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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20) 두아디라 교회 (4) [계 2:18-29]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1.14
지난 시간까지는 주님께서 두아디라 교회에 주신 말씀에 담긴 일반적인 의미를 말씀드렸습니다. 이 시간에는 이 말씀에 담긴 또 다른 영적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 안에는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섬긴다 하면서도, 진리를 왜곡하여 우상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을 깨우쳐 주시기 위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특정 종교를 판단하고 비판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이 말씀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설명 드리려는 것이니 이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분들은 진리로 잘 분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 19절에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하신 말씀을 일반적으로는 두아디라 교회에 대한 주님의 칭찬으로 설명을 하는데,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칭찬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의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에 대해 그들의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다는 것은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행함적인 면에 있어서 많아졌다는 의미일 뿐이지요. 따라서 이 말씀은 칭찬의 의미가 아니라, 그들이 겉으로 보이기 위해 행하는 일들이 ‘정녕 진실한 것이었는가.’를 깨우쳐 주시기 위해 하신 권면의 말씀입니다.

외형적으로는 구제 사업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선한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그 규모도 점점 더 커지고는 있지만, 그 목적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물론 그들의 선한 사업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렇게 행해 나가는 목적이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선한 모습을 보여 주며 좋은 이미지로 만들어 가기 위한 것은 없었는지 스스로 돌아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약 2:15-17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말씀한 대로 주 안에서 섬기고 구제하며 선을 베푸는 일들은 분명히 사랑이고 믿음이 있다는 증거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행함의 증거만을 가지고는 그것이 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요일 3:18에 보면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는 말씀처럼, 말과 혀로만 사랑한다 해서도 안 되지만, 행함 역시 반드시 진실함이 동반되어야 하지요.

겉으로는 아무리 크게 주 안에서의 사업을 벌이고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의 행함을 내보여도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것이 아니라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구제로 섬기는 일도 ‘우리는 이렇게 구제하며 선한 일을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은 옳은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며 믿음이다.’ 하며 자기만족이나 드러내려는 마음으로 행한다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참된 것이 될 수 없다는 말이지요.

더욱이 자신들의 이미지를 좋게 만들어 가기 위해 즉, 남들에게 좋게 보여지기 위한 목적으로 이런저런 일들을 행해 나간다면 그것은 자칫 외식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이러한 외식적인 행함은 결국 알맹이 없는 신앙으로 변질되고 말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마음의 거룩함이며 거룩한 마음의 진실을 담아 행하는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거룩함과 진실함이라는 알맹이가 빠진 신앙은 점차 형식주의 신앙으로 흘러가게 되고 온갖 장로의 유전들을 만들어서 성도들을 힘들게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되지요.

기독교 역사를 보면, 초대교회의 순수했던 신앙이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형식에 매여 가므로 점차 변질되어 갔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16세기에는 참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개혁운동이 강력하게 일어났던 것이지요.

이 시간에 특정한 사람들에 대해 어떤 판단이나 비판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진리인 성경말씀에 따라 신앙생활 한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틀에 매여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종교의 현지 토착화라는 명목 아래 현지의 토착신앙이나 풍습까지도 자신들의 종교 안에 포용해 나가는 정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허용하고 있지요.

물론 조상의 은혜를 기리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명분 아래 제사 의식을 허용한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어기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고전 10:20에 보면 분명히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말씀하고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신 하나님 한분을 섬기며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이러한 일들을 허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 나오고, 그 여인으로 인해 함께 음행에 동참한 사람들도 나오지요. 이런 것처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사람이 잘못된 비진리를 가지고 사람들을 현혹하여 함께 비진리 가운데로 빠져가는 현상들이 오늘날에도 나타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일부러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해도,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함으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까지 하고 마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여 낳았던 여인인 동정녀 마리아를 경배하며 섬기는 것도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난 대표적인 현상입니다.

그들은 물론 동정녀 마리아를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구세주 예수님을 낳은 분으로서 그분에게 최상급의 공경의 예를 갖추어 섬겨드리는 것뿐이라고 말을 하지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진리를 분별 못하는 사람들이 피조물의 형상 앞에 절하며 복을 빌도록 잘못 인도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진리는 과연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그 해답을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을 통해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요 19:26-27에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했지요.

이때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향해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신 것은 곁에 선 제자 요한을 가리켜 아들이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리켜 “아들”이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또한 예수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를 향해 “어머니여” 하신 것이 아니라 “여자여” 하고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 대해 공경해 드리려는 마음이 없으셔서 이처럼 “여자여”라고 부르셨겠습니까? 그럼에도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르신 기록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도 예수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를 향해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하시며 “여자여” 하고 부르셨지요. 성경에 동정녀 마리아를 “어머니” 또는 “모친”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입장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을 기록한 제자들의 입장에서 그처럼 기록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는 동정녀 마리아가 결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가 없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근본 하나이시며,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는 어머니가 있을 수 없지요.

출 3:14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라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 하나님을 낳은 것도 아니요 하나님을 만들어 낸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피조물인 동정녀 마리아에게 “어머니”라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육적으로도,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없지요. 사람이 잉태될 때는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결합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경우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기는 했지만, 마리아의 난자를 통해 예수님이 잉태되신 것은 아니지요.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을 빌려 나셨을 뿐, 잉태될 때는 근본 하나님과 하나이신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셨습니다.

비유를 들어, 과학기술이 아주 발달하여 설령 아이를 인큐베이터 같은 곳에서 잉태시켜 자라게 할 수 있다고 해도 인큐베이터가 아기의 부모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잉태하기 위해 정자와 난자를 제공한 사람들이 되는 것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근본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동정녀 마리아를 예수님의 어머니라 부르는 것도 맞지 않는 것이지요.

진리인 성경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정확하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출 20:3-5절 전반절에 보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하셨지요.

스스로 계신 하나님 외에는 어떤 피조물도 그 형상을 만들어 경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스스로 계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만을 섬기며 경배하기를 원하시지요.

이러한 진리에 비추어 보면, 사람의 생각 가운데 만들어 놓은 잘못된 틀로 인해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하루 빨리 깨닫고 돌이켜야 하지 않겠는지요? 그렇지 않으면 점점 더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사단의 송사거리만 만들어 주게 되지요. 마음에서는 우상을 섬기려는 것이 아니었고, 실제로는 진리를 잘 몰라서 그런 것이라 할지라도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우상을 섬긴 것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계속해서 진리를 어기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도, 성령의 도우심도 받을 수 없고 점차 사단의 주관 아래로 빠져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도 어찌하든 은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해 이 마지막 때에 성령의 불같은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할 수 있는 길을 예비해 두셨지요. 선한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사랑하며 진리를 좇기 원하는 사람들은 참된 진리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증거를 보았을 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참이 무엇인지를 인정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때도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말씀한 대로, 결국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게 되지요. 지금 동정녀 마리아를 경배하며 잘못 섬기고 있는 분야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했지만, 사실 다른 여러 분야에서도 진리에 위배되는 모습들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술과 담배 자체가 악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발생되어지는 수많은 죄악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진리로 분별해 볼 수가 있지요.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령 술에 취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데, 세상의 육적인 술에 취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죄악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한다면 그 말이 과연 진실한 것이겠는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실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짐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죄의 담이 허물어졌음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직접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었을 때처럼, 여전히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 즉, 대리인을 통해 하나님께 대신 고해서 사함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주님께서 이것을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이후에 신약에 와서 누군가 그렇게 대신 죄를 고하고 사함을 받도록 가르친 사도나 주님의 제자가 있었습니까? 더욱이 사람이 단지 입술로 ‘당신의 죄가 사해졌습니다.’ 말한다 해서 그것을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지요.

대신 다른 사람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올려줄 수는 있지만, 그 기도를 들으시고 죄를 사해 주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은 요 20:23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말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물으실 수가 있지요.

물론 이 말씀대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 사도의 경우는 그가 성령을 속이려 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저주하자 그들의 혼이 떠났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 하여 이 말씀이 아무에게나 다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요. 그만큼 하나님과 주님과 하나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보장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 하여 이런 사람이 기도해 주면 무조건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의미도 아니지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말씀처럼,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받고 보장받는 사람의 기도는 그만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끌어내릴 수가 있지만, 그렇다 해도 결국 죄 사함의 열쇠는 본인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일 1:7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설령 어떤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이제는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켜서 빛 가운데 행해 나갈 때라야 예수님의 보혈로 모든 죄를 사함 받게 되는 것이지요.

본인이 여전히 회개하여 돌이키지 않으며 어둠 가운데 거하고 있다면 이때는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받고 보장받는 사람이 대신 하나님 앞에 기도해 주어도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공의에 전혀 맞지가 않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해서 용서가 된다면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살면서 죄를 짓다가 하나님의 사람 앞에 나와 기도해 달라고 할 것이고, 그래서 죄를 용서받으면 또 나가서 죄를 짓고 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어찌 공의이겠고 참된 인간 경작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받고 보장받는 사람이 대신 하나님께 중보의 기도를 올려줄 때라도 반드시 먼저 본인이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지요. 그럴 때는 설령 너무나 용서받기 힘든 죄라 할지라도 그래서 본인의 기도만으로는 용서받기 힘든 경우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보장하시는 사람을 보시고 긍휼히 여겨 주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우와 죄를 지은 사람이 대리자에게 죄를 고하고 그러면 그 대리자가 대신 하나님께 기도해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게 해 준다는 주장과는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잘못된 교리를 따라 행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록 그 행함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것인 줄 알면서도 일부러 그렇게 행했다거나 악한 마음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이해해 주시려고 하지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향해 본문 24절 후반절에는,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다른 짐으로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을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이렇게 사단의 깊은 속임수인 줄 알지 못해서 그러한 행함 가운데 빠졌던 사람들은, 그 행함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면 이제는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어떤 짐을 지우지 않으시겠다는 뜻이지요.

단, 사단의 깊은 속임수임을 알면서도 행했다거나 고질적으로 마음을 내어주어 행했던 사람은 설령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킨다 해도 거기에 따르는 보응이 있게 됩니다. 우상 숭배를 심하게 했던 사람들도 그들이 주 안에 들어왔다 해서 그것으로 과거의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이 아니라, 이전에 행했던 것에 대해 공의 가운데 보응이 따르는 것을 보게 되지요. 물론 이것도 온전케 하여 더 좋은 것을 주시려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본문에 말씀하는 경우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였고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다 하였지만, 그럼에도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러한 잘못된 행함 가운데 있었던 것이므로 이들의 경우는 우상을 심하게 숭배하거나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행했던 경우와는 달리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으로 과거의 행함을 용서하시고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묻지 않으시겠다는 말입니다.

이들에게도 주님께서는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당부하십니다. 이제 주님의 은혜 가운데 얻은 구원의 기회를 다시는 놓치는 일이 없도록 주님 맞는 그날까지 변개치 않고 달려가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그렇게 했을 때만이 그들에게도 마침내 구원의 은혜가 주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어찌하든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 진리로 깨우쳐 주시고 또 깨우쳐 주시며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안타깝게 외치고 계시지요.

더욱이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 하였고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다 하면서도 사단의 속임수에 빠져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경우라면 하나님께서는 더더욱 안타까운 심정으로 그들을 향해 구원의 길을 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에 성령의 불같은 역사가 필요한 것이고, 그 역사를 베풀기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해 두실 수밖에 없으신 것이지요.

다음 시간부터는 주님으로부터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말씀을 들었던 사데 교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점차 성장을 하듯이, 신앙 안에서도 영적인 성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성장이라는 것이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행함적인 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요.

물론 신앙이 성장할수록 겉으로 보여지는 행함도 날이 갈수록 더해져야겠지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영적인 성장은 바로 마음에 성결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행함적인 면에 있어서 충성, 봉사한다 할지라도 마음에 성결을 이루어 가는 영적인 성장이 없다면 그것은 바른 신앙생활이라 할 수가 없지요.

마치 어린아이가 세월이 흐르면서 육적인 성장과 정신적인 성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하듯이, 신앙 안에서도 행함적인 면에서의 성장은 물론이고 반드시 내면의 영적인 성장이 함께 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바로 신앙의 영적인 정체 현상이 나타나면서 이런저런 문제들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이지요.

어떤 질병이 오고, 가정에 문제가 생기며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이유는, 물론 하나님과의 사이에 죄의 담으로 인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신앙의 정체 현상으로 인해 오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욥기의 욥도 바로 행함적인 신앙의 차원에 머물러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영적인 신앙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연단을 허락하셔서 그가 마침내는 영적인 신앙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인도해 가셨지요.

욥기의 욥도 바로 행함적인 신앙의 차원에 머물러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영적인 신앙으로 발전하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연단을 허락하셔서 그가 마침내는 영적인 신앙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인도해 가셨지요.

이러한 사실을 잘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어떠한 죄의 담도 없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신앙의 영적인 정체가 없이 날마다 성장을 이루어 나가는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엡 4:13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하신 말씀처럼 여러분의 신앙이 신속히 성장하여 영으로, 온 영으로 이루어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1-19 오후 7:14:47 Posted
2023-11-24 오후 3:20:18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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