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정기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18) 두아디라 교회 (2) [계 2:18-29]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1.12.17
일곱 교회 중 네 번째 교회인 두아디라 교회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두아디라 교회는 주 안에서의 사업과 사랑, 믿음과 섬김과 인내 등에 대해, 처음보다 나중행위가 많으므로 칭찬을 들었지만, 이러한 칭찬과 함께 두려운 책망의 말씀도 듣게 됩니다.

교회 안에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용납하므로 그로 인해 교회가 죄로 물들었기 때문이지요. 이세벨은 우상을 심히 섬기는 이방 여인으로서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백성들을 미혹하여 우상 숭배를 하게 했고, 여러 가지 악행으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러면 두아디라 교회가 책망 받은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을까요?

20절 후반절에 보면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했습니다.

여기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보면 우상 앞에 제물로 바쳐졌던 음식을 먹는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우상의 제단에 올려졌던 음식을 먹는 것 자체보다는 그 음식을 먹을 때 따르게 되는 여러 가지 범죄들을 경계하는 말씀이지요. 즉 성도들이 이방인들의 종교의식에 동참하여 그들의 우상 숭배를 묵인하거나 동조하게 되고, 더 나아가 우상 숭배자들의 음행에까지 동참하게 되는 것이 더욱 큰 문제였던 것입니다.

행 15장에, 사도회의에서 이방인들 중에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 이 네 가지를 멀리하라 권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때도 우상의 제물을 멀리하라 한 것은 우상의 제물을 가까이 하다 보면 결국 우상 숭배나 그와 관련된 죄에 함께 빠질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딤전 4:4에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말씀처럼, 우상을 경배하는 제사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면, 우상 앞에 놓았던 음식을 먹었다고 해서 그 자체를 꼭 죄라고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설령 우상 앞에 놓았던 음식이라 할지라도 모든 식물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성도가 믿음으로 먹으면 상관이 없지요.

고전 8:7에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했습니다. 곧, 믿음 안에서 담대하지 못한 사람이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죄’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먹게 되면, 이는 스스로 죄라고 생각하는 것을 짐짓 행함으로써 자기 양심을 더럽히게 된다는 뜻이지요.

고전 8:10에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말씀한 대로, 만약 믿음 있는 사람이 우상의 집에 앉아서 함께 먹는 것을 믿음이 약한 사람이 보게 되면‘믿음 있는 저 사람도 우상의 제물을 먹으니 나도 괜찮겠지’하며 자신도 편하게 먹는 경우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진리를 잘 분별하지 못하는 믿음이 약한 사람의 경우에는 믿음으로 먹는 것이 아니므로 양심이 더렵혀질 수가 있고, 자칫하면 더 나아가 우상을 섬기는 일에까지 동참하는 더 큰 죄를 범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우상의 제물로 바쳐졌던 음식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다 해도 만약 그로 인해 믿음이 약한 형제를 실족시킬 수 있다면 자신도 그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합당하지요.

본문에서 말씀하는 행음이나 우상의 제물을 먹는 행위가 실제로 육적인 행함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의미의 행음과 우상의 제물을 나타내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거나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 바로 영적인 의미의 행음입니다.

성도들을 꾀어 세상 쾌락에 빠지게 하고 비진리를 좇게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그들의 행위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고요. 두아디라 교회는 이세벨을 용납함으로, 바로 이러한 영적 음행과 우상 숭배를 교회 안에 받아들이고 말았기에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두아디라에서는 직업마다 노동조합이 발달해 있고, 그러한 노동조합으로 인해 늘 우상 숭배의 유혹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동업자들 모두가 사업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우상 앞에 절을 하는데, 거기에 동참하지 않게 되면 그들로부터 미움을 받거나 핍박을 받을 수도 있지요. 심한 경우는 조합에서 쫓겨나 생계에 위협을 받는 일도 생길 수 있지요.

어떤 사람이 이런 상황에서 고민하는 것을 보고 만약 믿음의 형제라고 하는 사람이 와서 이렇게 미혹을 한다고 합시다. “우상을 마음으로 믿는 것도 아니고 그냥 고개만 한 번 숙여 주면 모두가 편할 텐데, 굳이 그렇게 혼자만 유별나게 굴지 말게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생계에 위협이 되는 상황에서 한 번 절하는 것 정도는 이해해 주시지 않겠는가?” 한다거나,

“그렇게 고집을 피워서 화평을 깨면 주변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여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복음을 전도할 길도 막힌다네.” “주변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한 번쯤은 숙여 주는 지혜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렇게 접근해 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어기도록 미혹할 때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칫하면 넘어가 버릴 수도 있지요.
오늘날도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직장이나 가정에서 우상을 섬기는 자리에 동참하게 되는 경우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제사상에 절할 수 없습니다” 말하게 되지요.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핍박을 하는 경우가 있고, 어떤 사람들은 달콤한 말로 미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상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화합과 친목을 도모하는 방법일 뿐이다” 한다거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우상 숭배가 아니라 우리 민족 고유의 미풍양속이다”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심지어 주의 종이 양 떼들에게 이렇게 잘못된 것을 가르치는 곳도 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 하십니까? 가장 대표적인 계명인 십계명에도 “어떤 피조물의 형상도 우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며 우상 앞에 절하지 말고 섬기지 말라” 하셨고,

고전 10:20-21에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예치 못하리라” 분명히 말씀하셨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 가운데 던져지는 위협 앞에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나님만이 유일신이심을 굳게 믿지만 이번에는 목숨이 달린 문제이니 딱 한 번만 우상 앞에 머리를 숙여도 하나님께서 이해해 주시겠지” 한 것이 아니지요.

하물며 풀무불에 던져지는 것도 아닌데 순간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영적인 행음과 우상의 제물을 먹는 행위에 빠진다면 이는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또한 오늘날에는 교회들이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우상을 섬기는 이방 종교 단체와 교류하며 서로가 축복을 빌어주는 경우들도 있지요.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편협하지 않은 너그러운 마음이고, 인류 전체의 이익, 혹은 국가적인 유익을 구하는 선한 마음인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단체와 손잡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며 이방신의 기념일에 축하 메시지를 보내거나, 성전 안에 우상 숭배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지요.

오늘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일에 앞장서는 안타까운 일들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 안에는 이러한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좀 더 자세히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도들을 미혹한 이세벨은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인”이라 했습니다. 만약 누군가 성도들에게 말하기를 “나와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자, 죄를 짓자.”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은 당연히 그런 사람을 경계하며 멀리하겠지요.

겉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그럴 듯하게 행세하면서 “나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선지자라, 하나님의 종이라” 하며 접근할 때는 정확히 진리로 분별하지 못하여 종종 미혹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선지자라면 그에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가 따라야 합니다.

선과 사랑, 희생과 섬김과 온유함 등 성령의 열매, 빛의 열매가 맺혀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권세와 능력과 권능까지도 나타낼 것입니다. 그러니 참 선지자는 스스로 ‘나는 선지자다’ 하지 않아도 성령의 역사를 받는 사람들은 그의 열매를 통해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아볼 수가 있지요.

반면에 이세벨처럼 자칭 선지자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진리로 분별해 보면 그 정체가 드러납니다. 신 18:22에 보면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했지요.

자칭 선지자라 하는 거짓 선지자는 악한 말로 남을 비방하고 판단 정죄하며 거짓말을 지어내어 자기 유익을 구하며 성도들을 이간질하는 등, 갖가지 궤계와 술수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성도들을 힘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도들을 가르칠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 육적인 것들을 심어 주며 자신을 육으로 따르도록 만들어 갑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람과 함께하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진리에 함께 물들고 말지요.

교회 안에서는 이세벨과 같은 사람을 결코 용납하지 말아야 하고, 거짓 선지자의 꼬임에 미혹되어 함께 죄를 짓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주의 종의 입장에서는 순종하지 않는 양 떼, 목자를 시험하는 양 떼라도 사랑으로 품고 인내하며 이끌어 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 사단의 회를 용납하거나, 성도들을 미혹하여 사망으로 이끄는 이세벨과 같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마음대로 활동하게 놔두는 것은 사랑이 아님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이세벨과 같이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설명을 했지요.

마 18:15-17에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하셨습니다.

정해진 절차에 따라 행해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상대가 회개할 때는 용서하며 과거의 잘못을 덮어 주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끝까지 돌이키지 않을 때는 그런 사람이 교회를 훼방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도록 방치해서는 안 되지요. 이때도 반드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던” 주님의 마음으로 행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 21절에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하는도다” 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잘못을 했을 때 즉시로 징계가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요. 단에서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든 자신의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깨우칠 기회를 주시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마음을 강퍅케 하여 돌이키지 않으면 이제 사단의 송사에 의해 징계가 임하게 됩니다. 이때도 처음부터 혹독한 징계가 임하는 것은 아니지요. 가벼운 징계부터 시작되는데, 이렇게 징계를 받고도 돌이키지 않으면 점점 더 강한 징계가 오게 됩니다.

출애굽 당시 애굽에 내린 열 재앙도 그러했지요. 처음에는 애굽 전역의 하수가 피로 변하여 물을 마실 수 없게 되었고, 온 천지와 집 안과 심지어 음식 그릇 안에까지 개구리가 들끓는 재앙이 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재앙들도 물론 너무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그래도 그 피해가 치명적이라거나 복구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는 아니었지요.

이 정도에서 바로 왕이 돌이켰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재앙이 창궐하면 잠시 돌이키는 듯하다가 재앙이 거두어지면 다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으로 점차 더 큰 재앙을 당하게 됩니다. 독종이나 악질 등 질병의 재앙을 맞기도 하고 우박의 재앙과 메뚜기의 재앙을 당하므로 재산에도 치명적인 손실을 입게 되지요.

이런 재앙들을 만나고도 돌이키지 않으니 마침내는 바로 왕의 장자로부터 신하와 백성과 종들, 심지어 생축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자가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도 회개하지 않으니 결국 홍해 바다 속으로 수장되고 말았지요.

잠 3:11에 보면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행하면 무엇보다 먼저 성령께서 탄식하시므로 마음에서 평안이 사라지고 곤고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저런 일들을 통해 깨우칠 수 있는 신호를 보내 주시지요. 그래도 깨우치지 못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징계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질병이나 사고로 몸이 상하기도 하고, 가족의 문제나 직장의 문제가 생길 수도 있으며 재산의 손실을 입기도 하지요.

이런 징계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라 하신 말씀처럼,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이기에 바른길로 가서 축복 속에 거하게 하시려고 진리에서 벗어났을 때는 징계도 허락하시는 것이지요.

잘못을 했는데도 징계가 없다면, 이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오히려 이것이 더욱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잘못으로 징계를 받는 경우, 두려움으로 낙심하거나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중심에서 감사함으로 받고 신속히 돌이키는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환난과 재앙에서 건져 주시며 다시 평안과 지킴 가운데 거하게 하시지요. 그러나 끝까지 돌이키지 않는 경우에는 결국 이 땅에서도 자신이 행한 대로 거두게 되며 마지막 날에는 영원한 사망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본문 22절에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고” 했습니다.

여기서 침상에 던진다는 것은 회개의 기회를 얻고도 돌이키지 않은 악한 자에 대하여 주님께서 심히 진노하시므로 그를 큰 시험 환난 가운데 던지신다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침상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평안함과 포근함을 느끼며, 그 안에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지요. 본문에 말씀하는 침상은 영적으로 결코 편안하고 안락한 휴식의 장소가 아니라 이세벨이 가증한 일들을 행하는 장소요, 하나님으로부터 외면 받고 버림받은 곳을 의미합니다.

때로는 죄를 범하는 사람에게 지금 당장 재앙이 임하지 않으므로 죄를 짓고도 여전히 복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다면 저렇게 악을 행하는 사람을 왜 그냥 두시는가?” 불평하는 경우도 있지요.

시 37:1-2에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했고, 10절에는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말씀합니다.

잠시 동안은 악인이 아무리 형통하게 보이고 침상에 누운 것처럼 평안하게 보인다 해도 정해진 공의의 선을 넘게 되면 순식간에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혹여 살아 있는 동안에는 심판이 임하지 않고 평안하고 형통하게만 사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이때도 결국은 영원한 사망의 지옥불에 던져지므로 결코 형통하다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이세벨이 던져진 침상이 평안해 보이고 그럴 듯하게 보이므로 미혹되어 그 안에서 함께 범죄하는 경우가 있지요. 이런 사람들에 대해 “또 그로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치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진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큰 환난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구원받지 못하여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최후의 징계를 의미하기도 하고, 또는 살아서 주님의 재림을 맞는 사람에게는 들림 받지 못하고 7년 대환난에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한 결과가 단순히 개인적인 재앙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더 크게 나타나는 경우들이 있지요.
첫 번째로 나라의 머리가 범죄하므로 온 나라에 시험 환난이 임하는 경우가 있고,
두 번째로 교회의 머리인 주의 종이 바로 서지 못하므로 교회 전체가 당하는 시험 환난이 있습니다.
세 번째로는 한 가정이나 개인이 잘못할 때 가족 전체나 개인에게 임하는 시험 환난이 있지요.

이세벨의 경우는 이 세 가지 모두에 해당되었는데, 나라의 국모(國母)로 세워진 이세벨이 남편인 왕과 신하들과 백성들까지 범죄하게 만들었고, 또한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나라의 종교 지도자 자리에 세웠습니다. 그러니 온 나라에 3년 반이나 비가 오지 않는 큰 재앙이 임했던 것이고, 이세벨 개인도 결국은 비극적이고 참혹한 종말을 맞고 말았지요.

우리나라 역사를 보아도 국가적으로 큰 환난이 있었을 때는 같은 원리가 적용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치인들 사이에 당파싸움이 극에 달했고 이로 인해 백성들 사이에도 갈등이 팽배해지며 민심이 흉흉해지는 등 혼란과 악으로 가득했습니다. 나라의 전쟁이나 커다란 재앙들도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공의의 법칙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사람이 맡은 직분이 높아지고 머리가 될수록 그에 따르는 책임도 커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머리된 사람이 깨어 있고, 기도할 때 그 조직이 잘되는 것이며 설령 시험이 왔다 해도 신속히 물러가게 되지요.

23절에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꽃같은 눈동자로 모든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감찰하시므로 누구도 결코 속일 수가 없습니다. 이세벨과 같은 사람이나 그 행위에 동참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공의 가운데 심판이 임하게 되지요. ‘그 자녀를 죽이리라’는 경계의 말씀도 공의 가운데 임하게 될 징계나 재앙을 말씀합니다.

그렇다 하여 이것이 꼭 자녀에게 어떤 징계나 재앙이 임한다는 의미만은 아니지요. 자신이 범한 죄의 열매로, 남편이나 아내 등 사랑하는 가족에게 재앙이 임할 수도 있고 혹은 생활고나 질병 등의 고통으로 임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함은 물론이고 마음과 뜻과 생각까지도 살피시는 분임을 모든 사람이 분명히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꼭 이처럼 재앙을 당하고 나서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돼서는 안 됩니다.

혹여 하나님 앞에 합하지 못한 비진리의 마음이나 행동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녀를 위해 여러 가지로 역사하셔서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요. 단에서 증거되는 말씀을 통해 정확히 지적해 주실 때도 있고,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듣다가 자신을 발견하고 깨우치게 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때로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사람의 입술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해주실 때도 있지요. 여러분이 들을 영적 귀를 가지고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감찰하시며 사랑하는 자녀들을 세밀히 간섭해 주시는 분임을 언제나 느낄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잠 15:3에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했고, 시 139:3에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하신 말씀대로이지요. 그러므로 오직 빛 가운데 행하셔서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밝히 아시는 하나님 앞에 담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4절부터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의 재판에서는 재판관의 잘못된 판결로 인해 애매히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죄를 짓고도 형벌을 피해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재판관이 아무리 공정하게 판결하고자 해도 사람의 깊은 마음속까지 살필 수는 없으므로 겉으로 보이는 행위만을 가지고 판결하게 되지요.

잠 16:2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하신 말씀대로, 전지전능 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언행을 감찰하실 뿐 아니라 생각과 마음, 깊은 중심까지 밝히 보십니다.

각 사람에 대해 감찰하신 내용을 천사들로 하여금 낱낱이 기록하게 하시며 마지막 심판 날에는 그 기록에 따라 선악 간에 모든 행한 대로 갚아 주시지요. 순간에 감정을 품고 노려보는 눈동자 하나까지도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가 없으며, 반면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행한 작은 선행도 심판 날에는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이러한 사실을 마음에 믿는다면 여러분의 말과 행동은 어떠해야 하겠고, 마음과 생각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담당하는 천사들이 여러분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하늘나라 책에는 과연 어떠한 내용이 적혀 있을까요?

벧전 3:10-12에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사소한 말 한마디, 행동 하나라도 날마다 선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가는 빛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부터는 장차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천사들이 여러분에 대해 기록하는 책에 오직 선한 말과 행실과 생각과 마음만이 가득 넘치도록 기록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도, 장차 하늘나라에서도 여러분에게 축복과 상급과 영광으로 갚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12-23 오전 1:38:45 Posted
2023-11-24 오후 3:20:18 Updated

다음 글 2차 영혼육 (8) 이전글
이전 글 주님의 마음 다음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