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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17) 두아디라 교회 (1) [계 2:18-29]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1.12.03
일곱 교회 중 네 번째로 두아디라 교회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당시 두아디라는 군사와 교통의 요지로 공업 및 상업이 번창했고, 여러 가지 산업마다 노동조합이 있었습니다. 염색 조합, 직조 조합, 제빵 조합, 도기 조합, 제혁 조합, 대장장이 조합 등, 이러한 노동조합은 두아디라 사람들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이 있어서, 자신의 업종과 관련된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으면 생계에 지장이 있는 상황이었지요.

문제는 노동조합마다 각각의 수호신을 섬기고 있어서 노동조합의 활동 자체가 종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노동조합이 모임을 가질 때는 그들의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제사 후에는 그 우상의 제물을 먹는 식사와 각종 음란한 행사들이 이어졌는데, 조합원들은 이 행사에 참석을 해야 했지요.

생계를 위해서는 조합에 가입하지 않을 수 없고, 그렇다고 조합에 가입하면 그들의 의식에 함께해야 하고 이처럼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은 생계를 이어가며 신앙생활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믿음을 온전히 지키기가 쉽지만은 않았으리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요. 오늘날의 성도들 중에도 보면,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세상 가운데 살면서 믿음을 지키는 것이 힘들다 말하는 경우도 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세상과 타협해서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실까요? 지금부터 주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보내신 편지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신 분, 곧 우리 주님의 형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셨지요.

요한계시록 1장에서도 설명했지만, 주님의 눈이 “불꽃같다”는 것은, 모든 어둠을 환하게 밝혀 주며 따사로움을 느끼게 해 준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동시에, 이 불꽃은 모든 죄악을 태워버리는 불꽃이기도 하며 각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여 진리와 비진리를 밝히 분별하는 불꽃이기도 하지요.

주님께서는 이처럼 불꽃같은 눈동자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원수 마귀 사단으로부터 지키시며, 또한 각 사람의 마음과 뜻과 생각도 감찰하십니다. 본문 23절에도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하신 말씀처럼,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심판하시는 주님은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시며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정확하신 분이시지요. 이러한 주님을 가리켜 그 눈이 불꽃같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발을 “빛난 주석 같다”고 했는데, 계 1:15에도 보면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했습니다. 풀무를 사용하여 금, 은, 주석 등을 높은 온도로 가열하면 그 안에 섞여 있던 불순물이 제거 되지요. 그래서 금속의 순도가 더 높아지는 만큼 단련하기 전의 상태보다 가치가 더해지고 그 빛도 더욱 빛나고 아름답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발이 이렇게 단련된 주석같이 깨끗하고 순결하며 빛난다는 말이지요. 발은 사람의 몸에서도 가장 더러운 곳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신발을 신었다고 해도 결국 그 발로 온갖 더러운 것을 밟게 되고, 오늘날과 같은 신발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리 신발을 신었다고 해도 발은 가장 쉽게 더러워지는 부위였지요.

발은 영적으로 가장 더러운 곳을 나타냅니다. 출 3:5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 선지자를 부르실 때도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하나님 앞에 나가기 위해서는 온갖 오물이 묻은 신발을 벗는 것처럼 먼저 세상 죄악에 물들었던 모든 것을 벗어 버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모든 죄는 마음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며 제일 더러운 것도 결국은 마음이지만, 성경에서는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육적으로 제일 더러워지기 쉬운 발에 비유하여 표현하신 것이지요. 사람에게 있어서 발은 이렇게 더러워지기 쉬운 부분이지만, 온전하시고 거룩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발조차도 빛난 주석과 같이 깨끗하며 순결하시다는 사실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성도들에게 우리 주님의 모습을 이처럼 “눈이 불꽃같고 발이 빛난 주석 같다” 말씀하고 계신 것은, 그들에게 우리 주님의 영광과 위엄이 어떠한지를 다시 한 번 깨우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만물을 심판하시며 지극히 거룩하고 영화로우신 주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과 근본 하나이십니다.

사람을 비롯한 어떤 피조물이나 사람이 만들어 낸 어떤 우상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극한 영광을 가진 분이시지요. 바로 불꽃같은 눈과 빛난 주석 같은 발을 가지신 주님의 모습을 통해 이처럼 영광스럽고 엄위하신 주님을 표현한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경배하고 섬겨야 할 분도 오직 주님뿐임을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9절에, 주님께서는 칭찬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하셨지요.

사실 이 말씀 안에는 진짜 칭찬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만을 볼 때는 칭찬받을 만한 모습이라 할 수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마음이며 참 믿음을 가지고 행하는 모습이지요.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설명을 드리도록 하고, 본문에 담긴 일반적인 의미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사업’에 대해 칭찬을 받았는데, 이는 세상에서 이윤을 추구하는 육적인 사업이 아니라 주 안에서의 사업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업을 말씀하는 것이고, 영혼구원과 관련된 모든 일들을 통틀어 ‘주 안에서의 사업’이라 말할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영혼 구원을 위해 전도하고 심방하고 선교활동을 벌이는 것, 구제하는 것, 그리고 여러 가지 사명을 맡아 충성, 봉사하는 것 등이 다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당부드릴 것은 혹여라도 교회 안에서는 세상적인 사업과 관련된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세워진 목적은 오직 영혼구원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이므로 교회의 이름으로 어떤 사업을 이루어 세상 유익을 도모하는 일은 결코 허용해서는 안 되지요.

겉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그 속에 감추어진 진짜 목적은 자기 개인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에 교회 안에서는 세상과 관련된 사업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세상의 사업에 관한 대화를 하는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영적인 사업에만 열심 내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다음으로 두아디라 교회에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요일 4:7-8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말씀한 대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입니다.

주 안에서는 당연히 사랑이 있어야 하되 변함없는 사랑,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 이러한 사랑이 영적인 사랑으로서 참사랑이며 이런 사랑을 행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지요. 두아디라 교회는 성도 간에 이처럼 영적인 사랑을 나누었던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곧 진실과도 직결되는데, 사람의 마음이 거짓되면 다른 사람이 진실을 말해도 잘 믿을 수가 없고, 매사에 의심하게 됩니다. 자신의 마음에 진실이 있을 때라야 상대의 진실도 알아볼 수 있고 믿어 줄 수가 있지요.

신앙 안에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진실이 임한 만큼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히 10:22 후반절에,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라는 말씀처럼, 참마음일 때 온전한 믿음도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두아디라 교회에는 섬김이 있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피조물인 사람들과 같이 종의 형체를 입으셨지요.

막 10:45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말씀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요, 우리를 섬기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요 13:14-15에 보면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도 주님을 본받아 열심히 서로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이와 더불어 성도 간의 섬김 또한 중요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섬김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또는 어떤 사람에게든지 마음 중심에서 나오는 섬김이어야 합니다.

내가 존중받기 위해 겸손한 척하거나 상대를 겉으로만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마음 자체를 낮은 곳에 두고 모든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 진정한 섬김이지요. 이렇게 중심에서 섬기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도 주변사람들로부터 진심 어린 존중과 섬김을 받게 됩니다.

마 20:26에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지요. 그렇다 하여 큰 자가 되기 위한 목적으로 상대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정녕 마음 중심에서 상대를 섬길 때 그러한 사람이 큰 자가 되어 상대로부터도 존경과 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두아디라 교회에는 인내가 있었습니다. 마 7:13-14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말씀하셨지요.

우리가 가는 천국 길은 좁은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버리는 수고도 있어야 하고, 영혼들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금식하고 충성하며 주님의 이름으로 애매히 고난당할 때도 있습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할 때는 이런 일들이 힘들다고 생각될 수도 있고, 쉬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도 있지요.

롬 8:18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하신 말씀처럼, 이 모든 것을 인내하며 나갔을 때 그 열매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다시 힘을 내어 좁은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운동선수나 학생들도 자신들이 목표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얼마나 인내하며 수고해야 합니까? 하물며 여러분이 바라보는 천국에 대한 소망은 운동선수의 금메달이나 세상의 그 어떤 상급과도 가히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영광스럽고 가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믿음의 반석 정도에만 서게 되면 그때부터는 사실 억지로 참고 인내하며 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롬 5:3-4에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는 말씀대로, 그동안 열심히 신앙생활 하며 많은 인내를 쌓아온 만큼, 이제는 마음속에 소망이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으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과 감사가 넘치며 평안한 마음으로 천국을 향한 길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아디라 교회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었는데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 이러한 것들이 있다고 해서 칭찬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칭찬하신 이유는 바로 그들의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이 식어져서 처음 행위를 잃은 것으로 인해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던 것과는 반대로, 두아디라 교회는 오히려 날이 갈수록 처음보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행위가 더 깊어지고 승해졌던 것입니다.

과연 오늘날은 어떤 모습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처음 주님을 영접했을 때는 열심히 주님의 사업에 힘쓰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열심이 식어져 버립니다. 봉사하던 사람이 봉사를 그만두기도 하고, 전도하던 사람이 전도를 게을리 하기도 하며 열심히 심방하던 사람이 심방에 소홀 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렇게 행함이 변질되는 것은 사실 신앙 안에서의 목표가 흐려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쉬지 않으며 항상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사람은 마음속에 천국 새 예루살렘이라는 목표가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힘든 일이 있어도 주저앉지 않고 작은 비진리와도 타협하지 않으며 성결을 향해 철저히 자신을 지켜나갑니다.

그러나 기도를 쉰다든지 어떤 이유로든지 성령의 충만함을 잃거나 다시금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는 그만큼 천국 소망이 흐려지게 되지요. 그러면 그동안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믿음 안에서 열심 내던 여러 가지 행함들도 자연히 식어지고 변개하는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겉으로는 열심히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고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지는 못하는 경우가 있지요. 봉사도 많이 하고, 성도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세상 사람들 앞에서도 선행을 쌓아서 마치 신실한 성도인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마음의 할례는 멈춰 있는 경우입니다.

이럴 때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성령의 충만함이나 천국 소망으로 행한다기보다는 육적인 성실함이나 열심으로 행해 나가는 것이지요. 물론 여러분이 봉사나 성도 간의 교제 등 교회 안에서의 활동에 열심을 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을 찾아 행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것이고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이와 함께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중심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구하며 날마다 더 영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봉사와 헌신과 수고가 참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되지요.

이렇게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는 정체되어 있으면서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행함만 가지고 ‘나는 이렇게 충성하고 있으니까 나는 이렇게 사명을 감당하고 있으니까’ 하며 스스로 위안 삼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지만, 믿음이 없이 행함만 있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아무리 많은 일을 해도 정작 마음에서 죄악을 버려 나가는 노력이 없고 성령의 역사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그것을 정녕 영적인 믿음이요, 영적인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가 없지요. 겉으로는 열심 내는 일꾼인 것 같아도 정작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 말씀을 들으면 믿지도 못하고 순종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깨닫지도 못하고 영적인 깊은 말씀도 깨우치지 못하며 세월이 지나도 육적인 믿음에만 머물러 있게 되지요. 이렇게 육적인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혹 외모를 보는 사람으로부터는 칭찬받을 수 있다 해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변함없는 마음으로 오히려 날이 갈수록 주 안에서 모든 행위가 처음보다 더 많아지므로 항상 칭찬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의 모든 열심과 행함들이 반드시 마음의 할례와 함께 이루어져서 영적인 믿음 가운데 행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보다 나중 행위가 많으므로 칭찬을 들었지만, 이러한 칭찬에 이어 두려운 책망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20절에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했지요.

이세벨이란 여인은 누구일까요? 이세벨은 기원 전 9세기경, 시돈 왕의 딸로서 북이스라엘 아합 왕의 왕비가 된 이방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이스라엘로 시집을 오면서 자기 나라의 우상 신들을 이스라엘에 들여왔는데 이로 인해 아합 왕은 물론 신하와 백성들까지도 우상 숭배에 물들게 되지요.

이렇게 북이스라엘 왕국 전체를 우상 숭배와 행음으로 더럽힌 이세벨은 심지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모두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선지자가 놀라운 권능으로 하늘에서 불을 끌어내리고 오랜 가뭄 속에 비를 내리게도 했지만, 이세벨은 이런 기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은 채 오히려 엘리야를 죽일 생각만 했지요.

이세벨은 아합 왕을 사주하여 각종 술수와 궤계로 악을 발했습니다. 이렇게 악에 악을 쌓아간 이세벨은 결국 엘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이렇게 아합 왕과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하고 악을 행한 것은 이세벨이었지만, 이세벨의 악행에 물들었던 아합과 이스라엘도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아합 왕도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전쟁터에서 비참한 종말을 맞았지요. 또 북이스라엘 왕국도 이세벨로 인해 많은 고난을 당해야 했는데, 삼년 반씩이나 가뭄이 들었던 것도 그들이 이세벨의 음행에 물들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외면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두아디라 교회도 이러한 이세벨과 같은 악의 근원을 교회 안에 용납함으로 죄악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두아디라 교회가 이세벨을 용납하여 악에 물들었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인지, 그리고 그들이 주님으로부터 어떠한 경고의 말씀을 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이어서 증거하겠습니다.

고후 6:14-16에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말씀합니다.

이 밖에도 성경 곳곳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악인과 연합하면 안 된다고 누누이 경계하고 계시지요. 더욱이 교회 안에 세상 풍조를 끌어들이는 일이나 비진리로 성도들을 미혹하는 일들은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결혼이든, 사업이든 어떤 면에서든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과 연합하게 되면 그만큼 자신에게도 시험과 환난의 연단이 따르지요. 아무리 열심을 낸다 해도 여러분과 연결된 사람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가는 사람이라면 자칫 여러분의 믿음도 훼방을 받으며 세상의 미혹에 물들어 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두 마리의 소가 멍에를 같이 할 때 한 마리가 딴 길로 가거나 게으름을 피우게 되면 다른 한 소가 아무리 열심히 일하려 해도 원하는 쪽으로 나갈 수가 없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묶어두게 되면 그만큼 자신의 영혼이 잘되는 것에 지장을 받고 축복을 받는 데에도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주를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조건 배척하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혹여 이세벨과 같은 사람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연합하는 누를 범해서는 안 되지요. 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들이지만 않았어도 아합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처럼 어려움과 재앙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깨달아서 어떤 상황에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며 항상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바르게 행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같은 천국 소망을 가진 믿음의 형제들과 연합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힘과 위로를 나누며, 새 예루살렘까지 힘차게 달려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12-08 오후 4:33:27 Posted
2023-11-29 오전 9:28:36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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