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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26) 빌라델비아 교회 (2) [계 3:7-13]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3.04
어떤 사람은 사람들이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막상 안을 들여다보면 이런저런 시험 환난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것을 봅니다. 그러면 사람들 중에는 이내 자기 생각 가운데 ‘뭔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나 보다’, ‘사람 앞에서만 잘하는 척했나 보다’ 하면서 수군거리고 헤아리며 판단 정죄하는 사람도 있지요.

물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진리 안에 살아갈 때는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므로 시험이나 환난을 면하게 됩니다. 설령 시험이 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지요(고전 10:31).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지킴 받지 못하고, 시험 환난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가고 있는가’ 스스로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신앙생활을 잘 하는데도 어떤 시험이 오는 경우가 있지요. 이는 곧 축복을 주시기 위해 허락된 시험입니다. 이런 경우는 나중에 결과를 보면 그 시험이 잘못에 대한 징계로 온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로부터 지킴 받지 못해서 온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수가 있지요.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시험 당하는 것을 볼 때, 진리로 비추어 분별한다고 하면서 외적인 것만을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져짐으로 당장에는 마치 환난을 당하는 것 같았지만, 결과적으로는 다니엘이 이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 하나님께 영광 돌렸던 것을 봅니다. 요셉 또한 다른 나라에 종으로 팔려가고 누명을 쓴 채, 깊은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보기에는 환난을 당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는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기틀을 마련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큰 계획과 섭리 가운데 허락된 일이었지요. 그러니 이는 결과적으로 요셉 개인에게도 축복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주님을 잘 믿는 사람이 핍박을 당하고 순교에 이르는 것도 마찬가지이지요. 이 역시 지킴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시험에서 승리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이름으로 순교한 사람은 신앙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라도 내놓은 것이니, 적어도 3천층에 들어가는 영광을 얻게 되지요.

롬 8:18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하신 말씀대로 이 땅에서 받는 잠시 잠깐의 고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반면에 시험에 승리하지 못한 사람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 그만 주님을 부인하거나 교회를 떠남으로, 결국 시험의 때를 만나게 되지요.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여기서 ‘시험의 때’란, 진리 안에 살지 못하는 사람, 또는 주님을 배신하고 떠난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원수 마귀 사단이 가져다주는 갖가지 시험의 때를 말합니다.

이 ‘시험의 때’가 의미하는 좀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때는, 바로 장차 이 땅에 임하게 될 “7년 환난의 때”이지요. 따라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라면 더더욱 이 시험의 때를 만나지 않도록 깨어 근신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만약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가 적당히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서 말씀대로 살지 못하며 세상과 타협하고 만다면 결국 들림 받지 못하고 이 땅에 남아 7년 대환난에 빠지는 비극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이러한 시험의 때를 면할 뿐 아니라, 그토록 사모하고 기다리던 신랑 되신 주님과 함께 7년 공중 혼인잔치에 들어가게 됩니다.

내가 속히 임하리니
주님의 이 말씀은 그 당시만이 아니라, 그 후로 약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속히 임하리라’ 하셨는데 ‘왜 이렇게 더디냐?’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는 더딘 것이 아니라, 이미 이 말씀은 지금까지 2000여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대로 성취되어 왔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강건해야 70, 80인 이 땅의 짧은 삶을 살고 마침내 ‘속히 임하리라’ 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구원받은 사람만이 주님을 만났겠지만, 이 땅의 삶을 마치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결국은 주님께서 ‘속히 임하리라’ 하신 때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주의 약속이 더디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벧후 3:9-10), 주님께서 언제 오시더라도 맞이할 수 있는 준비를 항상 해놓고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지금은 성경에 말씀하신 마지막 때의 징조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으므로 ‘속히 임하리라’는 주님의 약속이 진실로 속히 이루어질 것임을 명심해야 하지요.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앞서 주님께서는 두아디라 교회에게도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하셨는데, 이때는 단지 믿음이라도 지켜서 구원을 놓치지 말고 얻으라는 뜻이었지요. 그러나 지금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 하신 것은 단순히 구원의 차원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은 믿음이 적은 초신자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왔기 때문에 이들에게 주님께서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 하신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여 장차 천국에 가면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면류관 곧 상급을 빼앗기지 말고 꼭 받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변함없이 달려간다면 그들에게 주어질 엄청난 면류관이 있는데, 혹여라도 중도에 변질되어서 그 면류관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면류관을 빼앗길 수도 있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물론 장차 천국에 가서 한 번 받은 면류관을 다시 빼앗길 일은 결코 없지요. 하지만 아직 이 땅에 있을 동안에는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했을 때, 또는 잘 감당하다가도 중도에 포기하거나 변질되었을 때, 이런 경우는 그 사명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므로 결국 자신이 사명 감당해서 받았어야 할 면류관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게 되고 맙니다.

정녕 믿음이 있고 천국을 소망하며 특별히 새 예루살렘을 소망하는 분이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소홀히 하거나 중도에 포기하고 놓아 버림으로 자신의 면류관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나 아니면 이 일은 할 수 없어’ 생각하며 안일한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도 자칫 촛대가 옮겨질 수 있음을 알아서 처음 사명 맡았을 때의 열심과 행위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중단이 있을 수 없기에 만약 처음에 사명을 맡은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때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해 두신 사람을 통해 어떠한 상황에서든 결국은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명 감당을 잘하지 못한다고 해서 무조건 사명을 거두어 다른 사람에게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 기회를 주시고 또 주셔서 돌이켜 회복할 수 있도록 하시지요. 이처럼 기회를 수없이 주셨어도 끝까지 변화가 없다면 이때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더더욱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열심히 세상을 버리며 천국을 바라보고 달려왔다고 했는데, 어느 한순간 다시 세상을 바라봄으로 지금까지 쌓아 왔던 모든 상급을 일시에 다 헐어 버리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열심히 했을 때는 적어도 3천층 이상을 갈 수 있을 사람이 순간에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게 된다면, 이는 설령 회개하고 돌이킨다 해도 이제는 낙원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이 되기 때문이지요.

지나간 일들이 너무 안타깝고 후회스럽겠지만, 그렇다 하여 그것을 한탄만 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다시금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어 나간다면 능히 회복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고, 자기 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새 예루살렘까지도 바라보며 다시 달려갈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여기서 ‘하나님의 성전’이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보좌가 있는 곳, 즉 새 예루살렘을 말하는데, 그곳의 기둥이 되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은 새 예루살렘에서도 가장 중요한 주축의 위치를 약속하시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약속을 누구에게나 주신 것이 아니라 바로 “이기는 자”에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성도들은 적은 믿음을 가지고도 말씀을 지켜 행하며 주님을 배반치 아니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신앙이 성장할수록 더욱 변개함이 없이 진리를 행하므로 결국에는 온전한 성결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지요. 주어진 사명 또한 충성되게 감당할 것이고요.

이것이 곧 “이기는 사람”이며, 그중에서도 더욱 온전한 믿음으로 주님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새 예루살렘의 기둥의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는 약속입니다. 만민의 성도님들은 어찌하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했고,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악의 모양이 있으면 빼내기 위해 금식과 기도로 매달려왔습니다.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기에 교회 또한 생명 다해 사랑했고, 입는 것, 먹는 것까지 아껴가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드려왔지요. 날마다 성전에 모여 기도하기에 힘썼고, 사명이 몇 개씩 주어져도 오직 감사함으로 받아서 최선을 다해 충성했으며, 더 열심내지 못한 것을 오히려 민망해했습니다.

또한 교회적인 시험과 핍박 가운데서도 하늘나라의 상급됨을 바라보며 선(善)으로 승리했고, 교회와 성도들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오신 분들도 많지요. 이 밖에도 우리 성도님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얼마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해 오셨는지 서로의 증인이십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모습까지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미 개척 당시에 본 교회의 성도들에게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신 언약의 말씀을 동일하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므로 후회가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말씀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해 여러분을 연단하고 또 연단하여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들어 오셨지요.

또한 이 제단에 특별한 사명을 주신 만큼 은혜 역시 특별하게 부어 주셔서,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잡고 이 길을 갈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평탄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수많은 기사와 표적과 믿을 수 있는 증거들을 통해 변개함 없이 달려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이지요.

아무리 이렇게 많은 은혜를 주셨다 해도 자신이 그것을 붙잡지 않고 마음을 지키지 못했다면 ‘주시겠다’ 약속하신 축복들도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제단에는 또한 공의를 넘어서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 사랑으로 이 제단을 치리해 나가시므로 누구라도 이 축복의 테두리 안에서 나가지 않기를 너무나 원하시지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 말씀은 앞서 주신 언약을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으로 인쳐 보장하신다는 뜻입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기둥이 된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인정해 주셔야만 되는 것이지요.

또한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그이 위에 기록되어 인쳐져야 하는 것이고, 여기에 주님의 새 이름도 그이 위에 기록되어야 완전한 보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새 이름’이란 바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심으로 구속 사업을 완성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께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는 영광스런 새 이름이 주어졌지요(빌 2:9-11).

원래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로서 왕이 거하는 곳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전이 있어서 모든 제사가 드려지므로 하나님께서 계신 곳이기도 했지요. 그런데 새 예루살렘은 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처럼 결국은 없어질 곳이 아니며 거룩한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는 곳으로, 영원한 예루살렘을 말합니다(계 21:1-2).

이곳 새 예루살렘에는 하나님을 닮아 온전하고 거룩한 자녀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지요.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이 장차 하늘나라에서도 쓰이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새 예루살렘의 정식 명칭은 ‘영광의 성’입니다.

이 땅에서 죄를 버리고 온전히 성결되어 하나님께 영광만 돌리며 산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이며, 그곳에 들어가게 되면, 이번에는 하나님 편에서 주시는 영광을 세세토록 누리게 되므로 ‘영광의 성’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의 성에 들어가려면 온전히 성결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주어진 모든 분야에서도 온 집에 충성해야 합니다. 성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죄와 싸워 나가며 사명 감당하는 것과 온전히 성결되어 진리 안에 거룩한 자로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과는 하나님께 올려지는 향기가 전혀 다르지요.

하나님께서는 온 영의 사람들을 새 예루살렘으로 들이셔서 그들과 세세토록 사랑을 나누며 그들의 아름다운 향을 흠향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의 약속은 오늘 본문의 빌라델비아 교회뿐만 아니라,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행하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 위에도 주어지는 동일한 약속이라는 사실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러나 똑같은 말씀이라 할지라도 각각의 교회에 주시는 말씀의 의미는 다르지요. 어떤 교회는 지금까지 주신 책망과 권면의 말씀을 절대 흘려버리지 말고 마음에 새겨서 반드시 구원에 이르라는 의미가 있기도 하고, 어떤 교회는 그 안에 깨어 있는 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끝까지 붙잡아서 약속의 말씀을 이루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시는 말씀에는 빌라델비아 교회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빌라델비아 교회를 바라보는 다른 많은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 주시는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지요. 그것은 성경에 기록해 놓은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친히 간섭해 가시는 제단에 대해 밝히 깨우쳐야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정녕 성령의 역사 가운데 깨어 있는 교회라면 오늘날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행하는 제단을 향해 혹여라도 성령을 훼방하는 말을 할 수는 없지요. 귀가 있어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교회라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성령께서 역사해 가시는 제단을 향해 성령을 훼방하거나 모독, 거역하는 일은 절대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렇게 하도록 놔두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가장 큰 소원은 물론 대부분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라 답하시겠지요? 그런데 새 예루살렘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적당한 믿음으로 적당히 충성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지요. 악은 모양이라도 없는 온전한 성결을 이루고 생명을 다해 온 집에 충성하는 최고의 믿음과 신앙을 인정받아야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믿음에 이르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노력한다고만 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상고해 볼 때 새 예루살렘을 바라볼 만한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혹독한 연단을 통해 정금과 같은 모습으로 나와졌고, 보통 사람으로서는 감당 못할 사명들도 생명을 다한 충성으로 감당해 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되어야 비로소 새 예루살렘을 바라볼 자격이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본 교회의 성도님들에게도 새 예루살렘이라는 소망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실제로 많은 성도님들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도록 지금까지 인도해 오고 계시지요. 성결의 말씀을 통해, 스스로는 발견할 수 없는 깊은 죄성까지라도 발견하여 버림으로 성결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또한 성결과 함께 이루어야 할 온 집의 충성을 위해 대성전 건축과 세계 선교의 사명을 주셨지요.

이 사명은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믿음과 생명 다한 영적인 충성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사명을 주신 자체가 바로 만민의 성도님들을 새 예루살렘으로 이끌어 들이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여러분이 성결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신뢰하는 만큼 여러분에게 대성전 건축과 세계 선교에 대한 온전한 믿음이 주어지게 되지요. 그리고 이러한 온전한 믿음에 이르러야 생명을 다한 충성으로 사명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죽도록 충성하시는 분들을 통해 대성전 건축과 세계 선교가 이루어지게 되지요.

이렇게 만민의 사역을 함께 이룬 분들이 장차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위에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주님의 새 이름으로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는 말씀이 온전히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3-09 오전 10:48:00 Posted
2023-10-26 오후 2:56:10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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