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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25) 빌라델비아 교회 (1) [계 3:7-13]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2.25
오늘부터는 일곱 교회 중에서 여섯 번째로 빌라델비아 교회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신 말씀은 본 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그것은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한 말씀의 내용이 본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도 일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척 이듬해인 1983년, 광주 기도원에서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서는 ‘본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셨고, 친히 주관하고 계시며, 주님 오실 때까지 친히 역사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지요. 그러시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보장하시고 함께하신다는 것을 확증할 수 있도록 본 교회에 대한 말씀이 성경, 요한계시록에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관한 말씀이지요. 물론 어느 교회든지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신 주님의 말씀을 자신들의 말씀으로 받아서 목표 삼아 달려간다면 얼마든지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신 축복이 그 교회에도 임할 수가 있습니다.

본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걸어왔던 길을 목표 삼고 그렇게 행해 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 말씀이 본 교회를 향한 섭리와 일치한다는 것인지’ 지금부터 증거해 드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하나 깨닫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듣는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도 여러분의 교회가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주님으로부터 칭찬받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달아서, 진정 주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칭찬받는 아름다운 교회들로 나와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7절에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은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서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말은 ‘사람보다 뛰어나며 죄에 물들지 않고 흠과 점과 티가 없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므로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뜻입니다.

원래 이 ‘거룩하다’라는 표현은 사람에게 쓸 수 있는 표현은 아니지요. 거룩하고 진실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하지만, 비록 사람이라 할지라도 죄로 인해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은 사람에게는 거룩하다는 표현을 쓸 수가 있지요.

요 10:34-36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란 진리의 말씀대로 지키고 행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뜻하며,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은 신이라 인정해 주신다는 것이지요. 물론 ‘신이라 인정해 주신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하나님과 같은 신의 차원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온전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의 사람이요, 진리의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신다는 뜻이지요.

따라서 ‘거룩하다’라는 말이 원래는 사람에게 쓸 수 없는 말이지만, 벧전 1:16에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 하나님을 닮아 진리 안에 온전히 살아가는 자녀가 있다면,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므로 ‘거룩하다’ 말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자녀들도 거룩해지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지요.

예수님께서도 마 5:48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요 17:17-19에서는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말씀하고 계시지요.

다음으로 우리 주님을 ‘진실하다’ 했는데, ‘진실’은 ‘거짓이 없는 참’을 뜻합니다. 변개하지 않는 것,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것, 거짓말하거나 속이지 않는 것, 약속을 어기지 않는 것, 간사하지 않은 것, 변질되지 않는 것 등 이러한 모든 것이 진실이지요.

진실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진실해졌을 때 믿음도 주어지며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살아 역사하여 하나님의 능력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곧 진실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여러분에게 진실이 임한 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이 주어지고 진실을 분별할 수 있으므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진실하지 못할 때는 말씀에 대한 의심도 생길 수 있고 때로는 여러 가지 비진리에 유혹될 수도 있지요. 고전 2:13에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이, 진실 역시 진실한 마음일 때만이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진실하지 못한 마음으로는 결코 진실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진실을 사모하고 이루셔서 ‘참’을 알아 볼 수 있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이처럼 거룩하고 진실하신 주님께서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다윗의 열쇠’란 무엇일까요? 먼저 다윗에 대해 살펴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인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였으며 하나님께 많은 영광을 돌렸지요. 또한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린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다윗이었기에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축복을 받아 누렸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있을 때 이스라엘이 가장 번성하여 많은 영토 확장을 하였고, 큰 부귀를 누렸으며 이웃나라들로부터 조공까지 받았지요. 또한 다윗 왕은 많은 백성들로부터 사랑과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는 다시 말해, 다윗에게는 부와 명예와 권세, 하나님의 사랑과 백성들의 사랑 등 모든 축복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것을 가리켜 바로 “다윗의 열쇠”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지면 하늘 창고의 문을 열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마음껏 받아 누릴 수가 있게 되지요. 이러한 다윗의 계보를 통해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이 나심으로, 가장 중요한 구원의 문까지 열리게 되는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보화가 담긴 창고를 열기 위해서는 열쇠가 필요합니다. 열쇠를 가진 사람만이 그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가 그 안에 있는 것을 마음껏 누릴 수가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어떤 축복의 문이라도 열 수 있는 열쇠를 주심으로 다윗은 많은 축복을 누릴 수가 있었습니다. 이는 다윗이 그만큼 하나님 앞에 합한 사람으로서 그 열쇠를 받을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다윗도 이러한 자격을 얻기까지는 혹독한 연단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 가운데 들어가기 위해서는 본성 속의 깊은 악까지도 빼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연단의 시작점이 바로 다윗 왕이 자신의 부하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충성스런 부하인 우리아를 이방인의 손에 죽게 만들었던 사건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대하면서 ‘다윗 왕은 어떻게 그렇게 큰 악을 행했는데도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었고 큰 축복을 받을 수 있었는가’ 의아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 왕이 행한 일이 물론 큰 죄악이었지만, 이는 다윗 왕이 특별히 악했기 때문은 아니지요.

오히려 다윗 왕은 선한 사람이었음에도 그가 가진 위치 때문에 자그마한 악의 모양이 이렇게 큰 범죄로까지 나올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당시 다윗은 근방의 여러 나라를 호령하는 위대한 왕이었으며, 마음만 먹으면 어떠한 일도 할 수 있는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다윗 왕에게 아직 본성 속에 버리지 못한 악의 모양이 있었는데, 그것이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나게 되지요.

이 상황을 이해하시려면 여러분이 한번 다윗 왕의 입장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 왕과 같은 막강한 권세를 가지게 되면 평소에는 마음에만 가지고 있던 것을 행함으로 옮길 수 있는 일들이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유 없이 여러분을 헐뜯고 미워한다고 할 때,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그가 싫어지고 심지어는 그에게 어떻게 좀 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여러분에게 상대방을 마음대로 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하더라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을 수 있는 무소불위의 엄청난 권세가 주어졌다고 할 때, 과연 어떤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나에게는 그런 악한 마음이 없어’ 하던 사람도 자신도 모르는 본성 속의 깊은 악이 드러날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다윗 왕의 예를 통해 아무리 조그마한 것이라 할지라도 악의 모양이 남아 있는 한은, 적당한 환경과 조건이 만들어지면 언제든지 그것이 범죄로 나올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잘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고전 10:12에 말씀한 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며, 모든 악은 그 모양이라도 벗어 버리기까지 말씀과 기도를 통해 부단히 죄악과 싸워 나가야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바로 다윗에게도 이러한 본성 속의 깊은 악의 모양이 있음을 아셨기에 그에게 연단을 허락하심으로 그가 철저히 자기를 발견하고 깨달아서 온전한 성결로 나올 수 있도록 인도해 가신 것입니다.

다윗 왕은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혹독한 연단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감사함으로 잘 승리해 나갔지요. 아들 압살롬의 배신으로 인해 왕궁을 버리고 급히 도망하는 다윗 왕에게 백성에 불과한 시므이라는 사람이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하는 경멸 섞인 저주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전의 다윗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들에게 쫓겨 비참하게 도망하는 상황에서 이처럼 자신의 속을 뒤집어 놓는 말로 자신을 멸시하는 백성을 자신의 권세로 얼마든지 벌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이러한 모든 것까지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허락하신 것으로 받아들였지요. 주변에서는 오히려 부하들이 더 흥분하여 당장 가서 시므이를 죽이겠다 하였지만, 다윗 왕은 이러한 부하들을 만류했습니다.

시므이를 충분히 죽일 권세가 있었음에도 그 권세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한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지요. 이전에 자신의 권세를 이용하여 죄 없는 선한 백성을 죽게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연단을 통해 더욱 아름답고 온전하게 하나님 앞에 합한 모습으로 나오게 되었지요. 그리고 이렇게 축복받기에 합당한 그릇을 만드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놀라운 축복의 문을 여는 응답의 열쇠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열쇠는 단지 몇몇 정해진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닮아 거룩하고 진실한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격을 갖춘 사람만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주기를 원하시지요.

여러분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 나가는 만큼 건강의 문이 열리고, 물질의 축복의 문도 열리며, 명예와 권세,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보장하시는 문 등 준비된 그릇에 상응하는 축복의 문들이 열리게 됩니다. 마침내는 가장 큰 축복의 문인 새 예루살렘의 문을 여는 열쇠 또한 주어지게 되지요.

여러분이 반드시 명심할 것은, 모든 문은 반드시 공의에 맞추어 합당한 자격을 갖추는 만큼 열려왔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적으로 이루어야 할 사명과 축복은 반드시 전 성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합당한 자격조건을 갖추어야 하지요. 그래서 교회적인 축복의 문을 온전히 열어갈 때, 여러분 개인적으로도 새 예루살렘의 문을 여는 열쇠가 그만큼 더 가까이 주어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7절 후반절에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했는데, 우리 주님께서 문을 여시면 아무도 닫을 수 없고 닫아 버리시면 아무도 열 수가 없습니다. 구원의 문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열리는 것이고, 이 열린 문을 누구도 닫을 수가 없지요. 원수 마귀 사단도 어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열고 닫으시기 때문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루어 가시지요. 이제 이러한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 칭찬을 하십니다.

8절 전반절에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하셨지요. 주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축복의 문을 열어 두셨다면 사람이나 천사, 원수 마귀 사단이라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엄청난 권세와 능력을 보장해 주시는 말씀이지요.

마 16:18-19에, 예수님께서는 수제자 베드로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셨습니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는 말씀에는, 이처럼 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며 이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놀라운 권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하나님의 사람과 교회들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가 있지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인도해 가시는 사람과 교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한 번 열어주신 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코 닫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는 본 교회가 지금까지 이루어 온 여러 해외 성회들을 보아도 알 수가 있지요.

하나님께서 한 번 이루기로 정하시고 ‘이루라’ 명하신 일에 대해서는 아무리 원수 마귀 사단의 방해가 심하다 해도 반드시 성취되었던 것을 봅니다. 무력으로 막으려 해도 안 되었고, 인간의 법으로 막으려 해도 안 되었고, 아무리 사람 편에서 이런저런 방법으로 훼방하려 해도,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룸으로 하나님께 더 크게 영광 돌렸던 것을 볼 수가 있지요.

고후 4:8-9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말씀한 대로, 주님의 강한 팔이 본 교회와 저와 여러분을 붙드시고 역사하시므로 주님께서 우리 앞에 열어두신 문을 그 누구도 닫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보장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축복의 언약을 주고 계신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해 “적은 능력을 가졌다” 말씀하셨지요. 물론 이 말씀의 의미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은 것에 대해 칭찬하고 계신 내용이지만, 그렇다 해도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정도로 잘하고 있는 교회에 대해 왜 적은 능력을 가졌다고 하신 것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먼저 ‘적은 능력’이란 여러분이 처음 주님을 영접하여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의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겨자씨의 크기는 하얀 종이에 볼펜으로 찍은 점 하나의 크기 정도밖에 안되는데, 처음에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대부분 이처럼 적은 분량의 믿음에서 출발하지요.

그 작은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되고, 그 나뭇가지에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듯이, 믿음 역시 처음에는 적은 믿음에서 출발하지만, 신앙생활을 해 나감에 따라 점차 성장하여 큰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처럼 처음에 가졌던 적은 능력, 즉 적은 믿음의 분량을 가졌을 때부터, 듣고 배우고 가르침 받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열심히 믿음을 키워왔다는 사실입니다.

적은 믿음을 가졌음에도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므로 세상을 이기며 승리해 왔던 것이지요. 사실 많은 분들의 경우를 볼 때, 처음에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적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나가기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을 이길 능력도 그만큼 적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진리는 이렇게 하는 것인데’ 하고 알면서도 막상 현실에서는 진리의 말씀대로 행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주일날 ‘혈기를 버려야 한다.’는 내용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나서 ‘앞으로는 오늘 들은 말씀대로 살아야지’ 다짐하지만, 이내 기분 상할 일이 생기고 감정이 상하면 다시금 옛날 모습이 나오고 말지요. 적은 능력을 가졌을 때는 이렇게 되기가 쉽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적은 능력을 가졌다 해도 진정 들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한 주간 말씀을 붙잡고 불같이 기도하는 분은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능히 승리할 수가 있지요. 빌라델비아 교회는 이처럼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열심히 기도하여 들은 말씀대로 지켜나가므로 신속히 믿음이 성장하면서 주님의 칭찬받는 교회로 나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켰다”는 말씀에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실제로는 아주 큰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지극히 적은 능력을 가진 것과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근본 하나이시며 권세도 능력도 동일하게 가지신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이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능력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크시며 무엇이나 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요. 이러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는 낮고 천한 사람의 몸을 입으셨고, 인생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셨습니다.

배고픔도, 추위도, 육신의 피곤함도, 육의 고통 등도 보통 사람들과 똑같이 느끼셔야 했지요. 그 모진 십자가의 고난도 고스란히 느끼시며,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지극히 적은 능력을 가진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입고서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나는 무한한 권세와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하시며 공의를 뛰어 넘는 일들을 무조건 행하신 것이 아니라, 늘 겸비한 마음과 자세로 아버지께 기도하셨고 늘 아버지 하나님을 의지하시며 모든 것을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셨지요.

마침내는 모든 물과 피를 쏟으시며 죽기까지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완성하셨습니다. 너무나 큰 능력을 가지신 분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적은 능력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모든 일을 공의에 맞추어 행하신 것이지요.

이처럼, 여러분 중에도 중심이 좋고 마음밭이 좋은 분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무조건 그분에게 처음부터 큰 능력을 주셔서 쓰시지는 않습니다. 공의에 맞추어 한 단계, 한 단계 이끄셔서 적은 능력으로부터 마침내는 큰 능력으로 역사해 가시는 것입니다.

본 교회도 이와 똑같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사실 본 교회에는 개척 때 이미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창조의 권능의 역사들이 수없이 나타났지요. 그렇다 하여 하나님께서는 본 교회를 처음부터 단번에 높이시거나 지금과 같은 권능으로 역사하게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당시도 결코 적은 능력은 아니었지만, 지금과 비교하면 너무나도 적은 능력에서 시작하여 많은 과정들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도록 인도하셨지요.

공의에 비추어 볼 때, 정녕 하나님 앞에 합당한 종으로써, 마지막 때에 이 놀라운 섭리를 이루기 위한 자격을 온전히 갖추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혹독한 연단의 과정도 허락하셨지요. 그 모든 과정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조건을 가진 사람으로서 믿음과 사랑으로 승리해 나왔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가리켜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켰다”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주님께서는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 ‘내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주의 이름을 배반한다’는 것이 꼭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거나 주님을 저버리고 떠난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주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뜻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 넓은 의미에서는 주의 이름을 배반하는 것이 되지요.

물론 능력이 안 되는 경우는 어쩔 수 없지만, 노력해 보지도 않은 채, 입으로는 믿음이 있다 하면서도 막상 시험이 오면 이리저리 치우치고 의심하며 다시금 세상으로 빠져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전에 받았던 은혜나 체험도 잊은 채 말입니다.

이처럼 작은 것이라 하여 주의 뜻을 알면서도 행치 않는 것이 쌓이다 보면 어떤 시험 환난이 왔을 때 이기지 못하고 불평불만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아예 교회를 떠나버리기도 하는 것이지요. ‘이것쯤이야’ 하며 진리를 어겼던 것이 결국은 말 그대로 주님을 완전히 배반하고 마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처음에 적은 믿음으로 시작하여 믿음이 성장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그 행함이 주님의 칭찬을 받을 만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말씀대로 살며, 시험 환난이 와도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 믿음의 반석 위에 서 나갔지요.

본 교회도 지금까지 걸어온 세월을 돌아볼 때 이와 같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기 위해 어떠한 핍박이나 시험도 인내하며 나아왔지요. 물론 개척해서 지금까지 중도에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고 끝내 교회를 떠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키질을 통해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시기 위한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허락된 연단이었지요. 오히려 그러한 연단의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으며 달려오신 분들은 신속히 큰 능력으로 성장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이처럼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을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 기도하기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비진리를 벗어내고 어두움과 싸워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힘입어야 하기 때문에 바로 기도를 통해 이러한 은혜와 능력을 끌어내려야 하는 것이지요.

또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죄이고, 어둠이고, 육인지 알아서 이러한 것들은 신속히 벗어 버리고, 선과 의와 빛 등 진리에 대한 것 또한 밝히 알아서 이러한 것을 행해 나가야 하지요. 그래서 진정 주님의 뜻을 알기 원하는 사람은 지적받고 책망 받을 때에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주님의 뜻을 더 밝히 알아서 그 뜻대로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말씀한 대로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적은 능력 가운데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그 이름을 배반치 않기 위해 애쓰고 힘쓰며 노력해 오신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기뻐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사랑하시는 증거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내 주시지요.

9절에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하십니다.

‘사단의 회’란 ‘두 사람 이상이 모여서 진리에 위배되는 말을 하며 교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무리’를 말합니다. 또한 ‘자칭 유대인’이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의 자녀라 하면서도 사단의 회에 속하여 진리의 말씀대로 행치 않고 세상과 짝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는 사람을 말하지요.

원래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으로서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를 뜻하는 말인데, ‘자칭 유대인’이란 스스로는 하나님의 자녀라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인정해 주시지 않는 경우입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의 자녀라 말하면서도 진리 안에 살지도 않고 남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수군수군 거리므로 교회 안에 분쟁과 다툼을 일으켜 시험거리를 만들지요.

자신의 생각과 틀에 맞지 않으면 심지어는 기사와 표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곳에 대해서도 ‘잘못되었다’ 하거나 ‘이단이다’ 정죄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믿는다 하면서도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와 종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훼방하는 것이 자칭 유대인들의 모습이지요.

‘거짓말하는 자’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성경은 무엇을 거짓말이라고 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요. 가장 큰 거짓말은 요일 2:22에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말씀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사람이 거짓말하는 자이며 적그리스도가 곧 거짓말하는 자인 것입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하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있지요. 요일 1:6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요일 2:4에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말씀합니다.

즉, 자칭 유대인이라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 그들이 바로 거짓말 하는 사람들이지요.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 중에서 몇을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신다” 말씀합니다.

그러한 사람들도 결국은 하나님의 권능 앞에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켜서 나오게 된다는 말이지요.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교회와 종임을 더욱 확증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도 이처럼 자칭 유대인들로 인해 핍박과 어려움을 당하였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시험하던 자들로 하여금 이제는 그 앞에 나아와 회개케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로 삼으신 것이지요.

그러나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 몇”이라 말씀한 대로 모든 사람들이 다 회개하여 돌이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그들의 죄가 성령 훼방, 모독, 거역에 해당하므로 회개하고 돌이켜 용서받는 것이 쉽지가 않지요. 다만 그들 중에 진리를 잘 알지 못하여 자칭 유대인에 속해 있다가 참된 진리의 말씀과 권능의 역사를 보고 조금이나마 선한 마음 가운데 깨달아 회개하고 돌이키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연단의 과정 속에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핍박이나 시험을 허락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그것이 축복이며, 반드시 증거로 나타나게 되지요. 반면에 핍박이나 시험했던 사람들에게는 공의 가운데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고 보장받는 교회나 사람에게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사랑하신다’는 분명한 증거가 되는 것이지요. 사람 편에서 ‘하나님, 사랑합니다’ 말할 때, 거기에는 말로만이 아니라 따르는 행함으로서 사랑의 증거를 삼아야 하듯이, 하나님 편에서도 사랑하시고 보장하시는 자녀에게 ‘사랑한다’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따르는 증거로 보장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기사와 표적과 희한한 능 등의 권능의 역사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지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놀라운 권능의 역사들을 베풀게 하시므로,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여러분도 아버지 하나님과 바로 이러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가 날마다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하지요.

본 교회 역시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증거를 여러모로 나타내 주셨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살아 계신 역사들을 무수히 나타내 주셨지요. 또한 사람으로서는 풀 수 없는 영계의 깊은 비밀한 말씀들을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원수 마귀 사단이 몇 차례에 걸쳐 본 교회를 무너뜨리려 했었지만, 그때마다 어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또한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사람들의 훼방으로 인해 오히려 더 큰 권능을 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선과 사랑과 믿음으로 시험의 과정을 통과해 나가는 만큼, 마침내는 지금과 같은 놀라운 권능의 차원에까지 이를 수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10절에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말씀합니다.

먼저 ‘주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 하셨는데, 왜 ‘인내의 말씀’이라고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때론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특히 적은 능력을 가졌을 때는 즉, 아직 믿음이 연약할 때는 더욱 그렇지요. 이때는 마음 안에 비진리를 좇고자 하는 속성이 더 강하기 때문에 이를 이겨내고 진리를 좇기 위해서는 죄와 싸워나가기 위해 기도하고 금식하며 열심히 인내해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점차 진리의 마음이 자라고 그래서 이 진리의 마음이 비진리의 마음보다 더 강해지면 이때부터는 진리를 좇는 것이 점점 쉬워집니다. 예전처럼 억지로 인내하며 육체의 소욕을 누르고 참기보다는 진리를 좇고자 하는 마음이 커지므로 자연스럽게 진리의 행함이 나오게 되지요.

이처럼 진리의 마음이 비진리의 마음보다 더 커졌다 하여 ‘이제 됐다’ 하며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비진리의 육의 마음들. 즉, 악은 그 모양이라도 다 벗어 버리기까지는 늘 인내하며 자신을 지켜나가야 하지요. 마음 안에 작은 악의 모양이라도 남아 있으면 언젠가 적당한 환경이 되었을 때 그것이 얼마든지 드러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버리지 못한 악의 모양이 있다 해도 그것을 발견하여 열심히 버리고자 노력해 갈 때는 하나님께서 ‘인내의 말씀을 지킨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각자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인내하며 최선을 다해 말씀대로 지켜 행하려는 노력을 믿음의 행함으로 인정해 주시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켜 주시고 시험의 때 또한 면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늘 지켜 주시는데, 거기에는 반드시 단서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만 다니면 무조건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겠지’하고 잘못 생각하다가, 어떤 사고나 재앙이라도 만나게 되면‘나는 교회에도 나가고 하나님을 믿는데 왜 나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났는가.’ 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는 진리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인내하며 믿음을 지켜나갈 때, 지켜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온전히 지킴받기 위해서는 온전히 빛 가운데 즉, 진리의 말씀 가운데 살아야 하지만 자기 믿음의 분량 안에서 최선을 다해 인내하며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해 갈 때는 하나님께서도 그 믿음에 맞게 지켜 주시지요. 또한 시험도 물리쳐 주시고 피할 길도 주시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십니다.

시험의 때를 면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반드시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말씀 안에 거하며 빛 가운데 사는 만큼 그들을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도 지켜 주십니다. 예를 들어, 온전한 주일성수와 십의 일조만 해도 하나님께서 기본적인 분야에 있어서는 지켜 주실 수가 있지요.

여기서 기본적인 분야라고 하는 것은, 믿음의 분량에 따라서는 온전한 주일성수와 십일조만 한다 해서 모든 것을 다 지킴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경우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주일성수와 십일조만 온전히 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사고 날 것을 미리 막아주시기도 하고, 설령 실수로 사고가 나도 몸은 전혀 상하지 않도록 지켜주시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지요.

물질적으로도 지킴 받게 해 주시는 것이고요. 하물며 인내의 말씀을 지키며 진리 안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께서 분야, 분야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바로 증인이지 않습니까?

때로는 말씀대로 사는 사람에게도 시험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도 시험을 당하더라’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이는 진리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42.195Km의 마라톤 코스를 뛰고 난 선수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중간에 몇 차례 힘든 고비의 순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때로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고, 자칫 주저앉아 버릴 뻔한 때도 있었다고 하지요. 설령 우승을 한 선수라 하더라도 대부분 이런 위기의 순간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힘든 고비의 순간을 넘기고 마라톤 코스를 완주하고 났을 때 그 기쁨은 체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고 하지요. 천국에서 누릴 기쁨과 감격도 이러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비교적 편하고 안정적으로 천국문에 이르는 사람도 있지만, 어차피 인간 경작을 받아가는 이 땅의 삶 동안은 여러 가지 연단의 과정을 겪기 마련이지요. 가정의 문제, 건강의 문제, 물질의 문제 등 이 땅에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고통 받기도 합니다.

그러한 연단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변화되어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되면 이전에 겪었던 연단들이 결국은 축복으로 가는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장차 천국에서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리면서, 인간 경작의 과정이 너무나 축복이었음을 마음 중심에서 느끼며 감사의 고백을 하게 되지요.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 땅에서 인내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며 때로는 힘들게 느껴지던 연단의 순간들도 믿음으로 이겨낸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여러분은 벧전 5:10에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말씀한 대로, 여러분이 이 땅에서 받는 고난이 장차 영원한 천국에서의 영광을 위한 잠시 잠깐의 과정일 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잠깐의 고난을 통해 오히려 더욱 온전해지며 굳고 강하여진 여러분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귀한 도구들로 사용해 가실 것입니다. 이는 장차 천국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 만민의 성도님들에게 더 큰 영광과 상급을 주시기 위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반드시 이루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오늘도 온전한 성결을 향해 힘차게 전진해 나가심으로 본 교회와 모든 만민의 성도님들 그리고 이 말씀을 들으시는 모든 분들 위에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증거가 날마다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3-02 오후 4:23:10 Posted
2023-10-26 오후 2:54:08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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