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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9) 서머나 교회 (1) [계 2:8-11]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1.10.01
지난 시간까지는 일곱 교회 중에 첫 번째로 에베소 교회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오늘날 이러한 에베소 교회와 같은 교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어느 정도 교회를 이루기까지는 나름대로 열심을 가지고 수고하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노력하지요.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성도들을 교묘히 미혹해 가는 니골라당과 같은 행위들을 미워합니다.

여기서 ‘니골라당이라고 하니까’ 여러분이 꼭 초대교회 당시에 이단사상을 가졌던 니골라당만을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진리인 하나님의 뜻을 교묘히 변질시켜서 성도들을 미혹하고 죄로 빠지게 하는 모든 행위들이 바로 니골라당의 행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들이 어느 정도 성장하기까지는 에베소 교회와 같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만한 모습들이 있었는데, 차츰 교회가 안정을 이루게 되고 주변으로부터 인정받는 교회가 되면서부터 처음 행위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지요.

이것이 자칫 교만으로 자라나서 이제는 자신들과 다른 모습이 있는 교회에 대해 판단하고 비난하는 모습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자신들은 이미 이렇게 스스로도, 또한 주변으로부터도 인정받는 교회가 되었다’는 높아진 마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다보니 더 나아가 다른 교회와 주의 종에 대해 ‘잘못되었다, 이단이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크나큰 악까지도 행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판단하지 말라하셨고, 정죄하지 말라, 수군거리지 말고 헤아리지 말라 누누이 말씀하고 계시지요.

자신과 같지 않다고 해서 전부 잘못되었고 이단인 것이 아니라, 모든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에 대해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은 니골라당의 행위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이지요.

니골라당이 주장하는 내용은 ‘영은 깨끗하고 죄가 없으며 성결된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몸에 죄가 있어서 죄를 짓는 것이지 사람 안에 있는 영은 죄와 무관하다. 사람이 죽어서 하나님이 그 영혼을 부르실 때 몸은 썩어져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므로 육체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구원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일단 주님만 믿고 나면 영혼이 정결하게 되기 때문에 육체는 어떠한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렇다면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과연 이러한 그들의 주장이 조금이라도 맞는 데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지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하셨고,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했다 해도 다시 죄를 지으면 성령이 소멸될 수도 있다 하셨으며,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짓게 되면 영원히 회개할 수조차 없음을 말씀하고 있지요.

그러니 니골라당의 주장과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명백한 이단사상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라고 가르치고 어찌하든 조금이라도 더 선하게 살며, 더 성결되도록 하기 위해 눈물로 가르치는 교회, 또한 오직 성경이 참임과 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가 되심과 창조주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따르는 확실한 증거들과 함께 전하는 교회에 대해 ‘잘못되었다. 이단이다’ 말한다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시공을 초월한 하나님의 역사, 권능이 담긴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통한 역사, 이밖에도 각종 희한하고 기이한 일들이 모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이 분명한 참임을 무수히 증명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영안이 열려 영의 세계를 보는 것도 나오고,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도 나오며, 그것도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과 교통했는지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요. 그런데도 이처럼 성경에 나와 있는 사실들이 오늘날도 일어나고 있고 체험한다고 하면, 왜 비난하며 잘못되었다 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비난하고 판단하시는 분들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인가?’ 정녕 깨달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에 비추어 분별하여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미워하시는 것이라면 우리도 당연히 미워하고 멀리 해야 하지만, 자칫 스스로의 교만함에 눈이 가리어져서 자신의 잘못된 잣대에 비추어 하나님의 사랑받는 제단과 주의 종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일이 결코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혹여라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을 방해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며, 더욱이 주의 종이 잘못 가르쳐서 양떼들에게까지도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를 짓도록 만들어서는 안 되지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말씀한 대로, 이제라도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정녕 진리가 무엇이고 참이 무엇인지’를 깨달으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던 에베소 교회가 왜 ‘네 촛대를 옮기겠다’고까지 하는 무서운 책망의 말씀을 들었는지를 꼭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에 대한 처음 사랑을 버리고 처음 행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이처럼 책망의 말씀을 주신 이유는 그들이 두려움 가운데 멸망으로 가도록 두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이켜서 이기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함께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지요.

오늘날에도 에베소 교회와 같은 교회와 성도들이 있다면 이제 신속히 회개하고 돌이켜서 새 힘과 소망 가운데 달려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년 혹은 수십 년씩 신앙생활 해 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첫사랑의 충만함과 뜨거움이 식어졌던 분들에게는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이 새로운 도전과 각오를 다지는 계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더 이상 뒤로 미룰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또한 지금까지 변함없이 첫사랑의 충만함 가운데 달려가고 있는 교회와 성도들 역시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을 통해 “내가 처음 사랑과 행위를 간직하며 더더욱 주님을 사랑해 나가리라” 다짐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라구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는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사람 편에서는 자신의 유익과 욕심, 그리고 변질되는 육의 속성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주님의 사랑을 저버리기도 하는 것이지요. 처음 가졌던 사랑의 마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설령 그처럼 마음이 변했던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켜서 처음 사랑과 행위를 찾는다면 결코 외면하시거나 이전의 잘못을 탓하지 않으시지요. 이전과 동일한 마음으로 여러분을 기다리시며 돌아온 여러분을 품에 안아 주십니다.

돌아온 탕자를 위해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며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열어주는 것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시지요. 이것이 바로 변함없는 영적인 사랑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마음 속 깊이 느끼심으로 혹여 처음 사랑을 잃었던 분들이 있었다면 다시금 처음 사랑의 뜨거운 눈물을 회복하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구원해 주신 주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여 하염없이 눈물 흘리며 생명 다해 충성하며 달려가겠다고 다짐했던 여러분의 처음 그 모습이, 이후로는 우리 주님 다시 뵙는 그날까지 결코 변함없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곱 교회 중에 두 번째로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일곱 교회 중에서 유일하게 칭찬도 책망도 아닌 권면식의 말씀을 들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 안에는 영적으로 매우 중요한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가는데 있어서 ‘왜 때로는 시험과 환난이 오는 것인지’ 그리고 ‘사단의 회’란 무엇이며, ‘어떠한 사람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지는지’ 등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내용들이 담겨 있지요.

8절에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가 가라사대”

여기서 서머나 교회의 사자란 그 교회를 담당하고 있는 주의 종을 뜻한다고 했지요. 그리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 즉, 주님에 대해 “처음이요 나중이요” 했는데, 주님을 처음이라 한 것은 주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다는 의미라 했습니다.

롬 5:12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는 말씀처럼, 아담의 범죄 이후 그의 피를 받고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모두가 결국은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었지요.

이러한 우리들을 위해 예수님께서는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인류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렸지요.

이에 대해 롬 5:18-19에 보면,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주님께서는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지요. 이를 가리켜 주님을 처음이라 말하는 것이구요.

다음으로 주님을 나중이라 하는 것은 장차 주님께서 공중 강림 하시게 되면 그때 바로 인류에 대한 모든 구속 사업이 끝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미 주님을 믿고 죽었던 사람들과 살아서 주님을 맞게 되는 사람들 모두가 주님의 공중 강림과 함께 부활의 열매로 나와지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그 후에 이삭줍기 구원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인간 경작을 통해 이루어지는 온전한 구원의 섭리에서는 벗어난 것이기 때문에, 주님의 공중 강림과 함께 실질적인 구원의 역사는 마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공중 강림의 때가 바로 부활의 마지막 열매를 거두는 나중이 되지요. 이처럼 처음이요, 나중이 되시는 주님께서는 분명히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부분이지요.

롬 10:9에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는 다닌다 하지만 주님의 부활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으니 부활의 소망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믿음도 없지요. 그렇다면 주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한 가지 예를 들어,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이 주님의 부활 전과 부활 후에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보아도 잘 알 수가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하는 3년 동안 많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는 사실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충분히 믿을 수 있도록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운명할 것과 죽은 지 사흘 만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실 것도 미리 말씀해 주셨지요.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십자가상에서 운명하시자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며 뿔뿔이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고백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지요. 물론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처럼 “죽더라도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 고백했었지만 그들도 다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쳤고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할 수도 있지만, 여러분도 영으로 변화되지 않는 이상은 동일한 모습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당시의 제자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온전히 믿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모습들이 나왔던 것이지요.

그랬던 제자들에게 하루아침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죽음이 무서워서 도망쳤던 제자들이, 이제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예수 그리스도를 외치며 사자밥이 되기도 했고, 칼에 목 베임을 당하기도 했지요. 어떤 이는 톱으로 켜 죽임을 당하기도 했고 베드로 사도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었습니다. 이밖에도 엄청난 순교의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의 제자들은 끝까지 주님을 증거했지요.

제자들이 이처럼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만났기 때문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신 주님을 자신들의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되자, 그들의 마음에도 부활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천국에 대한 소망이 넘치게 되었지요. 그러니 이제는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주님을 위해 생명까지 바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주님의 제자들에게서만이 아니라,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함께 목격했던 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서도 나타났지요. 그들이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소망 가운데 순교의 피를 아끼지 않고 희생했기 때문에 로마의 그 엄청난 박해 속에서도 결국 기독교가 그처럼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 오늘날 전 세계로 전해질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만약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지 못했고, 또 부활을 마음에 믿지 못했다면 어떻게 그러한 핍박과 고통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었겠습니까?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은 담대히 나가 그 사실을 전했는데, 이때 말로만 “주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전한 것이 아닙니다.

막 16:20에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한 대로 주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표적이 따랐기에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믿을 수가 있었지요.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정녕 마음에 온전히 믿어지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의 부활을 증거할 때, 주님께서는 따르는 표적으로 증거되는 말씀을 확증해 주시지요. 요 4:48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말씀한 대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야만 그것을 보고 믿음을 가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기사와 표적과 권능의 증거들을 보셨습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정녕 확실한 부활의 믿음과 소망 가운데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이처럼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말씀하시기를,
9절 전반절에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서머나 교회는 왜 환난과 궁핍을 당했던 것일까요? 사실 주님을 믿기 전에는 환난과 궁핍 가운데 살았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제 주님을 영접하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 속에 오히려 환난과 궁핍을 당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환난과 궁핍을 당하는 경우들이 많지요. 그렇다면 왜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환난과 궁핍이 있는 것일까요?

먼저 환난을 당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을 믿는 까닭에 주님의 이름을 인하여 받는 환난이 있고,
둘째는,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므로 사단의 송사를 받아 당하는 환난이 있지요.

그런데 믿는 사람들 중에도 이 두 가지를 혼돈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지 못하여 환난을 받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주님으로 인하여 환난을 당한다 말하지요. 또는 지혜롭지 못해서, 좀 더 선의 지혜를 받지 못해서 굳이 받지 않아도 되는 환난이나 핍박을 당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본인은 주를 위해 받는 핍박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을 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인해 받는 환난이나 핍박을 무조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데, 그것도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받는 환난이나 핍박의 경우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받는 개인적인 환난이나 핍박은 여러분이 영으로 들어오면 다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남편의 핍박, 아내의 핍박, 가족의 핍박 이런 것들이 떠나게 된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경우들에 대해 정확히 깨닫고 분별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주님을 믿는 까닭에 받는 환난은 의를 위해 받는 것으로서, 우리가 주님을 믿기 전에는 받지 않아도 되었던 핍박과 환난들을 이제 주님을 믿음으로 받게 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교회에 나간다고 남편이 아내를 핍박합니다. 때로는 시어머니나 부모님, 또는 형제, 친구 등이 핍박을 하고 심지어는 자녀가 부모를 핍박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나 이러한 핍박은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여러분이 영으로 들어오면 사라집니다. 빛 앞에서는 어둠이 물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영으로 들어와서 온전히 빛 가운데 행하게 되면 영적인 권세가 따르게 되므로 자연히 여러분을 핍박하던 어둠은 사라지지요.

그런데 5년, 10년, 20년 신앙생활 했는데도 여전히 이러한 핍박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과연 어떠한지를 스스로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고 있는지,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지, 정말 말씀대로 행하며 빛 가운데 살고 있는지’ 이러한 것들을 돌아보심으로 왜 여러분에게서 아직 어둠의 핍박이 물러가고 있지 않는지 그 이유를 깨달아야 하지요.

그런데 여러분이 영으로 들어갔다 해도 주님의 이름으로 인해 받는 환난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영혼 구원을 하기 위해 받는 환난이지요.
모세,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 등을 비롯한 구약시대의 많은 선지자들과 바울, 베드로, 요한 등 신약시대의 사도들 역시 이러한 환난과 핍박을 받았던 것을 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했고, 하나님으로부터도 사랑받는 사람들이었지만, 하나님을 위해, 주님을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해 기꺼이 숱한 핍박과 환난을 견뎌 냈던 것이지요.

이에 대해 마 5:11-12에는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정녕 마음에서 믿는다면 설령 당시에는 참기 힘든 핍박과 환난이 있다 해도 이를 통해 하늘나라에 상급이 크다는 것을 믿고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가 있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주님의 이름으로 이런저런 환난이나 핍박을 당할 때 어떤 마음이셨습니까?

기뻐하고 즐거워하셨다면 감사하시기 바라고, 혹여 그렇지 못하여 힘들어하고 입술에 불평과 원망이 있었다면 이 시간 그 모든 것을 철저히 회개하시고 이후로는 마음 중심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감사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만이 여러분이 받았던 환난과 핍박에 대해 아버지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 큰 상급과 이 땅에서 축복으로도 갚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인해 받는 환난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주님 까닭에 환난을 당한다고 하면, 분명 참된 영적인 믿음이 있는 분이고, 이 땅이 아닌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잠시 잠깐 살다가 안개와 같이 사라지는 이 땅의 삶이 목적이 아니라 영원한 천국의 삶을 향해 가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도 어떤 목표를 이루려면 많은 인내와 수고를 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대학이나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합니까? 그러한 수고와 인내를 하는 것은 결국 그 이후 주어지는 대가를 바라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어떤 것 하나를 얻기 위해서도 이처럼 수고와 인내가 필요한데 하물며 이 땅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상급을 바라본다면 당연히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환난이나 핍박이 올수록 오히려 더 열심을 내어 달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믿음의 선진들도 이와 같은 믿음과 소망이 있었기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면서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좁은 길을 갔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4:11-13에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고백할 정도로 주님 까닭에 받는 핍박과 환난이 컸지요.

저와 여러분은 롬 5:3-4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말씀한 대로, 주의 이름으로 인해 받는 어떠한 환난 중에도 오직 소망을 이룰 줄 아는 복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시는 그날에 모두가 부활의 첫 열매이신 주님을 따라 아름다운 부활의 열매로 나와짐으로 영원한 천국에서 주시는 참된 행복과 평안의 기쁨을 세세토록 누리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10-07 오후 5:05:50 Posted
2023-12-23 오전 12:02:23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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