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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13) 버가모 교회 (1) [계 2:11-17]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1.11.05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은 모든 시대, 모든 교회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 중에 나오는 “자칭 유대인”이라는 사람들도 주님 이후로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고, 이런 사람들로 인한 사단의 회도 계속 존재해 왔지요. 마귀가 주를 믿는 사람들을 옥에 던져 시험하고 환난을 받게 하는 일들도 계속되어 왔지요.

이러한 현상들은 주님께서 우리를 다시 데리러 오시는 그날까지도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곳, 더욱이 권능의 역사가 나타나는 곳에는 항상 “자칭 유대인”이라는 사람들도 있어서, 이들로 인해 복음전파가 방해를 받게 되며 권능을 베푸는 사람들이 핍박을 받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을 장차 본 교회가 이루어야 할 북한 선교의 사명과 연관지어 설명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이 꼭 본 교회의 사명인 북한 선교에만 국한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주의 복음을 전하고 권능을 나타내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설명한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주의 이름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더욱이 큰 권능의 역사들이 함께 나타나다 보면, 반드시 원수 마귀 사단의 방해도 크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서 늘 깨어 기도하며 믿음으로 승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 있는 모든 교회들의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여러 가지 환난과 핍박이 있었습니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있었고 마귀가 주는 시험, 환난도 있었지요. 그런데 이러한 서머나 교회에 대해 주님께서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권면의 말씀을 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았고 또 앞으로도 마귀로 인해 시험, 환난을 받게 될 그들에게 “내가 너희의 수고를 다 안다 조금만 더 참고 인내해라” 이렇게 위로의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었지요. 오히려 더 충성하되 죽도록 충성하라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서머나 교회가 더 큰 축복과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지요. 서머나 교회가 주의 이름으로 받았던 모든 시험과 환난과 핍박은 반드시 그들에게 축복과 상급이 됩니다. 하지만 단지 시험, 환난과 핍박을 잘 견뎌내고 승리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칭찬이 될 수가 없지요.

칭찬이란, 마땅히 할 바를 했다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해야 할 것 이상으로 넉넉히 넘치도록 이루어 내었을 때 비로소 칭찬 받을 자격이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주의 이름으로 핍박과 환난을 겪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가 더 큰 축복과 상급을 받도록 하시기 위해 위로의 말씀보다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권면의 말씀을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이 단지 눈에 보이는 육적인 충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했습니다.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서 악은 모양이라도 벗어 버림으로 ‘나’라는 것이 없고 오직 내 안에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만이 있어서 말씀대로 온전히 지켜 행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에 담긴 영적인 의미이지요.

육적으로도 충성할 때라야 이것이 진정한 영적인 충성이 되는 것이며 온전한 상급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육적인 충성은 아무리 많이 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온전한 상급이 될 수가 없지요. 영적으로 죽도록 충성한 사람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지는 것이며, 3천층 이상의 천국에도 들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러한 약속의 말씀이 있다 해도 듣는 사람 편에서 그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 10:3-4에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한 대로,

오직 주님께 속한 양만이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알고 그 음성을 따라가게 되어 있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자기 안에 성령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따르게 됩니다.

11절 전반절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셨는데, 여기서 말씀하는 귀란 육의 귀가 아니라 성령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바로 이 영적인 귀를 가져야 합니다. 진실을 들을 수 있고, 참을 분별할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하지요.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대해 알려 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도 들을 수가 있는 것이며 말씀을 들었을 때 그 안에 담긴 영적인 의미도 깨달을 수가 있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는 마음 안에 악이 없는 만큼 더 밝아집니다. 다시 말해, 악이 없는 만큼 더 밝히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가지게 되지요.

반면에 악이 있는 만큼 영적인 귀는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성령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 사단의 음성을 들어가게 되지요. 그러나 아직은 비록 마음에 악이 있어서 성령의 음성을 밝히 듣지 못한다 해도 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예”와 “아멘”으로 순종해 나간다면 신속히 성령의 음성도 밝히 듣는 단계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범사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분별할 수 있는 능(能)이 생기므로 어떠한 시험, 환난과 미혹도 이길 수가 있지요. 또한 세상의 어두움을 물리치고 비진리의 죄악들과 싸워 이길 수가 있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세상의 죄악들을 싸워 버리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가리켜 “이기는 자”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하셨지요.

그러면 “둘째 사망의 해”란 무엇일까요? 둘째 사망이 있다면 첫째 사망도 있다는 말씀인데, 첫째 사망은 바로 사람의 육의 생명이 끝나는 육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둘째 사망이란 바로, 사람의 주인인 영혼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을 말하지요.

계 20:12-15에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세상의 비진리와 죄악 가운데 살아가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안에 살지 못한 사람. 곧, 이기는 자가 되지 못한 사람은 결국 세세토록 꺼지지 않고 구더기도 타죽지 않는 지옥불 속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둘째 사망의 해를 당하게 되지요.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 그래서 시험이 오고 환난이 와도 흔들리지 않고 빛 가운데 꿋꿋이 서서 기도하며 승리한 사람들은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고 영생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 모두가 결코 둘째 사망의 해를 당하지 아니하고 천국에 이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한번 맡겨 주신 영혼을 하나라도 잃지 않고 모두 천국으로 인도하기를 간절히 바라지요.

여러분은 모두가 장차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실 때가 되어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실 때에 든든한 알곡으로 나오셔서 주님과 함께하는 혼인잔치에 기쁨으로 참여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곱 교회 중에 세 번째로 버가모 교회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책망을 모두 들은 교회입니다. 여러 가지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지킨 것에 대해서는 칭찬을 받았으나 그들 중에는 사단의 유혹에 빠져 세상과 짝하고 잘못된 이단 사상에 이끌려 사망의 길로 가는 사람들도 있었기에 이에 대해서는 엄한 책망을 들었지요.

본문 12절에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했습니다. 여기서 ‘좌우에 날선 검’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비유한 것이지요. 히 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십니다. 요 1:14에 보면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으로서, 말씀 자체이신 하나님과 근본 하나이시지요. 그러니 주님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이처럼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역사되어지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어서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책도 살아 역사하는 책은 없고 그 안에 생명이 담겨 있는 책은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만은 우리가 믿고 행할 때 말씀 그대로 살아 역사되며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지요.

예를 들어 시 37:4에 보면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여러분이 이 말씀을 진정 마음에서 믿는다면 이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서 행해 보시기 바랍니다.

히 11:6에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기뻐하시고, 잠 11:20에 행위가 온전한 자를 기뻐하신다 했지요. 잠 12:22에 진실히 행하는 자를 기뻐하신다 했고, 잠 15:8에서는 정직한 자의 기도를 기뻐하신다 했습니다. 이와 같이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이고, 분명 마음의 소원을 들어주시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 영이 죽어 혼 속에 갇혀 있었는데, 주님을 영접하여 성령을 받으면 죽었던 영이 살아나지요.

그리고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혼을 깨뜨려 나가는 만큼, 점점 영은 더 강하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혼을 깨뜨리고 영을 더욱 왕성하게 활동하도록 하시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게 되는데.

관절이란, 육적으로 뼈와 뼈가 맞닿아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 관절을 찔러 쪼갠다는 것일까요?

여기서 말씀하신 관절이란 영적으로 ‘여러분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틀’을 의미합니다. 이 ‘틀’이란 여러분이 지금까지 자라면서 보고 듣고 배운 모든 것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서, 결국 수많은 비진리들이 입력되어 만들어졌지요.

여기서 “자기 의”와 “자기 틀”을 구분해야 합니다. 자기 의란, “자기가 옳다”하는 것이지요. 또 사람이 온전히 진리로 변화되기 전에는 이처럼 자기 보기에 옳다고 하는 “자기 의”가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의”도 결국은 세상으로부터 입력된 비진리들로 인해 생겨났지요.

세상의 비진리를 마치 진리인 것처럼 잘못 알고 가르침 받으며 입력했기 때문에 자기 보기에 옳다고 하는 “자기 의”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그때부터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아서 진리에 어긋나는 “자기 의”를 하나하나 발견하며 버려나가게 되지요.

이렇게 “자기 의”를 발견해 버리고자 해도 그것이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자기 의”가 굳어지면서 “자기 틀”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틀”이란 자기가 옳다고 하는 자기 의가 나름대로 체계가 잡혀 굳어진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격 자체가 틀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 자체가 하나의 틀이 되어 버리기도 하지요. 어떤 사람은 교양이 틀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취향이 틀이 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행동이 틀이 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틀이 만들어질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어떤 사람은 ‘영의 사람은 이런 것이다.’ 하고 나름대로 자기의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틀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자기가 보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 즉 자기 의가 쌓여왔지요.

이러한 자기 의들이 쌓여지다 보면 그것을 바탕으로 “영의 사람”에 대한 자기 틀이 생겨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 의를 강요하여 힘들게 하기도 하고, 자기 틀에 부딪히는 사람에 대해서는 판단하고 정죄하게 되는 것이지요.

간혹 어떤 사람은 비록 자기 안에는 틀이 강하게 굳어져 있음에도 겉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으며 별로 부딪히지도 않는 것 같아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대신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권면에 대해서도 자기 틀로 강하게 막고 있기 때문에 결국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어서 변화되기도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자기 틀은 어떻게든 깨뜨려 버려야 하지요.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때로는 자기 틀이 너무 강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좀처럼 들어갈 틈이 없는 사람도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마음 문을 열게 하셔서 말씀이 들어가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공의에 어긋나기 때문이지요.

누구나 다 하나님께서 강제로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게 하신다면 원수 마귀 사단이 ‘그것은 공의에 맞지 않다’고 당연히 송사하지 않겠습니까? 자기 스스로가 조금이라도 마음의 문을 열고 말씀을 받아들일 때라야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공의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틀이 있음을 인정하고 겸비한 자세로 마음의 문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면 아무리 단단한 틀이라 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뜨려 나갈 수가 있지요.

다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골수를 찔러 쪼깬다 하셨는데, 골수란 육적으로 뼈의 내부에 있는 조직으로서 영적으로는 세미하면서도 뿌리 깊게 박혀 있는 죄악을 의미합니다. 뼛속 깊숙한 곳에 있는 골수와 같이 죄악의 뿌리들도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에까지 뿌리내려 자리 잡고 있지요.

그러므로 골수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마음 속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는 악이며, ‘본성 속의 악’ 또는 ‘기 속의 악’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오직 말씀의 검으로만이 이러한 깊은 악의 모양까지도 찔러 쪼개어 뽑아낼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 하여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능히 관절과 골수까지도 짚어줄 수 있는 깊은 영의 말씀이어야 하며, 그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에게 말씀의 권세가 따라야 하지요. 이처럼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 즉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에 말씀하십니다.

13절 전반절에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했지요.

앞서 서머나 교회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단의 회’에 대해서는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단의 위(位)’란 ‘사단의 회’와는 다르지요. 사단의 위란 ‘사단이 임해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는 육적으로 볼 때 당시 버가모 교회가 위치해 있는 곳이 우상들로 가득 차 있던 상황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버가모는 당시에 소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서 정치와 학문의 중심지였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사치가 난무하고, 많은 우상을 숭배하는 도시였습니다.

로마의 지배 하에서는 황제 숭배도 심했지요. 버가모에는 제우스 신전을 비롯하여 디오니소스 신전, 아데나 신전,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을 비롯하여 로마 황제 숭배를 위한 3개의 거대한 신당 등 갖가지 우상숭배 신전들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중에 특히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은 뱀을 섬기는 신전이었지요. 계 12:9 전반절에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천하를 꾀는 자라” 말씀한 대로 뱀은 곧 사단을 상징하지요.

버가모 교회가 위치해 있던 버가모는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었기에, 주님께서는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신앙생활 하는 버가모 교회를 향해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심하게 핍박을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충성된 증인이었던 안디바도 그곳에서 순교를 당하게 되지요.

13절 후반절에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안디바는 어떤 인물이었고, 과연 어떻게 순교에 이르게 된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시 19:7-9에서 시편기자는 노래하기를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여호와의 율법, 여호와의 증거, 여호와의 교훈, 여호와의 계명,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 여호와의 규례란, 한마디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이어지는 10절 말씀에 보면, 시편기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많은 정금보다도 더 사모되며 먹으면 먹을수록 더 먹고 싶어지는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다 고백하고 있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이처럼 사모하고 마음에서 달게 받는다면 성결되는 것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며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날선 검과 같아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 때 때로는 아픔과 고통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영혼이 죄악으로 인해 고통 받고 관절과 골수가 결국 죄악으로 인해 썩어 들어가면서 받게 될 고통과 아픔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검이 찔러 쪼개는 것은 오히려 시원하고 기쁨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금같이 사모하고 송이꿀처럼 달게 여긴다면 어찌하든 말씀을 더 들으려 하겠고 열심히 받아먹으려 하게 되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먹어서 마음에 양식을 삼아 나갈 때, 마침내 주님을 닮은 온전한 진리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 119:103 말씀처럼,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고백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말씀은 곧 하나님이라 하셨으니 당연히 하나님을 마음 중심에서 사랑하게 되지요.

이러한 여러분이 되셔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풍성한 열매로 맺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11-10 오후 3:37:08 Posted
2023-12-23 오전 12:00:16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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