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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22) 사데 교회 (2), 일곱 영 (2) [계 3:1-6]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2.04
사데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살아있는 것 같지만, 즉, 교회에도 열심히 나오며 신앙생활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자와 다름없다는 뜻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아무리 겉으로는 그럴 듯하게 보여도 속마음과 중심이 변하지 않고 교회에 왔다 갔다만 하는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일곱 영의 측정을 통해 각 사람의 신앙을 세세히 측정하시므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한 판단을 내리실 수가 있는 것이지요. 또한 일곱 영의 측정을 통해 ‘응답해 주실지, 아닐지’에 대해서 결정을 하시게 됩니다.

일곱 영이 측정하는 분야는 신앙의 전반적인 분야를 함축한 것으로서, 여러분이 늘 자신을 점검하며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하는 분야들이지요.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해서 일곱 영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일곱 영이라고 하니까 ‘영이 일곱이 있나 보다’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일곱 영이라 하여, 첫 번째 영, 두 번째 영, … 일곱 번째 영 이런 식으로 영이 일곱이 있다는 뜻이 아니지요. 일곱은 완전수로서 영이신 하나님의 완전성을 나타내는 것이며, 일곱 영은 곧 하나님의 마음을 뜻합니다.

모든 것을 감찰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조금의 실수나 착오도 없이 정확하고 완벽하게 감찰한다는 의미에서 바로 일곱 영이라 말씀하는 것이지요. 일곱 영은 마치 응답의 저울과 같다 했습니다. 일곱 영은 응답의 가부를 결정하기 위해 크게 일곱 가지 분야를 측정합니다.

물론 일곱 영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과 행함 등 모든 면을 다 측정하지만, 그것을 크게 일곱 가지 분야로 나눌 수가 있지요. 그 일곱 가지 분야는 믿음, 기도, 기쁨, 감사, 계명 지킴, 충성, 사랑인데, 지난 시간에는 이 중에서 믿음과 기도에 대해 설명을 드렸고, 오늘은 나머지 다섯 가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셋째로, 일곱 영은 기쁨을 측정합니다.

기쁨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영원한 사망인 지옥에서 건지셨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에 가게 되었는데, 그 기쁨을 무엇과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주님을 믿기 전에는 세상의 온갖 문제들로 인해 눈물, 슬픔, 아픔, 고통, 사망 등에 쌓여 기쁨이 없는 삶을 살다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천국 소망 가운데 살아가게 되니 당연히 기쁨이 넘치게 되지요.

어떤 분들은 ‘저는 하나님을 믿기 전에도 기뻐하면서 살았습니다.’ 말할 수 있지만, 과연 그 기쁨이 참이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뻐할 만한 일이 있을 때만 기뻐하는 기쁨이었고,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기쁨이었지요.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이 찾아오면 이내 사라져 버리는 기쁨이었지요.

내 유익에 맞고, 내 마음에 맞으며 나 보기에 좋을 때라야 나오는 조건적인 기쁨이었으며, 언젠가는 변하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누리는 영적인 기쁨은 상황과 조건에 상관없이 항상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고 내세에 대한 소망이 가득하기에 마음 중심에서 항상 샘솟는 기쁨이지요. 물론 때를 따라 영적으로 영혼들에 대한 애통이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애통은 있지만, 마음 깊은 곳의 기쁨은 끊이지 않고 솟아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사자밥이 되면서도 기뻐하며 순교에 이를 수 있었던 것처럼, 기쁨이야 말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된 징표요, 그리스도인을 구별하는 향기가 됩니다. 또한 기쁨은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기도와 간구에 응답 주실 것을 믿기에 현실의 어떠한 상황에도 상관없이 기쁨이 나올 수가 있는 것이지요.

간혹 믿음이 있다 하고 직분을 가진 분들 중에도 영적인 기쁨을 잃은 분들이 있습니다. 겉모습은 웃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마음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 느껴지지 않지요.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열심이 사라지고 미지근한 신앙으로 식어버렸거나, 성령의 소욕을 좇지 못하고 세상을 취하여 하나님과의 사이에 담을 만들게 되면 영적인 기쁨도 마음에서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은 믿음도 있고, 직분도 있으며 그만큼 머리가 되었음에도 어떤 응답을 받기 위해 기도할 때 오랫동안 응답이 지체되는 것을 봅니다. 믿음의 분량에 맞는 기쁨의 열매가 없으니 일곱 영이 기쁨을 측정할 때 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기쁨은 곧 평안으로부터 나옵니다. 여러분이 아버지 하나님과 화평하고 주변의 사람들과 화평하며 여러분 자신과도 화평을 이루게 되면 여러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평안을 주시므로 당연히 기쁨이 샘솟듯 솟아나게 되지요. 그리고 적어도 아버지 하나님과만 화평해도 즉, 어떤 죄의 담을 만들지 않고 있다면 마음 중심에서 기쁨이 떠나지는 않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아 마음에 기쁨이 없는 분이 있다면, 혹은 기쁨이 사라져가는 분이 있다면 ‘여러분이 지금 아버지 하나님과의 사이에 혹여 죄의 담을 만들어 놓고 있지 않은가?’ 점검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죄의 담이 있다면 신속히 헐어서 잃었던 기쁨을 다시 회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넷째로, 일곱 영이 측정하는 것은 감사입니다.

기쁨과 함께 감사 역시 하나님의 자녀 된 증거로 나타나는 열매이지요. 조금의 믿음이라도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도 중심에서 감사의 고백이 나옵니다. 구원의 은혜 한 가지만 생각해도, 감사가 나올 수밖에 없지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 받을 영혼이 값없이 주신 주님의 구속의 은혜로 영생을 얻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었으니 어찌 중심의 감사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 삶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가시니 이를 믿는다면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설령 감사의 조건이 없다 해도 감사해야 할 텐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믿음도 더 커지고, 그래서 감사의 조건도 점점 많아진다면 당연히 날이 갈수록 더 감사하는 것이지요.

만약 감사할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고 어려운 일이나 힘든 상황이 되었을 때는 입술에서 원망과 불평이 나온다면 이는 믿음 있는 사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당장 눈앞에는 어려움이 있다 해도 오직 하나님을 믿으므로 감사의 기도를 드릴 때, 그 감사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셔서 결국은 좋은 열매로 거두게 하시지요.

저는 주님을 영접한 이후로 한 번도 마음에 감사가 사라져 본 적이 없습니다. 육적인 환경만을 볼 때는 여전히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 때도, 또한 교회를 개척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여러 가지 연단을 통과해 올 때도, 오히려 감사의 마음은 날마다 더해 갔지요. 이렇게 감사의 마음을 향으로 올려드릴 때,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셔서 기도하는 것마다 신속하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빌 4:6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하신 말씀에 의지하여 항상 감사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범사에 감사함으로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야 말로 감사의 조건을 끌어내릴 줄 아는 지혜롭고 복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섯째로 일곱 영은 계명, 곧 십계명을 측정합니다.

성경에 보면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지키라, 버리라, 이렇게 명해 놓으신 말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십계명은, 성경의 모든 계명들을 함축하고 있지요. 이 십계명을 우리가 지키고 있는지, 일곱 영의 측정에 합격점을 받을 때 응답도 신속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 말씀대로 살지도 않고,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범죄 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게 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수는 없는 것이지요.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요일 5:3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했습니다. 육으로도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상대가 원하는 것은 다해 주고 싶어 하지요.

영적으로도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계명들을 기쁨으로 지킬 것이요,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십계명을 항상 마음에 두고 지켜 나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계명들을 똑같이 지킨다 해도 과연 어떠한 마음으로 지키느냐 하는 점이지요.

물론 초신자나 새신자는 계명을 지키는 자체를 믿음으로 인정해 주시지만, 만약 신앙생활도 오래하고 믿음도 있다는 사람이 억지로 힘들어 하면서 어쩔 수 없이 계명을 지킨다거나 사람들의 눈치를 봐서 지킨다면 이는 참된 사랑도 아니고 참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하신 대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계명들을 지키되 결코 무겁거나 부담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억지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기쁘고 가벼운 마음으로 즐겨 행하는 것이 참이지요.

고후 9:7에도 보면, 예물을 드림에 있어서도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리 많은 예물을 드린다 해도 만약 아까워하는 마음이나 어쩔 수 없이 드리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찌 그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 될 수 있겠는지요?

살전 2:8에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는 말씀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주는 것을 즐겨하게 됩니다. 하물며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데 있어서 어찌 즐겨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들을 지켜 나가되 반드시 즐겨 행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자녀라는 증거가 되어 일곱 영의 측정을 통해 신속하게 응답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일곱 영은 충성을 측정합니다.

주의 종은 주의 종으로서, 장로는 장로로서, 권사는 권사로서, 집사는 집사로서, 얼마나 그 직분에 합당하게 충성하는지를 측정하지요. 또한 기관장으로서, 구역장으로서, 이외의 모든 사명자로서 맡은 바 사명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며 충성해 나가는지를 측정하게 됩니다.

꼭 하나님의 일에만 충성한다고 해서 그것을 온전한 충성이라 하지는 않지요. 교회에서 받은 사명뿐만 아니라 가정에서의 충성, 일터에서의 충성을 포함하여 온 집에 충성하는 것이 온전한 충성입니다.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자녀로서, 부모로서, 이처럼 각자 주어진 모든 위치에서 진리로 충성해 나가야 하는 것이지요.

물론 주의 일과 세상 일 중에 하나만 택해야 할 때,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주의 일을 택하겠지만, 세상일은 소홀히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이것도 저것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진리 안에서 합당하게 충성해 나가야 합니다.

때때로 신앙의 연수가 오래되고 직분 있는 일꾼인데도 사업터에 큰 문제가 생기거나 중한 질병이 생긴 경우가 있습니다. 이분들이 고백하기를 예전에는 뜨겁게 사명 감당하며 충성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명을 놓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사업 확장, 가정의 핍박, 기타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사명에 대한 충성이 식어져 버렸다는 것이지요.

온전한 충성은 변함없는 충성이라는 사실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충만할 때만 열심히 충성하고 충만함이 떨어지면 충성하지 않는다거나 처음의 열심과 뜨거움이 점차 식어져 간다면 이런 사람은 일곱 영이 측정하는 충성의 분야에서 합격을 받을 수가 없지요.

충성 분야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영적인 충성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여지는 행위로만이 아니라, 반드시 마음의 할례를 함께해 나가는 영적인 충성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믿음이 더 커지고 신앙의 연륜이 더 많아질수록 당연히 처음 행위보다 나중 행위가 많아야 하겠지만,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충성의 행위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정녕 아버지 하나님을 닮은 성결되고 거룩한 자녀들이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을 담아 드리는 영적인 충성을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행위적인 충성만을 원하셨다면 하나님 곁에는 얼마든지 충성할 수 있는 수많은 천군과 천사들이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값을 주고 고용한 사람에게 섬김 받는 것과 여러분이 낳은 자녀가 여러분을 진정 사랑하여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섬겨 주는 것과는 전혀 느낌이 다르지 않겠는지요? 이처럼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온전한 충성이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을 닮아 가면서 아버지 하나님을 중심에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생명을 드리기까지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로 일곱 영은 사랑을 측정합니다.

사랑은 앞에서 살펴본 여섯 가지 전체를 온전하게 엮는 띠와 같은 역할을 하며, 우리가 이 땅에서 경작 받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지으시고 이 땅에 사람을 경작하시는 이유가 바로 하나님과 영원히 사랑을 주고받을 참 자녀를 얻기 위한 것이었지요. 아무리 기도하고, 충성하며,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한다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모든 것이 참된 의미가 있습니다.

고전 13:1-3에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도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시키셨으며,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하셨지요. 그러므로 결국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며 기뻐하고 감사하고 계명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모든 것도 결국은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 22:37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말씀한 대로,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능히 일곱 영이 측정하는 모든 분야에서 합격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지요.

우리의 신앙생활은 믿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믿음이 있을 때만이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고 기도도 할 수 있고 계명도 지켜 나가며, 충성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 가운데 행해 나감으로써 날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되어 가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장 먼저 일곱 영이 측정하는 것도 믿음입니다. 믿음을 비롯하여 다른 모든 것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결과적으로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에 맨 마지막으로 사랑을 측정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명을 받아 열심히 충성하는 것 같았는데, 마음에 안 맞는 일이 있다고 해서 쉬어 버린다면 이것은 사랑으로 행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열심히 기도한다 하지만 형제를 사랑하지 못해서 미워하고 시기 질투한다면 이 기도 또한 사랑으로 한 것이 아니지요.

믿음 있는 직분자요 일꾼으로 사명을 감당한다 해도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며 판단 정죄한다면 이 또한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을 이룰 때라야 모든 것을 온전히 이루었다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기쁘시게 하므로 신속하게 응답받을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곱 영을 어떤 전자제품에 비유를 할 때, 일곱 영이 측정하는 각각의 분야는 전자제품의 부품에 해당합니다. 만약 부속품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스위치를 켜도 작동을 하지 않는 것처럼, 일곱 영이 측정하는 분야들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부족하게 되면 응답이 주어질 수가 없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일곱 영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신앙이 점검되셨습니까?

어떤 사람은 초신자인데도 “나는 기도하는 대로 척척 응답받는다.”고 간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반면에 일꾼이고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 해도 응답이 더딘 경우가 있지요. 초신자보다 믿음이 적은 것도 아니고 충성도, 기도도 더 많이 하는데도 막상 응답이 더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일곱 영의 측정을 달리 하시기 때문입니다.

초신자가 첫사랑이 뜨겁고 성령이 충만하므로, 자기 믿음의 분량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고 충성하며 기쁨과 감사가 충만해서 달려갈 때는 일곱 영이 측정하는 기준을 쉽게 충족시킬 수 있지요. 자신의 믿음의 단계에서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행하고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대로 쉽게 응답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서, 여섯 살쯤 된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도와드리고 싶어서 집 안을 청소한다거나 설거지를 해 놓는다면 부모님이 얼마나 기특하게 여기겠는지요? “사랑해요.” 하고 재롱을 부리며 안겨 오면 부모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비록 어른이 한 것처럼 깨끗하게 청소하지는 못했다 해도 그 마음과 행함이 너무나 기특하므로, 부모님 편에서도 아이가 기뻐할 만한 것을 해 주려고 할 것입니다.

반면에 스무 살이 넘어 장성한 자녀가 부모님을 도와 어떤 일을 했을 때는 여섯 살 난 자녀가 하는 것과는 다르지요. 비록 여섯 살 난 자녀보다는 일을 더 잘해 놓았다 해도 부모님 입장에서는 자녀의 나이에 맞는 수준에서 일의 열매를 볼 것이고, 자녀가 정녕 우러나는 마음에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 했는지를 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이 크고 직분과 사명이 클수록 하나님 앞에 당연히 더 많은 것을 드려야 합니다. 일곱 영이 측정하는 모든 분야에 있어서도 자신의 믿음의 분량에 맞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요. 그렇게 할 때는 믿음의 분량이 큰 만큼 하나님의 역사들도 더 크게 체험하여 영광을 돌릴 수가 있는 것이지요. 똑같은 믿음의 분량에서도 어떤 문제를 놓고 기도하느냐에 따라서도 응답받기 위한 기준이 달라진다 했습니다.

예를 들어 큰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는 그만큼 큰 믿음과 함께 높은 기준을 통과해야 하지요. 그러니 평소보다 더 큰 믿음을 내보여야 하고, 기쁨과 감사와 기도 등의 분야에 있어서도 평소보다 더 승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깨달아서 여러분이 간구하고 기도하는 것에 응답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해답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일곱 영이 측정하는 분야에서 부족한 것이 있다면 신속히 그것을 채워서 일곱 영의 측정에 합격할 수 있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날마다 더 온전한 기준에 이르심으로 이제는 마음에 품기만 해도 응답받는, 축복된 단계에까지 이르는 성도님들이 계속해서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2-09 오후 2:12:23 Posted
2023-11-10 오전 10:14:01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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