지 않고 대적한 사람들뿐 아니라,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말씀 가운데 살지 않았고 알곡이 아닌 쭉정이와 같은 사람들 바로 이러한 사람들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며 그들이 그날에 애곡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주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은 ‘내가 그때 왜 전도해도 듣지 않았나.’ ‘내가 왜 그처럼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던고.’ 그러면서 땅을 치며 애곡하게 되고,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못했던 사람들은 ‘내가 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똑같이 그처럼 죄만 짓고 살았는고, 내가 제대로 믿을 걸...’ 하며 애통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애통은 그 순간만이 아니라 7년 환난 동안에도, 이후에 백보좌 심판이 끝나고 지옥불에 던져져서도 영원히 계속되지요. 여러분 중에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결코 한 사람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8절에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하시면, 이것을 ‘하나님은 모든 것의 시작이시고 또한 끝도 되신다’는 뜻 정도로 생각하지요.
계 21:6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하신 말씀이나, 계 22:13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하신 말씀도 모두 비슷한 의미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두가 비슷한 뜻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왜 굳이 이렇게 반복해서 기록하도록 하셨겠습니까?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라는 이 각각의 말씀에는 다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처음도 없고 나중도 없으신 분이시지요. 사람들이 육의 한계 가운데 생각하는 그런 시작과 끝이 있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영원 전부터 계셨으며, 영원 후까지 계신 분이지요. 그런 하나님께서 굳이 자신에 대해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라’ 표현해 주신 데에는 그만한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중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하신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알파벳의 가장 첫 글자와 가장 마지막 글자입니다. 영어 알파벳의 A와 Z에 해당하는 글자들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문자는 곧 문명의 발전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습니다. 문명이 발전하고 전수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자’라고 하는 수단이 있어야 하지요. 일류 역사상 대부분의 문명들도 바로 문자의 발명으로 말미암아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알파와 오메가를 포함하는 모든 문자는 이 땅의 모든 문명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자인 알파벳의 가장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는 바로 이 땅의 모든 문명들의 시작과 끝을 의미하지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하신 것은 하나님 편에 어떤 시작점과 끝점이 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인간 편에서 발전시켜 온 모든 문명의 시작과 끝도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모든 지식은 지식의 근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주관하심 가운데 있다는 말이지요.

원래는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식을 사용함에 있어서 사람들이 사단의 역사를 받아감으로 인해 잘못 쓰이고 있는 분야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식 안에 비진리의 잘못된 것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원래는 선하고 진리에 합당하게 쓰도록 주신 지식을 인간들이 사단의 역사를 받아들임으로 결국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다는 말이지요.

다음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해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은 홀로이시던 태초부터 계셨고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계십니다.

또한 ‘장차 올 자라’ 하신 것은 우리 주님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은 결국 근본 하나이시므로 이처럼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전능한 자라’ 말씀하신 대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두가 창조주로서의 전능하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사도 요한이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쓰게 되는 배경과 환상 중에 계시를 받는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님께서 하늘로서 강림하실 때는 정말로 대단한 장관이 펼쳐지게 됩니다. 그 순간을 깨어 준비하며 맞이하는 사람들은 그 장관을 직접 보면서 홀연히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하늘로 들려 올려지게 되지요.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예비된 곳에서 주님과 7년 동안 혼인잔치를 하며 꿈만 같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여 거룩한 옷을 예비한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지요.

거룩한 옷이란 바로 마음의 깨끗함을 의미하며 이처럼 거룩한 옷을 입기 위해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열심히 마음에 할례하여 마음의 죄악을 벗어 나가야 하지요.

하나님께서 계시록 강해를 허락하신 것은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마다 마음에 할례하며 열심히 신부단장 해 나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동일한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을 얼마나 심비에 새기고 새겨서 영으로 일구어 행해 나가느냐에 따라 얼마 후, 주님을 맞는 그날에 여러분의 모습은 전혀 달라질 수가 있지요.

요한계시록 강해를 듣는 매시간 시간이 마음에 또 결단하고 다짐하는 은혜의 순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을 맞이하는 그날에 조금의 후회도 없이 담대하게 주님 품에 안기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08-25 오전 11:00:05 Posted
2024-01-07 오후 3:08:18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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