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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14) 버가모 교회 (2) [계 2:12-17]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1.11.12
버가모 교회는 당시 우상 숭배가 만연하여 “사단의 위”가 있는 곳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사단의 위”란, ‘사단이 임해있는 상태’를 말한다 했지요. 우상을 숭배하는 여러 개의 신전과 황제를 숭배하기 위해 세워진 신전 등 버가모는 그야말로 온통 사단이 주관하는 도시였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바로 이런 곳에 세워졌기에 믿음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주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지요. 주의 이름을 굳게 잡고 승리했던 것입니다. 그 선봉에 섰던 인물이 본문에 나오는 “안디바”이지요.

본문에 보면 주님께서는 안디바에 대해 “내 충성된 증인” 즉, 주님의 충성된 증인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이러한 말을 들었다면 안디바의 신앙이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지요. 주님 앞에서 ‘충성된 증인’이라 인정을 받았다면 그의 충성이 결코 겉으로 보여지는 육적인 충성이 아닌 영적인 충성이었다는 말입니다.

악을 버리고 자기를 비우므로 주님의 마음을 열심히 닮아가면서 동시에 쉽지 않은 환경 가운데서도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생명 다해 감당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지요. 그것도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온갖 죄악들로 관영해 있는 사단의 소굴과 같은 곳에서 생명을 다한 충성으로 주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순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안디바의 순교에 관해 전해지는 이야기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로마 관리가 안디바를 잡아다가 신상 앞에 세워놓고 “안디바야, 로마 황제의 신상에 절을 하라” 하며 강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안디바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으니 그분 외에는 내가 절하지 않겠노라”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이에 로마 관리는 크게 분을 내며 “안디바야, 온 세상이 너를 대항하고 있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했지요. 그러자 안디바는 또 대답하기를 “그렇다면 나 안디바는 온 세상을 대항해서 예수를 만주의 주로 시인하노라” 외쳤습니다.

마침내 화가 머리끝까지 난 로마 관리는 놋가마를 달구고 그 안에 안비다를 집어넣어 죽였다고 하지요. 바로 이런 끔찍한 핍박과 순교의 상황 가운데서도 버가모 교회의 교인들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시험 환난과 핍박이 올수록 더 굳건히 주님의 이름을 붙잡게 됩니다.

반면에 교회에 다닌다 해도 진리를 잘 모르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경우에 대해 이해하지를 못하는 사람이 있지요. “왜 하나님을 잘 믿고 충성했는데도 이렇게 핍박을 당하고 순교해야 되는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고 하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하면서 낙심하며 교회를 떠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뜻과 섭리를 깨닫게 되면 이러한 의문들이 풀리게 되지요. 안디바가 순교했던 버가모 교회를 비롯한 초대교회들에서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든지 기독교가 처음 들어가서 정착하기 위해서는 많은 순교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흥선대원군 때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많은 핍박과 박해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지요.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순교의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기독교인들을 조롱하고 멸시하며 심지어 순교당하는 모습을 즐기기까지 했습니다. 로마의 시민들도 콜로세움 경기장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처음에는 로마인들의 눈에 그러한 기독교인들이 심히도 어리석어 보였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로마인들에게 차츰 이상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들은 어찌하여 죽으면서도 그처럼 기뻐하며 웃을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저들을 저렇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들이 믿는 예수란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가?’ 이러한 생각들이 들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점차 기독교에 대한 호기심으로 발전하였고, 마침내는 기독교에 대해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많은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에 이르러서는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으며 얼마 후 로마의 국교로까지 정해지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방법이 아니고는 그 짧은 시간에 기독교가 급속히 로마를 통해 유럽과 전 세계로 전파될 수 없었겠지요. 우리나라도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의 순교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100년이라는 짧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이처럼 큰 성장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만약 신앙생활을 대충대충 해 오던 사람이 죽음의 두려움 앞에 서게 된다면 과연 당당히 신앙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그 순간에라도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순교한다면 좋겠지만, 평소에 신앙생활을 적당히 하던 사람이라면 죽음의 위협 앞에서 그러한 믿음을 가지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에서 악을 버리지 않은 만큼은 극한 상황이나 죽음의 위협 앞에서 두려움 때문에 신앙이 변개해 버릴 가능성도 커지지요. 그러므로 평소에도 늘 변함없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생명 다해 충성하던 사람이라야 죽음 앞에서도 신앙을 지킬 수 있는 것이며, 악을 버리고 성결을 이룬 만큼 성령의 충만함과 도우심 가운데 순교에도 이를 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안디바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지요. 그리고 그의 순교는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이 더욱 굳건히 주의 이름을 붙잡고 믿음 안에 달려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안디바의 순교를 보면서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은 죽음이 무서워서 숨거나 피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굳게 주의 이름을 붙잡고 믿음으로 승리해 나갈 수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버가모 교회와 성도들의 이러한 모습을 칭찬해 주고 계십니다. 이러한 안디바와 버가모 교회의 믿음 있는 성도들처럼, 어떠한 시험과 환난이 온다 할지라도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며 굳건히 교회를 지키는 충성된 주님의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칭찬을 들었던 버가모 교회가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엄한 책망을 듣게 되지요.

14절에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말씀하십니다.

순교에까지 이르렀던 안디바와 그의 순교를 본받아 믿음을 굳게 지켰던 성도들이 모인 버가모 교회였지만, 그 안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라 말씀하시며 그들의 행위에 대해 엄히 책망하셨지요.

또한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 하시며 이에 대해서도 엄한 경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란 어떤 사람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일까요?

먼저 발람의 교훈이 무엇인지부터 살펴보겠는데, 그러려면 우선 민 22장-24장에 걸쳐 나오는 한 가지 사건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발람은 메소포타미아의 브돌 강변에 사는 브올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과 교통하는 길을 알았던 사람이지요.

이런 발람에게 하루는 모압 임금 발락이 도움을 청해 옵니다. 그 부탁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달라는 것이었지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익히 들어서 알고 있던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땅으로 온다는 소식에 겁을 먹고 이처럼 발람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입니다.

이에 발람이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여쭈자 하나님께서는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 응답해 주십니다. 이러한 응답을 받은 발람은 발락 왕이 보낸 사람들의 청을 거절하지요.

하지만 모압 왕 발락은 또다시 금, 은 보화들과 좋은 것을 가득 준비해서 더 높은 귀인들 편에 발람에게 보냅니다. 그리고는 민 22:17에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케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지요.

그러자 발람 선지자의 마음이 현혹되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물질과 명예에 대한 욕심과 사심이 있으니 이처럼 사단의 시험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모습은 신앙생활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즉 어떠한 시험이 왔을 때 단번에 말씀으로 물리친다면 다시는 그러한 시험이 오지 않을 텐데, 만약 그 마음이 조금만 더 유혹이 오면 흔들릴 수도 있는 마음이라면 사단은 반드시 다시 한번 시험해 옵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을 때는 언젠가 시험이 다시 올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하지요. 나무를 뽑으려고 한번 흔들어 봤을 때 꿈쩍도 하지 않으면 포기하게 되지만 ‘되겠다’ 싶으면 계속 흔들어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와도 뱀이 유혹해 왔을 때 결국 틈을 보였기 때문에 뱀은 그 틈을 노려 계속 미혹해 왔고 마침내 하와를 넘어지게 했던 것입니다. 또한 겉으로는 통과한 것 같아 보여도 마음에서 온전히 통과한 것이 아니라면 이때도 사단은 다시 시험해 올 수가 있지요.

발람도 첫 시험을 통과한 것같이 보였지만, 그 마음에 물질과 명예에 대한 욕심과 사심이 있었기 때문에 두 번째 더 큰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발람이 말로는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기를 “발락이 그 집에 은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했지만, 그 마음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지요.

이미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 하실는지 알아보리라” 하며 여지를 남긴 것입니다. 이러한 발람에게 밤에 하나님이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하십니다.

이 장면을 여러분이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 과정을 육으로만 이해하게 되면 ‘발람이 발락에게 간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이미 발람이 처음 하나님께 여쭈었을 때 하나님께서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두 번째 물어오는 발람에게 발락에게 가도록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발람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이지요. 발람이 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아무리 큰 물질과 명예를 준다 해도 결코 발락에게 가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께 다시 여쭐 마음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민족임을 알고 있으니 이러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저주를 해달라는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지요. 그런데도 발람은 이미 마음이 흔들렸고 이러한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결국 그의 자유의지에 맡기십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설령 발람을 막으신다 해도 나중에 발락의 사자들이 더 큰 재물과 명예를 가지고 와서 발람을 유혹하게 되면 그는 또다시 마음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억지로 막는 것은 공의에 어긋나게 됩니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억지로라도 얼마든지 막으실 수 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공의에 맞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지요.

이렇게 해서 발람은 결국 발락에게로 가게 되는데, 이때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사자를 보내어 발람의 길을 막으시며 심지어 나귀의 입을 열어 말하게 하심으로 발람의 옳지 못한 행동에 대해 깨우쳐 주십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기를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과 함께 가라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말할지니라” 하시며 경계의 말씀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후의 상황은 모압 왕 발락이 원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전개되며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입술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축복하시는 말씀을 주십니다. 이렇게 해서 마치 이 사건은 마무리가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이 사건에 대해 기록한 벧후 2:15-16에 보면 “저희가 바른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유 1:11에는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했지요. 그렇다면 과연 발람이 어떻게 했기에 그에게 이러한 말씀이 주어진 것일까요?

본문에 보면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했는데, 이에 대한 기록이 민 25:1-2에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였다’ 말씀했지요.

발람이 발락에게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서 이와 같은 엄청난 일을 꾸미게 했던 것입니다. 발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꾀어야 그들이 하나님 앞에 분노를 사게 될지를 알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이처럼 악한 궤계를 쓴 것이지요.

우상을 섬기던 모압 사람들은 제사를 지낼 때 제단 앞에 제물을 화려하게 차려놓고는 여자들이 음란한 춤을 춥니다. 발람의 사주를 받은 모압 왕 발락은 이러한 자리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대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 세월 광야 생활로 인해 지쳐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단조로운 생활에만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이방신을 섬기는 제사에 초대받아 그 광경을 보게 되자 갑자기 세상적인 것들이 밀려들어 왔지요.

오늘날처럼 성령의 은혜 가운데 마음에 할례하여 죄악을 벗어 버리던 때도 아니고, 다만 행위적으로 억제하며 죄를 행하지 않으려고 하던 때이므로 그들은 세상적인 것에 신속히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우상의 제물을 먹으며 이방 여인들과 행음하기에 이르고 말았지요.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의 가르침을 좇아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악 가운데로 이끌 수가 있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큰 징계를 받게 됩니다. 민 25:9에 보면 염병이 퍼져 이만 사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죽었지요.

고전 10:8에 보면 이때 죽은 사람의 수를 이만 삼천 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민수기의 기록과 고린도전서의 기록이 이처럼 천 명의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혹시 실수나 착오가 있었던 것일까요? 성경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민수기에 이만 사천 명이라 기록한 것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죽은 모압의 여인들까지 포함한 숫자인 것이고, 반면에 고린도전서에 이만 삼천 명이라 기록한 것은 재앙으로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수를 계수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성경을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풀면 성경이 얼마나 정확한지를 더욱 더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발람의 교훈을 통해 영적으로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진리를 떠나 세상과 타협하는 적당주의 신앙에 대한 경계입니다.

발람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면서도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 결국 사망의 길로 갔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신앙생활 해 나가려는 경향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지요. 결국 하나님보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날에는 딤전 6:10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말씀한 대로, 돈을 사랑하여 세상과 짝하며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주일을 어기거나 하나님의 것인 십일조를 도적질하는 것이지요. 또한 주의 종으로서 당연히 말씀과 기도에 전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물질과 명예를 탐하고 혹은 세상 권세와 짝하는 경우들도 있지요.

마 6:24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말씀한 대로 주의 종은 물론이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만을 좇아 나가야 할 것입니다.

결코 발람과 같이 세상과 타협하는 적당주의 신앙이 있어서는 안 되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의 모습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혹여 발람과 같이 세상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미혹되어 진리를 떠나 있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신지요? 아니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별 생각 없이 시작한 사소한 것이라도 그것이 진리를 떠나 세상과 짝하며 타협하는 것이라면 점점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고 결국 올무에 걸려 사단의 송사거리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적은 누룩이 떡 전체에 퍼지는 것처럼 작은 것이라도 사단의 미혹을 한 가지 받아들이면 그다음에는 둘이 들어오고 둘을 받아들이면 셋, 넷이 찾아와서 마침내 모든 생각과 마음을 빼앗아 가는 것이지요.

한 때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이 육에 물들어 세상으로 타락해 감으로 결국 버림을 받는 것도 볼 수가 있습니다. 바로 버가모 교회 교인들 중에도 이러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안디바가 순교하는 것을 보면서도 믿음에서 떠나지 않고 지켰던 사람도 있었지만, 한편에서는 발람의 행위를 좇아 세상과 타협하며 나가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바로 버가모 교회의 이러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믿는다고 하면서 발람의 행위를 좇는 사람들을 향해 엄히 책망하시며 회개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발람의 교훈을 통해 깨달아야 할 점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딤후 3:1-5에 보면, 마지막 때에 대해 이렇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하셨지요.

성경은 마지막 때가 되면 어떠한 현상들이 나타날지를 경계해 주셨음에도 결국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대로 되어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안타까운 것은 바로 주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러한 모습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것이 하나의 지식으로만 담겨질 뿐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것이지요.

버가모 교회에는 주의 이름을 위해 순교까지 하는 충성된 증인인 안디바와 같은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반면에 발람의 행위를 좇아 세상과 타협하며 세상을 사랑해 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똑같은 환경 가운데 똑같은 말씀을 들으며 신앙생활 하던 버가모 교인들이었지만 그들 안에서는 이처럼 육과 영이 현저히 갈라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워질수록 영은 영으로, 육은 육으로 점점 더 뚜렷이 나눠지는 현상이 나타나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중에는 발람의 행위를 좇았던 버가모 교회의 일부 교인들처럼 마지막이 가까움을 보면서도 세상과 짝하고 사랑하는 분이 결코 한 분도 없기를 부탁드립니다.

사단의 위가 있는 가운데서도 주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순교에까지 이르렀던 충성된 증인 안디바와 같은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칭찬과 상급과 영광을 받아 누리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11-19 오전 10:40:55 Posted
2023-12-23 오전 12:00:16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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