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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4)  [계 1:9-12]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1.08.27
본문 9절 전반절에 보면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했습니다.

이는 육적인 의미에서 피를 나눈 형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의 형제를 뜻하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누가 진정한 형제요 자매요 모친인지를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 12:50에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셨지요. 그러므로 요한은 지금 주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성도들에게 ‘우리는 서로 형제’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을 살고 있는 여러분과 사도 요한도 얼마든지 형제가 될 수가 있지요. 그리고 장차 천국에 가면 천국 백성들은 모두가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서로 간에 영원히 형제, 자매로 살아가게 됩니다.

9절 중반절 다음으로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말합니다.

먼저 “예수의 나라”에 대해 살펴보면 예수의 나라란, 곧 진리의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목적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에 들어가기 위함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의 나라에 동참해야 됩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한 대로 예수님은 진리 자체가 되시므로 우리가 예수의 나라에 동참한다는 것은 진리 안에 사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리고 이처럼 진리 안에 살려고 하면 예수의 환난과 참음에도 동참을 해야 합니다. 요한은 이 땅에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에도 많은 핍박을 받았지요. 그러나 본격적인 핍박은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부터였습니다.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며 죽음의 위협을 당하기도 하면서 사도 요한은 예수의 환난에 동참했지요. 그러나 요한은 이러한 모든 환난 중에라도 주님을 믿기 까닭에 참고 인내했습니다.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들까지도 용서하며 진리의 말씀대로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했지요. 이것이 곧 예수의 참음에 동참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 주님으로 인해 받는 핍박과 환난을 오히려 기쁘고 감사하게 여깁니다. 마 5:11-12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말씀한 대로이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주를 믿음으로 인해 핍박을 받으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켜 주지 못하시느냐? 핍박하는 악한 사람들을 다 멸해 버리시면 되지 않는가?’ 이렇게 말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자녀들이 핍박과 환난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허락된 것임을 알아야 하지요. 그것을 통해 오히려 복음이 더 널리 전파되고 개개인의 신앙도 성장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그 심한 핍박이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기독교가 로마를 통해 유럽과 전 세계로 전파될 수가 있었지요.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은 그것을 헤집으면 헤집을수록 그 불씨가 바람을 타고 더 멀리멀리 퍼지듯이 초대교회도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불씨가 되어 더 널리 복음을 전파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본 제단의 지난 역사를 돌아보아도 마찬가지였지요. 만약 본 제단이 주변으로부터 어떠한 핍박도 받지 않고 그냥 평안한 길을 걸어왔다면 과연 오늘날처럼 창대히 이루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권능이 세계 가운데 널리 펼쳐질 수가 있었을까요?

우리는 핍박이 있었기 때문에 더 뜨겁게 기도할 수가 있었고, 눈을 세계로 돌려 하나님의 나라를 이처럼 크게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만약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면 영의 세계에 대해서도 전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 오늘날과 같이 이렇게 밝히 영의 세계에 대해 알고 체험해 나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간절히 천국 새 예루살렘을 소망하며 영을 향해, 온 영을 향해 뜨겁게 달려갈 수도 없었을 것이구요.

그러나 여러분은 예수의 나라에 동참하기 위해 열심히 진리 안에 살려고 노력해 왔고 주님으로 인해 받는 핍박이나 환난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참고 인내해 왔습니다. 그 결과로 오늘날 이처럼 창대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게 된 것이고 많은 성도님들이 영을 향해 힘차게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요한은 자신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했습니다.

사도 요한을 밧모섬에 유배시킨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한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그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 있었던 일이었지요. 사도 요한으로 하여금 가장 적당한 환경 가운데서 계시를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유배된 것은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밝히 나타내기 위함이었지요. 그래서 사도 요한은 자신이 밧모섬에 있게 된 이유를 유배되었다고 표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그 섬에 있게 되었다’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0절에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했습니다.

먼저 “주의 날”이라 했는데, 주의 날이란 좁은 의미에서 바로 일요일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망 권세 깨뜨리고 부활하셔서 모든 인류의 구세주가 되어주신 날, 그날이 바로 일요일이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토요일에 지키던 안식일이 이제 일요일로 바뀌면서 그날을 ‘주의 날’ 또는 줄여서 ‘주일’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자신이 주의 날, 즉 일요일에 성령에 감동함을 입고 계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날 하루에 계시를 다 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이날을 기점으로 해서 많은 날들에 걸쳐 계속해서 계시를 받아 나갔던 것이구요.

그런데 주의 날이란, 넓은 의미로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든 날입니다. 진리 안에 온전히 사는 사람에게는 꼭 일요일만이 주의 날이 아니라 늘 주님과 동행하며 교통하는 매일 매일이 다 주의 날이지요. 내가 주 안에 있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주의 날에 담긴 또 한 가지의 의미는 바로 주님께서 친히 허락하신 날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일에는 가장 알맞은 때가 있기 때문에 우리 편에서 원한다고 해서 무조건 아무 때나 교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실 때 가장 적합한 때를 택하시지요.

더욱이 사람 편에서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므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는 가장 합당한 시점을 택하시는 것이며 그때가 바로 주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주의 날에 성령의 감동을 입어 계시를 받게 되었는데, 그렇다면 성령의 감동함을 입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성령의 감동을 입는다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근본 된 공간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직접 느끼므로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있게 깨닫는 것’입니다. 이는 곧 아버지 하나님의 근본 된 공간에서 나오는 아버지의 온전하신 선과 무한한 능력을 느끼게 된다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성령의 감동함을 입게 되면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도 있고 환상도 볼 수가 있으며, 그 안에 담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정확하게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환상을 본다고 할 때, 단지 보고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느낌이 함께 전달되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깊은 마음이라도 깨달아지지요.

성령의 감동을 입으면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므로 아버지의 마음까지라도 깨달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때는 아버지 하나님의 근본 된 공간 안에 들어가 있게 되므로 어둠의 세력이 방해하지 못하지요. 바로 이런 상태에서 하늘로부터 비밀한 일들과 영계의 깊은 계시를 끌어내릴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성령의 감동함을 입는다 하여 누구나 계시를 끌어내린다는 의미는 아니지요. 성령의 감동함은 믿음의 1단계에서부터 5단계에 이르기까지 어느 단계에서든지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각각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성령의 감동함을 입는 정도가 다르지요.

능히 하나님과 교통하며 계시를 끌어내리려면 믿음의 4단계 이상의 성결의 차원에 들어가서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야 합니다. 계시를 받기 위해서는 나의 생각이 없어야 하고 자기적인 것이 철저히 차단되어야 하지요.

그러므로 성결의 차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며, 그러면서 동시에 얼마나 부르짖어 기도하며 불같은 기도를 올리느냐에 따라서도 성령의 감동함을 입는 정도가 달라집니다.

더 깊은 영의 차원 즉, 온 영의 차원에 들어가면 그때는 늘 성령의 감동함을 입고 살게 되지요. 물론 온 영의 차원에서도 부르짖어 기도할 때 더 깊은 감동함의 차원에 들어가지만 이때는 설령 기도하지 않는다 해도 평소에 늘 성령의 감동함을 입은 상태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감동함을 입은 사도 요한은 자신의 뒤에서 나는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듣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음성을 나팔소리에 비유했는데, 당시로서는 나팔소리가 큰 소리였지요. 오늘날처럼 스피커 같은 것이 있어서 큰 소리를 낼 수 있는 때가 아니므로 주님의 크고 우렁찬 음성을 설명하기 위해 큰 나팔소리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에 입에 대고 부는 나팔에 비유한 것이구요. 저도 지금까지 하나님의 음성을 여러 번 들어봤는데 그 소리는 세상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맑고 청아하면서도 너무나 우렁차고 큽니다. 한 번 들으면 잊혀질 수 없는 음성이지요. 주님의 음성도 마찬가지이구요.

그런데 왜 사도 요한은 이러한 주님의 음성이 자신의 뒤에서 난다고 한 것일까요? 이는 마치 어떤 것을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처럼, 주님께서도 바로 뒤에서 기다리고 계셨다는 듯이 때가 되어 말씀하고 계시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쯤 사도 요한이 영계의 문을 뚫는 기도를 통해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계시의 말씀을 끌어내릴 준비가 될지 이미 다 알고 계시지요. 그래서 바로 그 시점에 맞추어 필요에 따라서는 천사를 대신 보내실 수도 있고 때로는 친히 영으로 오셔서 말씀해 주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주님 편에서는 반드시 정확한 때를 맞추신다는 것이지요.

11절에 일곱 교회의 이름들이 나옵니다.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말씀합니다.

여기 나오는 일곱 교회는 단순히 그 당시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까지도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을 대표하는 것이라 했지요. 이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교회들을 각각의 유형별로 나누어 보면 대표적인 일곱 교회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은 모든 교회에 적용되는 기준과도 같은 말씀이며 모든 교회들에게 주시는 푯대와도 같은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은 꼭 교회에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니라, 성령께서 성전 삼고 계시는 여러분 개개인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지요. 따라서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을 통해 개인적으로도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볼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12절에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했습니다.

요한은 음성이 들리는 쪽을 향해 몸을 돌이켰을 때, 거기에서 일곱 금촛대를 보게 되지요. 그러면 일곱 금촛대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금촛대는 주 안에서 믿음으로 세워진 교회를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피 흘려 값 주고 사신 교회로서 주님의 몸 된 제단을 의미하지요. 여기에 일곱이라는 것은 완전하다는 의미로서 진정 주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왜 금촛대가 주 안에서 믿음으로 세워진 교회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금은 변치 않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촛대는 빛을 발하는 역할을 합니다. 바로 세상에 빛을 밝히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촛대에서 빛을 밝히는 것은 ‘초’입니다. 초는 자신을 녹이고 희생하면서 빛을 밝혀 주는 역할을 하지요. 그러므로 이러한 초와 같이 자신을 희생하며 세상을 밝히고 진리 가운데 인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촛대에서 발산되는 빛의 밝기가 저마다 다른 것처럼, 주 안에서 믿음으로 세워진 교회라 할지라도 각각 그 빛의 밝기가 다르지요. 그러므로 촛대에서 나오는 빛의 밝기는 각각의 교회들이 얼마나 성결되어 주님의 마음을 이루었는가를 나타내는 척도입니다.

그렇다면 촛대에 있는 초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초는 바로 진리를 의미합니다. 또한 초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진리의 말씀 안에 살아가는 성도를 의미하지요. 마치 초의 밝기도 다 다른 것처럼 성도가 얼마나 진리 안에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성도의 영적인 빛의 밝기도 다릅니다.

진리를 더 온전히 행하면 행할수록 마치 초가 더 많이 타면서 밝아지는 것처럼 각 사람에게서 나오는 빛도 더 밝아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성도들이 모인 교회 역시 성도들이 얼마나 진리 안에 살며 빛을 밝히고 있느냐에 따라 교회 전체에서 흘러나오는 빛도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초가 환하게 타고 있는 금촛대는 결국 주 안에서 믿음으로 세워진 교회를 의미하는 동시에 성령께서 성전삼고 계시는 성도 개개인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이 본 일곱 금촛대는 바로 일곱 교회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제 13절부터는 사도 요한이 보았던 우리 주님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요한은 이 땅에서도 주님과 3년 동안을 지내면서 친히 뵈었기 때문에 주님의 모습을 잘 아는 사람 중에 한 명이지요.

하지만 사도 요한이 예전에 보았던 주님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육을 입고 계신 모습입니다. 그러나 육을 입고 계시던 주님의 모습과 지금 영광 중에 계신 주님의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단적인 예로서,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은 물론이고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을 알 수가 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또 다른 상상할 수 없는 영광 중에 계십니다. 사도 요한은 바로 이러한 주님의 모습을 지금 보면서 설명해 나가는 것이지요.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님의 모습에는 각각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들을 그 빛의 밝기에 따라 세우신다면 어떨까요? 물론 여기서 빛의 밝기란 육적인 밝음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의 밝음, 즉 얼마나 진리 안에 행함으로 영적인 빛이 흘러나오는가를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빛이 아주, 아주 밝은 교회에서부터 이미 불이 꺼져 버린 교회까지 매우 다양한 빛의 밝기를 가진 교회들이 있겠지요. 이때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빛이 가장 밝은 교회를 사랑하실 수밖에 없고 그 안에 속한 성도들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교회에 속해 있느냐가 그만큼 중요하지요.

그런데 어떤 교회를 만드느냐 하는 것 역시 그에 속한 성도들의 몫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에 속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밝은 빛을 발하느냐에 따라 교회 전체에서 흘러나오는 빛의 밝기가 달라지기 때문이지요. 또한 흐린 빛이 많이 모여 있는 것보다 아주 밝게 빛나는 빛 하나가 때로는 더 밝은 빛을 발하기도 합니다.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는 정녕 진리 안에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기도의 불이 결코 꺼져서는 안 되며,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들이 되시기 바라구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가 되시고, 그러한 성도들이 모임으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교회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09-01 오후 1:48:55 Posted
2024-01-07 오후 3:08:18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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