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정기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6) 에베소 교회 (1) [계 1:19-2:7]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1.09.10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일곱 교회는 주님의 이름으로 이 땅에 세워진 모든 교회들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은 곧, 마지막 심판 날에 모든 교회들을 심판하는 기준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계 1:19-20에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요한에게 “네 본 것”이라 하셨는데, 이는 지금 요한이 환상 중에 보고 있는 것, 즉 계시록 1장의 내용을 의미하지요. 그중에서도 요한은 지금 특별히 주님의 모습을 보고 있기 때문에 ‘네 본 것’이란,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과 3년간 함께하며 많은 것을 보았지요. 그때 보고 들으며 가르침 받은 모든 것이 다 “네 본 것”에 해당하며, 요한은 그때 본 것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에 대해 더 온전히 기록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제 있는 일”이란 지금부터 주실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이지요. 넓은 의미로는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 즉 현재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까지도 의미합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계 2,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은 단순히 그 당시에 있었던 일곱 교회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지금 현재까지 이 땅에 존재하는, 그리고 장차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존재하게 될 모든 교회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이라 했지요. 그러므로 일곱 교회에 해당하는 “이제 있는 일”이 결국은 지금까지 각 시대마다 존재했고 현재도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에 있었던 일이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장차 될 일”이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장차 반드시 될 일들, 즉 주님의 공중 강림과 7년 환난, 천년왕국, 백보좌 대심판, 그리고 최후에는 모든 영혼들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이 모든 일들을 말하는 것이지요.

계 4-22장까지의 내용들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장차 될 일들을 요한에게 미리 보여 주시며 “기록하라” 말씀하고 계시지요. 그러시면서 일곱 별과 일곱 촛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 즉, 교회를 치리하는 종을 의미하며,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의미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일곱 별과 일곱 금촛대가 주님의 오른 손에 있다 했습니다. 이는 곧 주님께서 능력으로 붙들고 계신 교회와 주의 종을 의미하는 것이라 했지요.

하나님 앞에 합하여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교회와 그 주의 종은 하나님께서 능력의 팔로 붙드십니다. 이러한 교회와 주의 종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것이지요.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시고 또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 수많은 교회들이 있고 종들이 있지만 주님께서 친히 능력으로 붙들고 계신 교회와 주의 종을 참된 주님의 교회요, 주의 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와 종은, 주님께서 친히 함께하시는 것이므로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은 곧 주님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이 되지요.

더욱이 주님께서 붙들고 계신 종은 그 가르침이 곧 주님의 말씀이요 진리로서 그것이 바로 ‘공의의 잣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장하시는 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선포케 하심으로 이렇게 증거된 말씀이 결국 마지막 날에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지요.

오늘날에 이 땅에 수많은 교회들이 있고 각기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종들이 있지만, 그들의 모든 가르침이 다 진리는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보장하시는 참된 종을 통해 선포된 말씀이라야 그것이 진정 하나님의 뜻이며 정확한 심판의 기준이 될 수가 있지요.

모든 교회들이 다 구원의 방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붙들고 계시며 함께하시는 교회여야만이 더더욱 이 마지막 때에 구원의 방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이지만, 정작 주님께서 함께하실 수 없는 교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마지막 심판 날에는 여러분이 이 땅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가 여러분 개개인의 심판의 척도가 될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어떤 교회, 어떤 제단에 속해 있었는지도 심판의 척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과 여러분 개개인의 관계로 결정되는 것이지만, 성도들이 어떤 제단에 속해서 신앙생활을 했고 어떤 주의 종을 머리로 섬겼느냐 하는 것이 결국은 그들의 개인적인 신앙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진리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주의 종이 다른 교회나 다른 주의 종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들었을 때 자신도 그대로 판단, 정죄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비록 어떤 악의가 있어서 그렇게 행한 것은 아니었다 해도 마지막 심판 날에 그 행함에 대해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마음이 선한 사람이라고 하면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아닌 것에 대해 그처럼 판단 정죄하지도 않았겠지만, 설령 진리를 전혀 모르는 초신자 때 그렇게 행한 것이었다 해도, 이후로 얼마든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 회개할 기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점차 진리를 알게 되면 예전에 자신이 했던 말과 행동이 너무나 악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당연히 깨달을 수가 있지요. 그때라도 예전의 잘못을 회개하면 될 텐데 그렇지 않고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채로 마지막 심판 날에 백보좌 앞에 서게 되었다면 그때는 단지 “예전에 제가 진리를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라고 하는 이 한마디 말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 12:36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하신 말씀대로, 반드시 심문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신앙생활 하는 동안에 어떤 제단과 교회에 속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어떤 주의 종을 머리로 삼아 가르침을 받느냐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하지요. 그 선택 여하에 따라, 영혼이 잘되며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해 들어갈 수도 있고, 반대로 소경된 인도자의 이끌림을 따라가다가 함께 구덩이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란, 딤후 2:5에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라’ 말씀한 대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고, 마지막 날의 심판도 개인적으로 이루어지지만, 단체 점수 또는 단체 경기라는 것도 있듯이 신앙 안에서도 그와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제단에서 신앙생활 했고, 또 누가 그 제단의 머리였는가 하는 것이 여러분 개개인의 심판에 있어서도 잣대가 된다는 말이지요. 마지막 심판 날에는 개개인뿐만 아니라, 교회에 대한 심판도 있게 되는데, 이때 여러분이 속해 있던 교회가 하나님 앞에 어떤 평가를 받느냐에 따라 여러분에게 득이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와 제단이라고 하면 당연히 말씀에 따라 심판이 있게 되지요. 그 심판의 기준이 되는 말씀이 바로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인 것이지요. 또한 교회와 제단의 머리된 주의 종이었다면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신앙에 대한 심판은 물론이고 머리된 목자로서의 심판도 받게 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맡겨진 교회와 양 떼를 과연 어떻게 치리했는가에 따라 엄정한 심판이 있게 되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의 머리로서 당연히 주님의 뜻에 따라 교회와 양떼를 치리해야 하는데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그에게 임할 심판이 견디기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운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거짓되게 행했다면 정확한 공의에 따라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지요. 적당히, 대충대충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너무도 정확하고 분명하게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약 3:1에서 사도 바울은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말씀하고 있지요. 마 18:6에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하셨는데, 하물며 교회의 머리가 되어서 많은 영혼들까지 함께 사망의 길로 이끌었다면 그 심판의 형벌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반면에 머리된 주의 종으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양떼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며 결국 좋은 천국으로 인도해 갔다면 그에게는 놀라운 상급과 영광이 주어지지요. “주님의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는 말씀에는 바로 이러한 여러 가지 의미들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 안에는 신‧구약에 있는 말씀을 종합하여 과연 어떤 교회가 주님의 칭찬을 받으며, 반대로 어떤 교회가 주님의 책망을 받는지가 잘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들을 잘 들으면 지금 자신의 교회가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깨달을 수가 있지요.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모든 성도 개개인의 신앙 상태를 점검하고 신앙을 바로 세우기 위해 필요한 ‘신앙생활의 길잡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처럼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을 통해, 아무리 칭찬받는 교회가 될 수 있는 길을 밝히 제시해 주셨다 해도 여러분 스스로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달라질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증거되는 말씀들을 잘 듣고 정녕 마음에 양식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책망하신 내용들 중에 혹여라도 개인적으로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이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시기 바라며, 발견되는 것이 있다면 더 이상 지체 말고 즉시로 돌이켜 말씀대로 행하심으로, 이번 기회가 여러분의 신앙을 확실히 반석 위에 세우는 축복의 시간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 말씀을 듣는 모든 교회들과 주의 종들도 마지막 날에는 반드시 교회와 그 교회의 머리에 대한 정확한 심판이 있음을 깨달으셔서, 그날에 주님 앞에 칭찬받는 교회와 주의 종들로 온전히 변화되어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계 2:1을 보면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했습니다.

여기서 에베소 교회의 사자란 ‘에베소 교회를 치리하고 있는 목자’를 의미하지요. 그리고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를 보내신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주님에 대해 표현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라 했지요. 이는 간단히 말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졌고 주님께서 친히 능력으로 붙들고 계신 교회와 주의 종들이 바로 정확한 공의의 잣대가 되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 날에 주의 이름으로 세워진 교회들과 주의 이름으로 행했다고 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 공의 가운데 심판이 이루어질 때 바로 주님께서 세우시고 보장하신 교회와 주의 종들이 심판의 기준이 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오른손에 붙들린 일곱 교회란, 처음으로 세워진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서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세워지는 모든 교회들 가운데서 주님 앞에 합당한 교회들을 총칭하는 의미이지요. 이러한 교회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가므로 늘 성령이 충만하고 사랑이 넘치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이 바로 이러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교회를 담당하는 머리된 주의 종들 역시 주님의 능력의 오른손에 붙잡힌 바가 되어야 하지요. 주인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시고 인도해 가실 수 있는 그러한 종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종이 되면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보장하시지요. 그래서 만약 이러한 주의 종들을 헐뜯거나 시시비비하고 판단하게 되면 그것이 곧 우리 주님에 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일곱 금촛대 사이를 다니신다 했는데, 일곱 금촛대란 바로 ‘일곱 교회’이고, 촛대 안에 있는 초는 ‘성도’를 의미하지요. 초에 불이 켜짐으로 어두움을 비추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가 성령 충만하고 진리 안에 살아갈 때 빛을 발하게 됩니다.

참 믿음을 소유한 성도라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빛 가운데 살아가므로 이러한 성도들이 함께하는 교회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와 구원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이러한 교회들을 찾으시기 위해 지금도 불꽃같은 눈동자로 두루 운행하시며 모든 교회들을 감찰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에게 해당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일곱 교회 각각에 해당하는 모델을 지금 존재하는 교회들 중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 존재하는 교회들 중에서 에베소 교회에 해당하는 모델은 어느 교회일까요?
본문을 하나하나 살펴볼 때, 과연 어떤 교회가 에베소 교회와 같은 유형에 해당하는지, 진리로 잘 분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 하여 ‘어느 교회구나!’ 판단하지 마시고, 혹여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에는 에베소 교회와 같은 모습은 없는지, 또한 여러분 자신에게는 그러한 모습이 없는지를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칭찬에 해당하는 말씀을 주십니다.
2-3절에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하셨지요.

첫째로 “진리대로 행하고자 수고하고 인내했다” 하십니다. 에베소 교회의 목자와 성도들은 진리에 위배된 것들을 하나하나 버리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가기 위해 힘썼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이렇게 크게 네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이 각각에 해당하는 말씀들이 성경 곳곳에 나오지요. 이러한 진리의 말씀대로 행하려면 수고와 인내가 따르게 됩니다. 히 12:4에 보면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하여, 죄를 싸워 버리기 위해서는 피 흘리기까지 죄와 대항하여 싸워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 4:2에는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했고, 계 2:10에서는 “죽도록 충성하라”하셨지요. 이처럼 마음 안에 있는 죄악을 벗기 위해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또한 맡겨진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려면 당연히 수고가 따르게 되고, 이렇게 수고하다 보면 인내도 따르게 됩니다.

여러분도 과연 에베소 교회처럼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만큼 죄를 버리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수고하며 인내하셨습니까? 스스로 보기에 ‘나는 이만큼 했습니다.’ 하며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고후 10:18에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하신 대로, 주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는 자가 되어야 하지요. 그렇다 하여 칭찬받기 위한 목적으로 죄를 버리고 충성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여러분이 주님께 받은 명령을 다 행한 후에라도 도리어 “나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고백할 수 있는 무익한 종의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 주님의 칭찬받는 교회와 성도들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에베소 교회는 주님 앞에 이처럼 칭찬받을 수 있을 만큼 진리를 행하기 위해 수고하고 인내했으므로 주님께서는 이러한 에베소 교회를 향해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안다” 하시며 그들의 수고와 인내를 칭찬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어떤 분들은 진리를 잘못 이해해서 ‘교회는 사랑을 실천하는 곳이니까 죄를 지어도 무조건 용납해야 하지 않느냐’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을 지닌 부모는 가정에서 자녀가 죄를 짓고 탈선하게 되면 그것을 무조건 용서하며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를 때려서라도 바로 잡으려고 하지요. 이는 주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주 안에서는 일흔 번에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며 어찌하든 참고 인내하여 상대가 진리로 변화되기를 기다려 주어야 하지요. 그렇다고 이 말이, 번연히 상대가 사망으로 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놔두라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마 18:15-17에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말씀하고 있지요.

상대의 허물을 덮어 주며 어찌하든 용서하고 품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돌이키지 않으며 교회의 말까지도 듣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라 하십니다. 이는 사랑이나 긍휼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사람을 무조건 용납하며 계속 두었다가는 자칫 다른 사람들까지 범죄에 물들어가므로 교회 전체에 악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에베소 교회는 이처럼 악한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고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칭찬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가 나중에는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듣게 되지요. 왜 그렇게 된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벧전 1:16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꼭 이 명령이 아니라 해도, 우리가 거룩해져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독생자까지 내어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들을 향한 사랑을 나타내 주셨지요.

또한 성령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 주심으로 성령님께서는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영혼들을 위해 대신 간구하고 계시며 의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결코 더 이상 어둠 가운데 살아서는 안 되지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교회 역시 당연히 진리의 거룩함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주님의 몸 된 교회 안에 결코 악을 용납해서는 안 되지요. 그런데 오늘날 현실을 보면 교회 안에서 악을 행하는 일이 있어도 그것을 책망하고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쉬쉬하며 용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여 성도들이 죄를 지적받으면 교회를 떠나 부흥에 지장을 초래할까 염려하거나, 또는 부와 권세와 타협하다 보니 죄를 용납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교회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더 이상 죄 가운데 거하지 않고 어둠에서 나와 진리 가운데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요, 하나님 앞에 죄가 되고 사망으로 가는 일이라면 단호히 지적하고 가르쳐서 돌이키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 하여 단에서 말씀으로 찌르고 치라는 뜻이 아니지요.

오직 판단하실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이시므로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권면하고 독려하여 어찌하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야 합니다. 이처럼 늘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도받는 여러분 모두의 교회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09-15 오전 10:55:21 Posted
2023-12-23 오전 12:02:23 Updated

다음 글 1차 영혼육 (4) 이전글
이전 글 생명과 평안 (1) 다음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