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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15) 버가모 교회 (3) [계 2:12-17]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1.11.19
사단의 위가 있다고 할 정도로 극심한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관영했던 곳인 버가모에 세워진 버가모 교회에는 주님의 충성된 증인으로서 굳건히 믿음을 지키는 성도들도 있었지만, 반면에 적당주의 신앙에 빠져 세상과 짝하고 세상을 사랑하여 결국 사망의 길로 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발람의 행위를 좇고 있음을 깨우쳐 주심으로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경계의 말씀을 주시지요. 이 말씀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여 대충대충 신앙생활 해 나가려는 경향이 갈수록 더해지고 있지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물질과 명예와 권세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일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한번 정했던 마음이 변개해 버리는 것이지요. 정한 마음이 변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바로 발람의 교훈을 통해 깨우쳐야 하는 또 한 가지 교훈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은혜 받고 나면 순간 감사한 마음에 “하나님께 저의 모든 것을 드리겠습니다.”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고백하기도 하지요.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 현실에 어려움이 오게 되면 “꼭 이렇게 힘들게 믿어야 하나?” “남들처럼 편안하게 신앙생활 해도 되지 않나?” 하며 처음 마음이 변하거나 현재의 신앙생활에 대해 회의를 느낍니다.

마치 발람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 줄 알면서도 재차 유혹이 오자 마음이 흔들리고 물질과 명예에 넘어갔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거나 상황이 변했다고 해도 결코 마음이 변개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는 그러한 인물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중에는 이방인이면서도 선한 마음 가운데 변개하지 않는 정한 마음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크게 받았던 여인이 있지요. 바로 구약 <룻기>에 나오는 주인공 룻입니다.

모압 여인이었던 룻은 흉년을 피해 모압 땅으로 온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을 했는데, 자녀도 없는 상태에서 남편이 죽고 말았습니다. 룻에게는 오르바라는 동서가 있었는데, 오르바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 되고 말았지요.

그러던 중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다시 고향인 유다 땅으로 돌아가려고 하면서 홀로된 두 며느리에게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권합니다. 이미 남편은 죽었고 자식도 없으니 굳이 자신들의 고향인 모압지방을 떠나 낯선 유다 땅으로까지 갈 필요가 없다고 하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관대한 처사였던 것입니다.

이때 처음에는 둘 모두가 끝까지 시어머니와 함께하겠다고 했지만, 거듭되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권유에 마침내 룻의 동서인 오르바는 시어머니에게 입을 맞추고 떠나갔지요. 그러나 룻은 달랐습니다.

룻 1:16-17에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고백했던 것입니다.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변함없는 룻의 마음을 잘 나타내 주고 있지요. 사람에 대해서도 이러한 마음을 가진 룻이었으니 더욱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이었겠습니까? 오늘날 과연 사람에 대해서도 이처럼 변함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영’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어제는 저랬다가, 오늘은 이렇게 변하는 것은 결코 진리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며 영이라 할 수가 없지요. 시간이 지나서 언젠가 변한다는 것은 결국 이전에 행했던 것도 참이 아니었음을 스스로가 열매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발람에게도 결코 변개하지 않는 참된 영의 마음이 있었다면 어떠한 유혹과 시험 앞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는 없었겠지요. 그러나 발람은 변개하는 마음 가운데 물질과 명예에 대한 욕심이 발동하여 결국은 모압 왕 발락을 도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우상의 제물을 먹고, 이방여인과 행음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자신만 그릇된 길로 간 것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망의 길로 가도록 만들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발람의 행위를 통한 교훈이 죄악으로 심히도 관영한 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며 신앙생활 해 나가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꼭 필요한 교훈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과 타협하는 적당주의 신앙을 경계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변개치 않는 정한 마음으로 신앙생활 해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버가모 교회에는 발람의 행위를 따르는 사람뿐만 아니라, 니골라당의 행위를 좇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15절에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하셨지요.

니골라당에 대해서는 앞서 에베소 교회에 대한 말씀에서도 설명드렸는데, 그들의 주장은 “육체는 썩어져 없어질 것이고 영은 깨끗하고 성결하여 하늘나라에 가므로 육체로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영은 성결하니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발람의 행위를 좇아 적당주의 신앙에 빠져 세상과 타협하다 보면 차츰 차츰 더 깊이 세상으로 빠지게 되고 결국에는 니골라당의 행위를 좇는 이와 같은 단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니골라당의 행위가 얼마나 진리에 위배된 것인가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요일 1:7만 보아도 “저가(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때만이 예수님의 피로 모든 죄에서 깨끗케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어찌 행함으로 죄를 짓고 어둠의 죄악 가운데 거하면서도 ‘나는 구원받았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니골라당의 행위를 좇는 것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대적하는 이단 사상으로 빠져들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적당주의 신앙으로 빠지다가 자칫 그 정도가 지나치다 보면, 나중에는 ‘죄를 지어도 구원받는다.’고 하는 이단 사상에까지 물들어 버리는 경우도 있지요. 말씀대로 사는 것이 힘들고 세상의 것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 ‘죄를 지어도 구원받는다.’고 하는 이와 같은 달콤한 말에 귀가 솔깃하여 넘어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적당주의 신앙이 점점 더 만연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니골라당의 행위가 나오지 않도록 더더욱 경계해야 하지요. 기도도 적당히 하고, 예배도 적당히 드리고, 말씀도 자신에 맞게 해석해서 적당히 지키며 ‘이 정도는 괜찮겠지’ ‘저건 상관없어’ 이렇게 신앙생활 해 나가는 것이 결국은 니골라당의 행위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입니다.

발람의 행위와 니골라당의 행위와는 적당주의 신앙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면서도 차이점이 있습니다. 발람의 행위는 간단히 말해 두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 하면서도 물질을 사랑하고 명예나 권세와도 타협해 나갑니다.

하나님을 향해 처음 가졌던 마음이 변해가니 다시금 세상을 바라보고 취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라도 깨닫고 돌이키면 다행이지만,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다 보면 나중에는 사단에게 사로잡혀서 죄를 지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들게 됩니다.

결국은 마귀의 주관을 받아 행함으로 이런저런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요. 이렇게 행함으로 죄를 짓게 된다고 해서 그것을 가리켜 무조건 니골라당의 행위이며 이단 사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한 단계에서는 알면서도 죄를 짓기도 하고 그래서 또 회개하고 돌이키는,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결국 죄를 하나하나 벗어나가게 되지요. 니골라당의 행위는 이와는 다릅니다. 행함으로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이 구원과 상관없다고 가르치므로 다른 사람들까지도 미혹하여 함께 사망의 길로 가게 만들기 때문이지요.

벧후 2:1에 보면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말씀한 대로, 이단을 정의하는 가장 큰 기준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이단을 분별하는 기준이지요.

니골라당의 사상은 예수님께서 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지 그 의미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손과 발로 지은 죄, 즉 행함으로 지은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대신 손과 발에 못 박히신 것인데, 행함으로 죄를 지어도 여전히 구원받는다고 주장한다면 결국 피 값으로 우리를 사신 주를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갈 5:13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씀대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는데, 혹여라도 그 자유를 잘못 사용하여 육체의 기회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분별하여 이단사상은 물론이고 어떠한 비진리의 말에도 미혹되지 않을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주님께서는 발람의 행위와 니골라당의 행위를 좇는 사람들을 향해
16절에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발람이 어떻게 죽었는지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요. 수 13:22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도륙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술사 발람도 칼날로 죽였었더라” 하여 이스라엘 자손들을 불의한 길로 이끌었던 발람이 이스라엘 자손들에 의해 죽임 당했음을 기록했습니다.

이런 것처럼 발람과 니골라당의 행위를 좇는 자들을 말씀으로 아무리 권면하고 깨우쳐 주어도 그들이 끝내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을 때는 공의 가운데 시험 환난과 징계가 따르지요.

주님께서 “내 입의 검”이라 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마치 검처럼 찌르듯이 지적해 줌으로써 돌이킬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 뜻이지요.

이렇게 해 주심에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때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더 이상 지켜 주실 수가 없고 결국은 사단의 송사에 내어주시게 됩니다. 그래서 시험 환난을 당하게 되고, 질병과 사고 등의 문제로 고통 받게 되지요. 이때도 여전히 돌이키지 않을 때는 사망의 길로 가고 마는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 즉, 영적으로 귀가 닫힌 사람들입니다.
정녕히 하나님의 자녀라면 잠 22:17에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말씀한 대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 줄 때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때론 말씀이 채찍과 같이 느껴진다 해도 그럴수록 그 말씀을 더 듣고 자신을 깨달아 변화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 말씀이 양약이 되며 골수를 윤택하게 해 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교만하여 높아져 있고 마음에 악으로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나가는 책망과 권면을 들으려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귀는 악한 것을 듣기 원합니다.

렘 7:24에 “그들이 청종치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기의 악한 마음의 꾀와 강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향하고 그 얼굴을 향치 아니하였으며” 했습니다. 또한 잠 17:4에는 “악을 행하는 자는 궤사한 입술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말씀했지요.

더욱이 딤후 4:3-4에는 마지막 때에 대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귀가 가렵다는 것은 비진리의 말과 자기 유익에 맞는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듣고자 하여 참지 못하며 귀가 솔깃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깨달아서 더욱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므로 오직 진리에만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여러분의 발에 등이며, 그 길에 빛이 되어 생명의 길로 인도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가진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7절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이기는 사람이란, 혹여 발람과 니골라당의 행위를 좇던 사람이었다 해도 이제는 그 행위에서 완전히 회개하고 돌이켜 떠난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신다 했는데, 감추었던 만나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지칭하지요.

요 6:49-51에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즉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만나는 단지 육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으므로 먹어도 결국은 죽고 말았지요. 그러나 영적인 만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의 살, 즉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먹는 사람은 영생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 6:54에도 보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하셨지요.

이처럼 먹고 영생할 수 있는 주님의 살, 즉 영적인 만나를 주시겠다, 하신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적당주의 신앙과 이단 사상에 빠져 있던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돌이켰을 때는 이와 같이 영생의 약속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왜 이 만나를 감추었던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고전 2:7-8에 보면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는 것은 이미 만세 전에 정해진 섭리였지만, 때가 이를 때까지는 이 비밀이 그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되기 때문에 감추어져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라 하시되, 감추었던 만나라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다음으로 주님께서는 흰 돌을 주신다 했는데, 그렇다면 흰 돌이란 또 무엇일까요?
고전 10:4에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말씀한 것처럼 반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합니다. 그리고 흰색은 죄와 악이 없다는 뜻이지요.

본문에 말씀하신 흰 돌이란, ‘어둠에 속한 어떠한 죄악도 없으시며 흠도 점도 티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이러한 흰 돌을 주신다는 것은 먼저 주님이 주시는 만나, 즉 진리의 말씀을 먹고 죄악과 싸워 이기며 말씀을 행해 나가므로 믿음이 차츰 성장하게 되어 결국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반석 위에 서게 된다는 뜻입니다.

마 7:24-27에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주시는 흰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어지는 본문 17절 후반절에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하셨지요.

그렇다면 그 돌 위에 기록한 새 이름이 누구일까요?
바로 행 4:11-12에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 이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은 오직 진리의 말씀을 듣고 행하므로 믿음 위에 굳게 서가는 사람만이 알 수가 있지요. 세상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단지 육으로 알 뿐이며 세계 4대 성인 중에 한 분 정도로 아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할 수가 없지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주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입술로만 ‘주여 믿습니다.’ 고백한다고 해서 모두가 주님을 아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을 받기 위해서는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긴다’는 것은 바로 ‘어둠의 죄악들을 싸워 버림으로 진리 안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변함없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지요. 이렇게 행하는 사람만이 감추었던 만나와 그 위에 주님의 이름이 새겨진 흰 돌을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알아 하늘나라 소망 가운데 기쁨과 감사함으로 신앙생활 해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단지 머리에 지식으로만 쌓아놓고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면, 이런 믿음은 성장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마음에 확실히 새겨지지는 않게 되지요. 주님께서 주시는 만나를 늘 사모하는 마음으로 받아서 부지런히 먹고 마음에 양식 삼아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이 여러분 마음에 온전히 새겨짐으로 주님을 분명히 아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다음 시간에는 버가모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담긴 좀 더 깊은 영적인 의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인용해서 해석하는 말씀이 바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입니다. 그렇다면 정녕 마음에서는 원하는데도 행함이 따라주지 않는 것일까요? 이것은 하나의 핑계일 뿐입니다.

진정 마음 중심에서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각 속에서만 원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확실히 정한 것이라면 반드시 행함으로도 나타나게 됩니다. 롬 10:10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씀한 대로, 마음에 믿음과 동시에 입으로 시인하는 행함이 있어야 하지요.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으로서 이러한 죽은 믿음을 가지고는 구원받을 수가 없습니다. 약 2:14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주님으로부터 만나를 받고 흰 돌 위에 새겨진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은 사람은 그 이름을 알고 마음에서 믿기 때문에 말씀대로 행하는 행함이 따르게 됩니다.

이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나도 너를 안다’ 하시며, 요 10:28에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여러분 모두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래서 오직 그분의 음성만을 듣고 따르는 주님의 사랑스러운 양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11-23 오후 10:50:04 Posted
2023-12-23 오전 12:00:16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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