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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7) 에베소 교회 (2) [계 2:1-7]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1.09.17
에베소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몇 가지 칭찬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중에 두 가지를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는데 첫째는 진리를 행하기 위해 수고하고 인내한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은 것이었지요.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칭찬해 주신 내용은 사실 교회와 성도들이 당연히 행할 바입니다. 교회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기를 힘쓰고 진리에 위배되는 것은 과감히 버리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도록 가르쳐야 하지요.

또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충성하며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도 교회와 성도들이 마땅히 행할 일입니다. 이렇게 행하다 보면 수고와 인내가 따르기 마련이지요. 그러나 오늘날 과연 이러한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교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히 10:25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말씀하셨는데 오늘날 모이기를 폐하는 교회들이 점점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말씀대로 행하며 수고하고 인내하기보다는 점점 쉽고 편하게만 신앙생활 하려고 하지요.

교회 안에서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전 5:11-13에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외인들은 하나님이 판단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쫓으라” 했지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나 믿음의 형제, 자매가 이렇게 불법을 행하고 진리 안에 살지 못하여 죄를 지으면 그런 사람과는 사귀지도 말고 먹지도 말라는 말씀입니다. 심지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고까지 말씀하셨지요.

물론 이 말씀을 오해하여 그동안 죄악 가운데 살다가 이제 막 주님을 영접하고 교회에 갓 들어온 초신자들에게까지 그렇게 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초신자의 단계를 지나서 믿음이 있다고 인정을 받는 사람, 즉 집사나 장로 등의 직분을 가지고 있고 소위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죄를 범하거든 그런 사람과는 사귀지도 말고 함께 먹지도 말며 그를 교회에서 내어 쫓으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왜 이러한 사람들은 용서하지 말고 내어 쫓으라고 명하신 것일까요?

설령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그런데 죄를 지적받고도 여전히 회개하지 하고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은 마음이 완악하므로 사단의 역사를 받아 점점 더 많은 악을 행하게 되고 결국 교회에도 큰 해를 입히게 되지요.

교회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야 하는 곳인데 오히려 이런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의 일들이 훼방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사람들을 그냥 둔다면 누룩이 번지듯이 교회 안에 점점 더 악의 씨를 뿌려 나갈 것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내어 쫓으라고 명하신 것이지요.

그렇다고 한두 번 권면해 보다가 안 들으면 바로 내어 쫓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마 18:15 전반절을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하셨지요. 즉, 믿음의 형제에게 어떤 잘못이 있으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말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먼저 그에게 가서 권면해 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권면했을 때 그 형제가 회개하고 돌이키면 사망의 길로 가지 않게 되니 그 형제를 구한 것이 되지요. 그리고 이렇게 해서 듣지 않을 때, 16절에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신보다 질서상 더 높은 위치에 있는 한두 사람에게만 알려서 그들을 통해 권면하도록 해야 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해도 듣지 않는다면 그때는 교회 즉, 주의 종에게 알려야 하는데 이때도 필요하다면 질서를 좇아 점차 더 윗분에게로 알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때로는 책망해서라도 돌이키도록 해야 하지요.

그래도 듣지 않으면 그때는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하셨습니다. 그런 사람을 더 이상 방치해 두었을 때는 더 많은 사람들을 죄 가운데로 물들어 가게 하므로 결국 교회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지요.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사람을 교회에서 용납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랑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더 많은 영혼들을 위하며 주님께서 피 값으로 사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거룩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교회 안에서는 결코 악을 용납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수 있는 교회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셋째로,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낸 일을 칭찬하셨습니다.

여기서 ‘사도’란 예수님의 열두 제자나 바울과 같은 사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믿음이 있어 직분을 받은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주의 종을 비롯하여, 장로, 권사, 집사 등의 직분들이 있지요. 때로는 믿음과 상관없이 신앙의 연륜에 따라 직분이 주어지고 머리가 되어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리 직분이 주어지고 많은 사명을 맡은 머리가 되었다 해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지 않으시면 그는 오늘 본문에 나온 대로 “자칭 사도”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교회 안의 모든 직분과 사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아야 하지요.

진정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신앙의 연륜이나 외적인 조건에 의해 직분을 받고 사명을 맡게 되었다면 이것이 바로 자칭 사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냈다고 하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를 들어 교회를 치리하고 있는 목자가 양떼들에게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도록 가르칠 때 믿음이 있는 성도라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 하고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이 혼과 영과 및 관절, 골수를 찔러 쪼갤 때 자기 안에 발견되는 합당치 않은 모습들을 회개하고 돌이켜 나가지요.

마음이 완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돌이키지 않습니다. 더욱이 자신의 불의함이 드러날 것 같으면 오히려 사람들을 미혹하여 세력을 규합하고, 마침내 자기 정체가 드러나게 되면 교회를 등지고 욕하며 떠나는 모습까지 볼 수가 있지요. 자칭 사도라 했던 사람들의 거짓된 모습이 결국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종들 중에도 자칭 사도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있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주의 종으로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다른 주의 종이나 교회를 판단, 정죄하거나 자기 스스로 소경이 되어 있으면서 양떼를 잘못 이끌어 가는 경우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대제사장과 제사장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바로 이러한 경우에 해당하지요. 마 2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소경된 인도자들”이라 부르시면서,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하시며 책망하시는 내용들이 나옵니다.

이처럼 자칭 사도라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인 척 행세하지만 막상 하나님께서 시험을 주시면 이내 그 거짓된 것들이 드러나게 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이러한 거짓된 것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 시험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험 중에는 교회적으로도 많은 핍박과 어려움이 따를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스데반 집사가 악한 자들을 지적하고 그들의 악함을 드러낼 때 악한 무리들은 마음에 찔려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였습니다. 이렇듯이 악한 자들은 죄를 지적받거나 자신들의 본래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면 더욱 악하여져서 노골적으로 악을 발하는 것이지요.

만약 교회 안에서 자칭 사도라 하는 거짓된 사람들을 드러내려고 시험하다 보면 믿음이 연약하여 굳세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도 함께 떨어져 나가는 경우가 간혹 생깁니다. 그러다 보면 목자는 마치 자기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아픔을 인내해야 하는 일들도 있지요. 이러한 아픔을 감수하면서도 거짓된 것을 드러내려고 한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시험의 과정 속에서 정말 믿음 있는 성도라고 하면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마치 비가 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이 그 시험을 통해 더욱 굳건한 믿음과 선으로 나와지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시험을 통과하고 난 후에는 하나님께서 공의 가운데 더 큰 축복을 내려주실 수가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거짓된 자들을 드러내기 위한 시험을 허락하실 경우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도 함께 고통이 따를 것을 아시면서도 시험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시험이 허락되었을 때는 겉으로 봐서는 마음 아플 일도 많이 있지만 결국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더욱 견고히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오직 아버지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대해 “참고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자신의 모습에서 죄에 해당하는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돌이키고자 노력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힘써야 합니다. 간혹 하나님의 말씀 중에 죄를 지적받으면 반발하거나 시험거리를 만드는 사람이 있지요. 목자는 이러한 사람들도 사망의 길로 가지 않도록 눈물 뿌려 기도하며 참고 견디면서 생명의 말씀으로 변함없이 가르쳐야 합니다.

모세 선지자가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기 위해 홀로 산에 올라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사이에 백성들은 도리어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크나큰 죄악을 범하였지요.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두 멸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시자 모세는 하나님 앞에 눈물 뿌리며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도 복음 전파를 위해 매도 맞고 감옥에도 갇혀야 했으며 갖가지 고난들을 받아야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감사하면서 참고 견디며 승리했던 것을 볼 수가 있지요. 에베소 교회의 목자도 이처럼 참고 주님을 위하여 견디며 게으르지 아니하였으므로 칭찬을 받은 것입니다.

목자가 게으르면 기도할 수 없고 기도하지 않으니 원수 마귀 사단과의 영적인 싸움에서 양떼를 지킬 수도 없으며 잃어버린 양떼를 찾아올 수도 없는 것이지요.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해야 양떼를 위해 기도해 줄 수가 있는 것이며, 열심히 양떼를 돌아보며 맡겨진 사명도 충성되이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칭찬받는 교회와 목자가 되려면 바로 이러한 모습이 되어야 하지요. 죄로 관영한 이 마지막 때에 정녕 양떼들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내와 오래 참음이 필요합니다.

진리를 가르치고 또 가르치며 믿을 수 있는 증거들을 수없이 보여 주어도 여전히 세상과 짝하며 어둠 가운데 거하는 영혼들을 볼 때 목자의 심정은 피가 마르는 것 같지요. 용서해 주고 또 용서해 주어도 다시금 죄를 짓고 나오는 영혼들을 볼 때 목자는 참고 또 참으며 그 영혼을 위해 말할 수 없는 애통의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야 합니다.

한시도 영혼들에게서 마음을 놓을 수가 없고,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은 다 포기하면서도 영혼들을 위해서는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관심과 사랑으로 늘 살펴야 하는 것이지요. 또한 오늘날은 ‘믿는다.’ 하는 사람들조차도 갈수록 점점 진리의 복음을 왜곡하고 세상과 타협해 가는 세대이기에 주님의 이름을 위해 견뎌야 하는 일들도 너무나 많은 것을 봅니다.

오직 성경 말씀대로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이 참임을 증거하는 데도 오히려 그런 교회와 주의 종들을 ‘잘못되었다’, ‘이단이다’ 하며 정죄하지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로부터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말을 들었듯이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당연히 주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것을 함께 기뻐해 주고 힘이 되어 주어야 할 텐데 그와는 정반대로 방해하고 핍박하고 정죄하며 심히도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 얼마나 마음 아프고 안타까운 일인지요?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믿기 때문에 어떠한 시험이나 핍박이 온다 해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견디고 이겨야 하며,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기도하며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주를 믿는 참된 믿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처럼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행하기 위해 수고하고 인내한 것,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은 것,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 그리고 참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않은 것에 대해 칭찬을 들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이와 같이 칭찬받는 모습이 계속 되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을 볼 수가 있지요.

본문 4-5절에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하신 주님의 책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비록 칭찬을 들었던 에베소 교회였다 해도 처음 사랑을 버리고 처음 행위를 잃어버리니 ‘만일 회개하지 않으면 네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는 이처럼 두려운 말씀까지 듣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처음 사랑을 버리고 처음 행위를 잃어버리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할 텐데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요 14:21에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했고, 요일 5:3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목자와 성도들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여 죄악을 싸워 버리면서 진리 안에 살아가고자 힘썼지요. 열심히 모이기를 힘썼고 늘 기도했으며, 진리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며 전도하기에 힘을 썼습니다. 주의 이름을 위해 열심히 수고하고 인내하며 기쁨과 감사함으로 승리해 나갔지요.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이러한 진리에서 멀어지고 맙니다. 어느 순간, 첫사랑에서 떠나 이제는 점점 모이기를 힘쓰지 않고, 기도를 쉬고 진리 안에 살기를 힘쓰지 않으며, 세상 가운데 빠져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혹여 여러분의 모습은 아닌지 이 시간, 철저히 돌아보고 해당하는 내용이 있다면, 즉시로 돌이킬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발견하고 깨달았을 때 돌이켜야지 그렇지 않고 계속 놔두게 되면 나중에는 알아도 돌이킬 힘이 오지를 않습니다.

대부분 하나님을 처음 만나고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의 충만함으로 기쁨이 넘칩니다. 그래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각종 예배와 모임에 참석하고 기도하기를 힘쓰게 되지요. 또한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니 열심히 내 형제와 일가친척, 이웃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봅니다.

믿음의 형제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하고 교회에 나오는 것이 행복하며 주일이 기다려지고 말씀이 사모되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러한 처음 사랑의 충만함이 식어져 버립니다. 그 가장 큰 원인이 기도를 쉬었기 때문이고, 기도를 쉬니 성령의 충만함이 떨어졌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성령의 충만함이 떨어져서 처음 사랑이 식어져 버리게 되면 다시금 세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예배를 드려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지 못하고 의무감 속에서 형식적으로 드리게 되며, 예배시간은 물론이고 기도를 하려고 해도 이내 졸음으로 빠져들게 되지요.

죄를 싸워 버릴 힘도 오지 않으니 다시금 세상과 타협하며 죄로 빠져갑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첫사랑을 회복하고 처음 행위를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열심 내는 것이며, 세상의 죄를 벗어 버리고 진리 안에 살아서 점점 믿음의 분량이 장성해지고 더욱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온전히 성결되기 전까지는 항상 사단의 유혹과 시험을 받게 되므로 깨어 있지 않으면 어느 때라도 시험에 들어 처음 사랑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늘 염두(念頭)에 두어야 하지요. 이는 교회와 개인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에 대해 설명을 해 주시면서 오늘날에도 바로 이러한 에베소 교회와 같은 교회가 많이 있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교회가 처음에는, 에베소 교회가 칭찬을 받았던 것처럼 진리 안에 살기 위해 힘쓰고 애를 썼으며 주의 이름으로 인해 애매히 고난 받으면서도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며 나갔지요.

처음 사랑의 뜨거움이 있었기 때문에 핍박 속에서도 오히려 더 뭉쳤고 기도하기를 힘썼으며 어찌하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또한 비록 깊은 단계까지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영의 세계를 뚫고자 노력했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했지요.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여 모두가 하나 되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힘썼지요.

이처럼 행하니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셔서 그 교회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교회는 날로 부흥되어 갔고 성도들은 축복을 받아 갔으며 치료의 역사도 나타나게 되었지요. 그러던 교회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영향은 일파만파로 퍼져 갔지요.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변질되기 시작했을 때 즉시로 돌이켰으면 회복할 수 있었겠지만 이미 그들에게는 ‘어느 정도 이루었다.’ 하는 교만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기 시작했을 때는 그래도 곤고함을 느끼며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하는 위기의식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마저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지요.

자신들이 이루어 낸 것에 대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위안 삼으며, 그것이 결국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신다.’는 교만함으로 발전해 나갔던 것입니다. 기도를 쉬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좇기보다는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것을 지키며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커져 갔지요.

혹여 여러분의 교회에 해당하는 말씀은 아닌지, 자신에게 해당하는 말씀은 아닌지 점검해 보시고, 모든 성도님들이 ‘나는 처음 사랑을 잃지 않았나.’ 돌아보시는 소중한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생활과 예배를 드리는 태도와 마음, 사명을 맡아 감당하는 자세와 영을 향한 사모함과 행함 등 개개인의 신앙을 점검해 보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처음 사랑의 그 충만함이 여러분 안에 온전히 회복되며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09-24 오후 1:17:52 Posted
2023-12-23 오전 12:02:23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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