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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16) 버가모 교회 (4) [계 2:12-17]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1.11.26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안다고 하고 믿는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만 해서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요 3:36에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야 영생을 약속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해서 모두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요. ‘믿는다.’고 하는 그 믿음이 참이어야 합니다. 믿음이 참임을 증거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하는 것이지요.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한다” 말씀했는데, “아들을 순종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대로 지켜 행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입술로는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정작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 믿음이라 할 수 없고, 결국 영생을 얻을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에도 보면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했는데, 여기서 “이기는 사람”이란,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말씀대로 순종하여 세상의 죄악을 이기고 승리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의 약속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런 사람만이 그 이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편에서만 ‘나는 주님을 압니다.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말한다고 해서, 그가 진정 주님을 아는 사람은 아니지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도 여러분을 향해‘나도 너를 안다’고 해 주셔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요 10:25-27에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사람에 대해 ‘내가 너를 안다’고 말씀하시는지가 잘 나와 있지요.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며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만이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도 너를 안다’ 하시지요.

또한 요일 1:6-7에“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말씀한 대로, 빛 가운데, 즉 진리 안에 행하는 사람만이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 아버지 하나님도 알고 주님도 아는 사람인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죄에서 깨끗함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직 진리와 선을 말씀하시고,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사와 표적을 행하셨지만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향해 우리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셨지요.

진정 주님의 양이라면 주님의 말씀과 행함을 보고라도 주님을 믿을 것이고, 믿는다면 그 음성을 들으며 따릅니다. 이러한 양들이 주님의 양이요, 우리 주님께서도 이들을 향해 ‘네가 내 양이다. 나도 너를 안다.’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을 알고 주님께서도 여러분을 안다고 하심으로 서로 간에 참된 사귐이 있는 주님의 사랑스러운 양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에 주신 말씀 안에는 지금까지 살펴본 일반적인 의미 외에 특별한 경우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일곱 교회에 주시는 모든 말씀은 어느 시대, 어느 교회에든지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이지만, 그러면서도 특별히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을 깨우쳐 주시는 내용이 담겨 있지요.

첫 번째로 에베소 교회에 주신 말씀은, 오늘날 첫사랑의 뜨거움과 열정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교회가 성장을 하다가 그 처음 행위가 사라지므로 성장이 멈춰 버리고, 심지어 ‘이만큼 이루었다.’ 하는 교만으로 인해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좇기보다는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것을 지키며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 커져 가는 교회들을 향해 깨우쳐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서머나 교회에 주신 말씀은 주의 복음을 전하고 권능을 펼쳐 보이게 되면 나타나게 되는 현상들, 즉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로 인한 훼방과 여러 가지 핍박이나 환난을 당하게 되는 교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었지요.
설령 그러한 환경 가운데 놓여 있다 해도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하신 소망의 약속을 붙잡고 달려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에 주시는 말씀 안에도 특별한 경우에 해당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단 사상에 물들어 버린 일부 교회들을 향해 주시는 깨우침이지요.

겉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고 있지만 정작 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없다거나 아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인하는 사람들, 또는 교묘히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의 말씀을 변질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미혹하여 이단사상에 물들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교회에 다니며 주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진리를 잘 분별하지 못하여 이러한 이단사상에 물들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이단사상에 빠진 사람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자신을 가리켜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라 말씀합니다. 좌우에 날선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잘못된 이단사상을 정확히 비추어 찔러 쪼갬으로 결국 그들 가운데서도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에 이르는 사람들이 나오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설령 그들 중에서 ‘나는 몰랐습니다. 나는 이것이 맞는 줄 알았습니다.’이렇게 변명하는 사람이 있다 해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들의 말과 행위를 비추게 되면 그들이 얼마나 진리에서 벗어났는지가 명백히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는 말씀처럼, 이단은 바로 사단의 역사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장하고 교회라는 형태도 갖추고 있지만,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중에 정말 중요한 핵심을 교묘히 변질시키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단의 기준에 대해 정확히 알고 분별하십니까?

이단은 결코 사람이 세운 기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분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주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자신들이 주장하는 교리나 이론에 맞지 않으면 자기들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기준에 맞추어 상대를 ‘이단이다’, ‘잘못되었다’ 주장하는 일들이 점점 늘어만 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이단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벧후 2:1-3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했지요.

이단을 분별하는 가장 명확한 기준은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사망의 형벌에서부터 구원하여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십니다. 예수님의 보혈로써 우리의 죄를 씻기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셨으니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주님께서 그 보혈로써 사신 것이지요. 이처럼 당신의 피로써 우리를 사신 주를 부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단’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완성시키기 이전에는 이단이라는 표현 자체가 필요 없었지요. 왜냐하면 예수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이며 그리스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으로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그리스도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구세주가 되셨기 때문에 주를 부인하는 것도 이때부터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완성시킨 후에야 “자기들을 사신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이단도 등장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의 4복음서에 이단이라는 단어가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지요.

단, 유대인들이 사도 바울에 대해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때 “이단”이라 표현한 것은 자기를 사신 주를 부인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유대교의 입장에서 볼 때 기독교가 자신들이 믿는 것과 다른 도(道)이기 때문에 이처럼 이단이라 표현한 것입니다.

사전에 보면 이단을 “자기가 믿는 이외의 도”라 정의하고 있는데, 이 정의대로 라면 사실 종교 간에는 자기가 믿는 종교 이 외에 타종교가 다 이단이지요. 기독교 입장에서는 불교나 힌두교, 회교 등이 다 이단이고, 불교 입장에서는 기독교, 힌두교, 회교 등이 다 이단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단의 정의는 기독교 안에서 말하는 ‘이단’에 대한 경우로서 만약 기독교 안에서 누군가를 ‘이단’이라 말하려면 반드시 성경의 기준에 비추어 ‘자기를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때로 가면 갈수록 사신 주를 부인하는 이단사상도 점점 더 늘어갑니다.

마치 자신이 구세주인 것처럼 행세하며, 자신을 통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쳐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이름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처럼 가르치고 미혹해 나가는 사람들이 생겨나지요. 이들은 시간이 지나면 정체를 드러냅니다. 호색하는 것을 좇아 진리의 도를 훼방하며 탐심으로 인해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로부터 재물을 끌어들여 자기들의 이익을 삼고자 하지요.

이 밖에도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여러 가지 불법을 행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여러분이 꼭 아셔야 할 것은 설령 진리에 어긋나는 여러 가지 불법을 행한다 해도 그것만을 가지고 그들을 무조건 이단이라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켜 불법에서 떠나 신속히 진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권면하고 책망하여 깨우쳐 주는 것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설령 진리에 어긋나는 불법을 행한다 해도 그들이 구세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즉 우리를 피로 사신 주를 부인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을 결코 이단이라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행 5:35-39에 보면, 당시 백성들로부터 존경받던 교법사 가말리엘이 그리스도교에 대해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했지요. 그러므로 판단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앞서 살펴본 벧후 2:1을 다시 보면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하여 거짓 선지자와 거짓 선생들이 바로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이는 자들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거짓’이란, 흔히 상대를 속이기 위해 하는 거짓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일 2:22을 보면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거짓말하는 자이며,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라 말씀하지요. 따라서 거짓 선지자나 거짓 선생 역시 자기들을 사신 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이단과 같은 것입니다.

요일 4:1-3 전반절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자는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자로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 곧 삼위일체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면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 받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진리를 깨달아 알며 진리대로 행하는 자가 되어 가지요.

반면에 적그리스도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해 나가는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도를 부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지요.

이처럼 성경에 근거하여 어떤 것이 이단이고 어떤 것이 거짓 선지자요 거짓 선생이며, 적그리스도인지를 잘 분별해서 결코 이단사상에 미혹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단사상에 물든 사람이라도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쳐 줄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 하여 이단과 변론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딛 3:10에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는 말씀처럼, 그들과 변론할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한두 번 훈계하면 됩니다. 그래서 듣고 깨달아 돌이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오히려 멀리하라 말씀하지요.

그것은 그들을 미워하거나 싫어해서가 아니라, 진리 안에 굳게 서지 못한 사람은 자칫 그들과 변론을 하다가 오히려 이단사상에 물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교묘히 변질시켜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기 때문에 어설프게 아는 말씀으로 그들과 변론해서는 안 되지요.

영적인 권세 가운데 말씀의 권세가 따르는 사람이 정확히 진리로 짚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단사상에 한번 물들게 되면 그만큼 깨닫고 돌이키기가 힘들기 때문에 그들과 변론하게 되면 시간만 허비하게 되므로 그들과의 변론을 피하고 멀리하라 하시는 것이지요.

주님께서는 이처럼 이단에 빠진 사람들에게도 어떻게든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발람의 교훈과 니골라당의 교훈을 말씀하시며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깨우쳐 주기 원하셨지요.

발람의 사건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먼저는 세상과 타협하는 적당주의 신앙에 대한 경계이지만, 그런 신앙의 내면에는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가려는 육의 속성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또한 자신은 하나님의 뜻을 좇는다 하지만 정작 자기 마음 안에 있는 육의 속성으로 인해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반대로 간다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사단의 사주를 받아 다른 사람들까지도 진리를 떠나도록 미혹하여 함께 사망의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만으로는 ‘이단사상’과 거리가 멀어 보이지만, 이러한 것을 조금씩 허용해 나갔을 때, 그것이 결국은 진리를 교묘히 변질시켜서 이단사상으로 빠질 수도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들에 대해 엄히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당시에, 진리를 변질시켜 사람들을 미혹해 갔던 대표적 사례인 니골라당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고 계시지요. 니골라당의 사상에 대해서는 앞서 계시록 강해를 통해 몇 차례 말씀드렸는데, 그들은 ‘몸으로는 아무리 죄를 지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허황된 말로써 사람들을 미혹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피 흘려 돌아가신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완전히 부정해 버리는 것으로서, 명백히 진리에 위배되는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세상을 사랑하며 세상과 짝하던 사람들은 그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버리고 말았지요. 마지막 때에는 이러한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기가 쉽지 않지요. 이런 사람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는 정녕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는 권세 있는 생명의 말씀이 필요합니다.

주님을 믿는 것이 무엇이며,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뜻을 밝히 제시해 주어야 하지요. 또한 따르는 권능의 역사들을 통해 증거되는 말씀이 참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설령 이단사상에 물들어 있던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돌이켜 구원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지요. 물론 그런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딤전 2:4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단사상에 빠져 있던 사람일지라도 어찌하든 깨닫고 돌이켜서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멸망으로 가도록 그냥 두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기회를 주셔서라도 살 길을 열어 주시고자 하는 마음이시지요. 이 마지막 때에 성령의 불같은 역사를 통해 그들에게도 기회를 허락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중에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우치는 사람은 그래도 이기는 사람이 되어 주님을 알아 구원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고요. 이런 경우를 가리켜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에 주신 말씀에는 이단 사상에 빠져 정말 구원에 이르기 힘든 경우라도, 주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도우심 가운데 그래도 마음이 선한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주어지게 되어 구원의 은총을 입게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일곱교회 중에 네 번째로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도를 하다 보면 차라리 기독교를 전혀 모르던 사람보다도, 오히려 기독교를 안다 하지만 진리를 모르고 잘못된 사상에 물들어 있거나, 이단사상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더 힘들지요.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하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결국 십자가 못 박아 죽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버가모 교회와 같은 상황에 있는 교회들, 즉 진리를 왜곡하여 잘못된 기독교사상이나 이단사상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바로 전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강력한 권세와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결코 부정하거나 부인할 수 없고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확실한 증거를 함께 보여 주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하지요. 그렇지 못하다면 아무리 오랜 시간과 많은 물질을 투자하여 복음을 전한다 해도 실제적인 열매를 거둘 수가 없습니다.

엡 6:13-17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는 말씀처럼, 영적으로 온전히 무장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들이 많이 나오셔서 말씀의 권세와 능력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창대히 이루어가는 영적 장수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12-01 오후 7:08:55 Posted
2023-11-29 오전 9:28:36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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