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정기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23) 사데 교회 (3) [계 3:1-6]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2.11
지난 두 시간에 걸쳐 일곱 영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모든 인생들을 두루 감찰하시며 그들의 믿음과 신앙상태를 측정하기 위해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일곱 영이라 했지요. 일곱 영은 사람의 모든 행위와 중심까지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하게 측정해서 기도와 간구에 대한 응답의 여부를 결정합니다.

이러한 일곱 영은 아버지 하나님과 근본 하나이신 주님의 마음이기도 하기에 주님께서도 일곱 영을 통해 감찰하시지요.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살아 있는 것 같으나 실상은 죽은 것과 같았던 사데 교회를 향해 엄한 책망의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일곱 별을 가지셨다 했는데, 여기서 일곱 별이란 ‘신‧구약 시대를 통틀어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우신 모든 주의 종’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능력의 팔로 붙드시며 친히 주관하여 사용하시는 주의 종이지요.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종들의 입술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전하게 하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들을 나타내 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진리의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사데 교회는 이처럼 일곱 영을 통해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일곱 별을 통해 주의 자녀들을 인도해 가시는 주님의 뜻과는 다른 길로 가고 있었지요.

당시에 ‘사데’란 곳은 염직공업 등이 발달하여 물질적으로는 부요하였으나, 사치와 부도덕이 만연하였고 거대한 신전이 있는 이방 종교 숭배의 중심지였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 놓여있던 사데 교회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지 못했고, 주님으로부터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책망을 듣기에 이르렀지요.

우리가 꽃꽂이를 해 놓은 꽃들을 보면 그 꽃들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이미 생명의 근원인 뿌리를 떠났기 때문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듯이 사데 교회 성도들의 신앙 역시 사람이 보기에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어도 주님의 정확한 잣대로 측정하실 때는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말씀의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한마디로, 사데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영이 죽게 되었고 그 후손은 모두가 다 영이 죽어 있었는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성령을 받은 사람은 죽었던 영이 살아나게 되었지요.

이렇게 영이 살아난 사람은 비록 육체에서 영혼이 떠나는 육의 죽음을 맞았다 해도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데 교회는 ‘죽었다’는 말씀을 들었으니 이는 곧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시지요. 비록 스스로는 ‘믿음이 있다’고 하나 그 믿음이 죽은 믿음이며, 이러한 죽은 믿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조차 없다는 사실입니다.

약 2:14에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했고, 약 2:17에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말씀했지요. 이 말씀대로, 진정 믿음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게 되어 있는데, 이러한 행함은 없이 입술로만 믿는다고 하는 것은 지식적인 믿음, 곧 죽은 믿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전 12:14에 보면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했고, 고후 5:10에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선악 간에 반드시 심판이 있음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게 되지요.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알면서도 행치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2:19에 보면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했지요. 여기서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했는데, 이는 귀신들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예수 그리스도도 알기 때문에 그 권세 앞에서 두려워한다는 뜻입니다.

성경 곳곳에는 귀신 들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소리치는 장면들이 나오지요. 눅 8:27-28에도 보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자 그 앞에 엎드려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하며 외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앞에서 떨며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도 안다고 해서 “귀신도 예수님을 믿는다.”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믿는다 해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할 리도 없고 착하고 선하게 사는 것도 아니지요. 그러니 이는 믿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아는 것이며, 이처럼 아는 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적인 지식을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도 그 아는 말씀대로 지켜 행하지 않으면 이는 ‘참으로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참 믿음에는 반드시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행함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면서도 정작 행함이 따르지 않는다면 이는 알고도 행치 않는 것이니 차라리 몰라서 행치 않는 사람보다 오히려 그 죄가 더 크다는 것도 알아야 하지요. 눅 12:47-48에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 3:1에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말씀하지요. 이처럼 머리로는 말씀을 알면서 정작 행함은 따르지 않는 쭉정이 신자가 오늘날 점점 많아지는 것을 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어떻게 말씀대로 지키면서 살 수 있는가’ 하며 세상과 타협해 버리지요.

겉으로는 신앙생활 하는 것 같지만 그 삶은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일이면 성경, 찬송을 가지고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립니다. 십일조와 감사헌금도 드리며 찬양하고 기도한다고 하지요.

그런데 교회를 나와 세상의 삶으로 돌아가면 남이 욕할 때 똑같이 욕하고, 혈기 내면 같이 혈기 내며 세상 사람들과 같이 세상 오락을 즐기고 짝합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지도 않지요. 세상에 빠져 자기 좋을 대로 세상을 취해 나갑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이 비록 교회에 다닌다 해도 어찌 그가 믿음 있다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약 2:20에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말씀하신 것처럼, 그 믿음이라는 것이 결국 헛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 믿는다’ 했던 것이 다 헛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함 있는 믿음에 대해 강조한다 하여 무조건 행함만을 가지고 믿음의 판단 기준으로 삼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행함 있는 믿음’에서 말하는 ‘행함’이란 ‘마음이 함께 실린 행함’을 말하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진리로 일구어진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행함을 의미합니다.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열심히 영으로 일굴 것이고, 이렇게 영으로 일구어진 마음으로부터 행함이 나와야 한다는 뜻이지요. 이처럼 마음의 할례를 통해 영으로 이룬 마음이 담긴 행함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행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행함 자체가 아니라 행함에 담긴 마음이며 마음을 영으로 일구게 되면 자연히 행함도 따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마음을 영으로 일구려고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마음을 영으로 일구지도 못했으니 결국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며 설령 행한다 해도 그것은 마음은 없는 형식적인 행함 곧 외식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행함’ 자체만은 얼마든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 외식할 수도 있고 들어서 아는 지식을 가지고 흉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 6:1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말씀한 대로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하는 행함이 있지요.

사 29:13에 보면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말씀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할 수 있고 찬양을 부를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경외함은 없이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 받아서 행하는 경우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이런 행함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을 영으로 일구지 못한 채, 들어서 아는 지식으로만 행하는 것이나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함은, 결국 때가 되면 드러나게 되어 있고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없는 행함에 대해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부모님을 대할 때도 부모님을 사랑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효의 행함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물질을 많이 가졌다고 해서 더 효도를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물질은 적게 가졌다 해도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효도하는 경우가 있지요.

때로는 행함은 크게 나타내 보이지만, 정작 그 안에 담겨야 할 마음은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무적으로나 또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하는 형식적인 행함의 효도라면 이때는 비록 아무리 큰 행함을 보인다 해도 그것을 참 효도라 말할 수는 없겠지요.

만약 부모님의 입장에서 그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겉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마음에 놀랄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모든 인생의 속 중심까지 아시는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행함과 함께 반드시 그 안에 담긴 마음을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음이 있다고 할 때는, 반드시 마음이 담긴 행함으로써 그 사랑과 믿음을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일곱 영을 통해 측정하시고, 불꽃같은 눈동자로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말씀한 대로, 우리의 행위뿐만 아니라 깊은 마음속의 세미한 것까지도 다 아시지요. 그러니 여러분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나름대로 행한다 했지만 마음을 실어 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면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을 구하시고요.

‘내 믿음이 과연 참이었는가?’ ‘나는 과연 진실한 행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내보였는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모습과 마음을 낱낱이 고백하고 회개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과 축복의 기회를 꼭 붙잡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계 3:2)

먼저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는 말씀은 입술로는 믿는다고 하지만 죽은 믿음으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 이제는 진리 안에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그동안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던 죽은 믿음에서 벗어나 이제는 참 믿음, 산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 하셨는데, 이는 믿는다 하면서도 세상에 빠져 세상을 취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이는 역으로 말하자면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으라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 3:3)

이어지는 3절 전반절에 보면 어떻게 해야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을 수 있는지 그 해답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동안 이 제단을 통해 어떻게 가르침을 받고, 어떤 말씀들을 들어오셨는지 이 시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본 제단을 통해 듣고 배운 말씀은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아버지 하나님을 닮으라는 성결의 말씀이었습니다.

레 11:45에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신약, 벧전 1:16에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말씀한 대로,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 거룩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또 가르쳤지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경 66권 말씀에 담긴 영적인 의미들을 풀어 주며 각종 예배 말씀뿐만 아니라, 수많은 교육을 통해 영적으로 가르치고 또 가르쳐 왔습니다. 또한 선만을 가르쳤고 진리만을 가르쳤지요.

여러분은 스스로를 생각해 보실 때 과연 가르침 받고 들은 말씀들을 얼마나 지켜 행하고 있습니까?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으셨는지요? 하라는 것은 하셨는지요? 또 버리라는 것은 버리고, 지키라는 것은 지키셨습니까?

빌 4:9에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여러분이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해 나가기만 하면 평강의 하나님께서 늘 여러분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지키어 회개하라”는 말씀대로 이제부터라도 회개하고 돌이켜 말씀대로 지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단지 입술로만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안 그러겠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지요. 잘못 행하던 것을 그만두고 완전히 돌이켜서 바른길로 행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 회개하여 돌이켰다면 그 마음을 변함없이 지켜 나가야 하지요.

여러분이 회개할 때 꼭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처음에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으며 성령 받은 첫사랑의 뜨거움은 어떠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큰 은혜를 받고 첫사랑이 충만했었는데 과연 그 첫사랑의 아름다움을 소중히 지키며 간직해 왔는가 하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 처음 마음과 행위를 지키지 못하여 다시금 세상으로 빠지기도 하고 신앙생활을 한다 하면서도 세상 사람과 구별되지 않는 모습 가운데 살아가는 경우들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제는 그러한 모든 것들도 다 회개하여 예전의 충만함과 뜨거움을 회복하시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지켜 행함으로 신랑 되신 주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3절 후반절에 보면 회개하지 않고 끝내 돌이키지 않은 사람의 결과와 주님의 재림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요.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말씀합니다.

말씀을 통해, 부족함을 지적받고 자신의 모습을 깨달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만약 주님께서 갑자기 오셨을 때, 미처 죄 가운데서 돌이키지 못한 상태라면 그래서 주님 맞을 준비가 안 된 상태라면 어떠한 결과가 벌어지겠습니까?

신랑 되신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주님께서 도적같이 임하시게 되면 그때는 이미 늦은 것이지요. 도적이 어떤 곳에 들어갑니까? 문단속도 제대로 잘하지 않은 채 잠들어 있는 사람이 있는 곳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깨어서 문단속을 든든히 한 곳에는 도적이 몰래 들어올 수가 없지요. 마찬가지로 신랑 맞을 준비를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도적같이 임하시지만 기름 준비를 잘하여 신랑 맞을 준비를 한 사람에게는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리던 신랑으로 오십니다.

살전 5:4-5에도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했지요. 어두움에 있지 않고 빛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도적같이 임하지 않으실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마 24:36에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말씀한 대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그날과 그때는 오직 아버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 ‘언제쯤인가’ 정도는 알 수 있게 기록해 놓았지요. ‘그날과 그때’를 모른다고 했지, ‘언제쯤 정도 된다.’는 것도 알 수 없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여인이 해산할 때, 몇 날 몇 시에 아이가 태어날 지는 정확히 몰라도 몇 월, 그중에서도 초순인지 중순인지 하순인지 어느 때쯤인지는 예측할 수가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다가 산모에게 진통이 시작되면 ‘이제 해산의 때가 곧 임박했구나.’ 하고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주님 오실 때도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때의 징조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벧전 4:7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말씀대로 정녕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깨어 기도하여 신랑 되신 주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에 주시는 말씀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교회들과 대부분의 성도들이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고 깨달아 보아야 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 땅에 주의 이름으로 세워진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졌다는 사실이 아니라, 주님께서 “살았다” 인정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있고 스스로 성도라 부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중에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나타내 보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습니다. 주일에는 교회에도 나가고 십일조도 하며 이런 직분도 맡아서 감당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행함은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정녕 주님을 닮은 거룩한 마음으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온전한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자녀의 모습이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매일 매일 여러분의 삶 속에서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진실한 행함으로 최선을 다하셔서 재림의 주님을 맞기에 부족함이 없는 슬기로운 신부들로 다 준비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2-16 오전 10:19:24 Posted
2023-11-10 오전 10:14:01 Updated

다음 글 3차 영혼육 (2) 이전글
이전 글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다음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