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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27) 라오디게아 교회 (1) [계 3:14-22]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3.11
라오디게아 교회는 사데 교회와 같이 주님으로부터 책망만 들었던 교회입니다. 사데 교회에는 그나마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명이라도 있다’는 말씀을 들었는데,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런 말씀조차도 없이 오직 책망의 말씀만 들었지요.

아멘이시요
요한계시록 3:14에 보면, 주님에 대해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 앞에 오직 ‘예’와 ‘아멘’만 있으셨습니다. ‘아니요’ 하는 불순종이 한 번도 우리 주님은 없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8에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 땅에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오셨지요. 그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물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오직 순종만 있으셨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9에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했지요.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도 하나님 앞에 오직 예와 아멘만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생각과 이론 등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을 무(無)로 돌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할 수 있어야 하지요.

‘믿습니다’ 하는 많은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으면 믿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합니다. 또한 처음에는 순종하는 것 같다가도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면 결국 육신의 생각 속에 변개하는 것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없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없는 것이지요.

고린도후서 1:20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말씀한 대로, 오직 “아멘”만 하신 주님과 같이 우리도 예와 아멘으로 순종할 때라야 그 결과를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다음으로 주님께서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십니다. 충성된 사람은 자기주장을 내세우지도 자기 유익을 구하지도 않으며 오직 ‘아멘’만 합니다. 예를 들어 충성된 장수는 왕이 ‘가라’고 명하면 설령 죽을 곳이라 해도 순종하여 가지요.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도 충성되시므로 죽기까지 ‘아멘’으로 순종하셨고, 마침내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들을 아버지 앞에 온전히 이루어드렸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충성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의 약속하신 모든 말씀이 신실하게 성취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참된 증인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
또한 주님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십니다. 골로새서 1:15-17에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말씀합니다.

원래 우주 만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는데, 요한복음 1:1에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했지요. 근본 하나님과 하나로서, 이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곧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시기에 앞서 주님에 대해 이처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 설명하셨을까요? 이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과, 하나님의 심판은 정확하다는 것을 말씀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시면서도 오직 아멘과 충성으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온전히 이루어드리신 주님께서 이 시간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주시는 말씀 역시 반드시 그대로 성취되는 참된 말씀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시려는 것이지요.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님께로부터 책망을 받은 내용
요한계시록 3:15-16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했지요.

사람의 모든 생각과 마음, 행위를 아시는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의 신앙에 대해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과연 신앙 안에서 찬 것과 더운 것, 그리고 미지근한 것은 각각 무엇을 뜻할까요? 차가운 물에다 불로 열을 가하면 더워지고, 열을 가하던 것을 멈추면 차츰 미지근해지면서 결국 완전히 식어 차가운 물이 됩니다. 여기서 물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불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먼저, ‘차다’는 것은 그 마음에 성령의 역사가 없고, 아예 구원과 상관이 없는 상태를 말하지요. 가끔 보면, 교회에 나오는 사람 중에도 성령을 받지 못하여 ‘참 믿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요. 이런 것이 바로 차가운 신앙입니다.

한때 성령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 중에서도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으므로 다시금 세상으로 빠져들어서 결국 성령이 소멸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지요. 이렇게 아예 구원과 멀어져 버린 사람을 “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반면에 “덥다”는 것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날마다 영적인 새 힘을 공급받으며 믿음이 자라나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마음 문을 열어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점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점점 더 깊이 알아가고, 하나하나 진리를 행해 나가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성령의 충만함과 위로부터 은혜와 능력을 받으니 차츰 범사에 영을 좇아 나가게 되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므로 날마다 육은 죽어지고 영은 자라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열심을 내며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또한 마가복음 12:30에 말씀한 대로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요. 이것이 바로 “덥다”고 표현하는 뜨거운 신앙인 것이지요.

차가운 신앙, 뜨거운 신앙이란 믿음의 분량이 크고 작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신자라 해서 차가운 신앙인 것도 아니고 교회에 오래 다니고 직분이 있다 해서 뜨거운 신앙이라 하는 것도 아니지요.

비록 아직은 믿음이 적고 진리를 온전히 행하지 못한다 해도, 자신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좇아 나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믿음이 성장하며 하나님의 뜻을 더 온전히 좇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뜨거운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믿음의 분량이 작을 때는 아직 육신의 일뿐만 아니라 구습을 좇는 육체의 일이 종종 나오는 경우도 있지요. 그런 경우에도 즉시즉시 잘못한 것을 회개하고 돌이킴으로 결국은 변화되어 나가고 있다면 이것을 가리켜 차가운 신앙이라 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늘 돌아보며, 어찌하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기도하고 금식하며 노력해 가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뜨거운 신앙이라고 칭찬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앙생활을 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전혀 변화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나,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명히 알면서도 그릇된 길로 행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차가운 신앙”을 가진 것이지요. 그런데 이 차가운 신앙이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잘 모르는 사이에 점차 미지근한 신앙이 되고, 결국 차가운 신앙이 되고 만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차지도 더웁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이란 어떤 것을 말할까요?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미지근한 신앙은 ‘성령을 받아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면서도 뜨거워지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미지근한 신앙으로는 “믿음이 있다” 하며 교회는 왔다 갔다 하지만 성령의 교통함이 없으므로 성령의 음성과 주관과 인도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자신의 모습’을 깨우치지 못하지요.

차가운 신앙이 되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알기에 교회에는 출석을 하지만, 주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도 더 많은 것을 드리려 하지도 않으며 뜨거워지려고도 하지 않는 것이고요. 또한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삶의 변화 역시 없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충성은 열심히 한다 해도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으니,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 해도 1년 전이나, 5년 전, 10년 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하면 전혀 변화가 없고, 세상 사람과도 별 차이가 없는 것이지요.

이렇게 미지근한 상태에 머물러만 있고 계속해서 돌이키지 않는 사람은 결국에는 차가운 신앙이 되고 맙니다. 미지근한 물을 오래 놔두면 그대로 미지근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침내 완전히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과 같지요. 그래서 미지근한 신앙도 오래 지속되면 결국 구원과 상관없이 사망으로 가게 되는 것이고, 이를 가리켜 주님께서는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친다’ 하신 것입니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차가운 신앙은 당연히 하나님과 상관이 없고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차가운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되며 미지근한 신앙 역시 결코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미지근한 신앙을 경계하면서 기왕이면 그냥 ‘더워지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왜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여기에는 미지근한 신앙이 얼마나 경계해야 할 것인지를 깨우쳐 주시려는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예를 들어, 차라리 차가운 신앙 상태에서는 징계를 통해서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라도 있을 수가 있지요.

가령 죄를 지으므로 하나님께 외면을 당하게 되면 질병이나 사고를 당하거나 여러 가지 재앙을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징계를 통해서라도 정신을 차리고 철저히 통회자복하면 다시 신앙을 회복할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미지근한 신앙일 때는 그런 기회조차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지요.

그렇다 해서 차라리 차가운 신앙이 되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사실 차가운 신앙 상태에서는 징계를 받았을 때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보다는 두려움과 낙심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설령 회개하고 돌이킨다 해도 재앙을 당하고 나서야 회개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회개하여 아버지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는다 해도 일단 한 번 깨어진 하나님과의 신뢰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요.

미지근한 신앙을 좀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자면, 신앙의 정체가 심해진 상태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믿음의 3단계에 있는 분들도 더욱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받고 은혜를 받아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 믿음의 3단계 초입까지는 비교적 쉽게 이르게 됩니다.

특히 진리를 밝히 알려 주며 항상 성령 충만한 모임과 기도가 있는 제단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간다면 짧은 시간에도 믿음이 쑥쑥 자라게 되지요. 더욱이 눈에 보여지는 권능의 증거들이 있다면 더더욱 신앙의 성장이 빠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의 3단계에 들어서면 이제 눈에 보이는 행함의 변화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변화시켜 나가는 신앙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이때부터는 이전보다 더욱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똑같은 시간에 예배에 참석한다 해도 전보다 더 정성껏, 더 마음을 다해 드려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고, 기도할 때도 더 중심을 다해 아름다운 향으로 진액을 다한 기도를 쌓아가야 하지요. 충성을 할 때도 초신자일 때의 충성과 믿음 있는 사람의 충성은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똑같은 사명을 감당하며 충성한다 해도 믿음이 더 성장할수록 더 진한 사랑의 마음으로, 더욱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향을 담아 올려드릴 수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비유를 들면, 똑같은 이름의 향수라도 농도의 차이에 따라 가격의 차이가 크게 달라진다고 합니다.

즉, 향수 원액은 적은 양에도 아주 비싸지만 희석이 많이 된 향수는 많은 양이라도 상대적으로 더 싸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믿음의 단계가 올라갈수록 아버지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모든 행함들이 양적으로는 동일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질적으로는 마음의 농도가 더욱 진해지고 영적인 사랑과 선의 향이 더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론적으로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고 해도, 실제로는 자칫하면 간과(看過)해 버리기 쉬운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행함적인 면에서는 예전과 동일하게 행하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더 드려야 한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다 보면 은혜 가운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도 언제부터인가 자기도 모르게 성령의 충만함이 떨어지고 습관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열심히 참석하던 각종 예배나 기도회를 한 번, 두 번 빠지게 된다거나 빠지지 않고 참석은 한다 해도 타성에 젖은 예배나 기도를 드리게 되지요. 위로부터 주어지는 기쁨이나 성령의 감동함이 없이 몸만 와서 앉아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 앞에 기쁨으로 드리던 것들을 점점 의무감으로 드리게 되고 힘들고 부담스럽게 느끼기도 하지요. 성령의 충만함이 사라지는 만큼 마음이 허전하고 곤고해지니 결국 세상을 바라보며, 육적인 것에서 위로를 받고 마음을 채우려 합니다. 그러다 자칫하면 육체의 일로까지 발전하여 하나님 앞에 큰 담을 쌓는 경우도 생기지요.

이런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면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깨닫는다 해도 다시 뜨거움을 되찾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에 없으니 예전처럼 뜨겁게 달려갈 엄두가 나질 않고 그냥 육으로 편한 상태에 머물고 싶어지지요.

그러니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던 마음을 접고 “이렇게 해도 1천층은 갈 수 있지 않을까?” 하거나 “구원만이라도 받으면 되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지근한 신앙이 위태롭다는 것은, 그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차가운 신앙으로 식어 버리기 때문이지요.

강물에 떠 있는 배가 노를 젓지 않고 멈추면,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떠내려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유다의 아사 왕이 그러했지요. 아사 왕은 왕위에 오른 지 35년까지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바르게 행한 왕이었는데, 말년에 이르자 그 신앙이 변질되는 것을 봅니다.

변질되기 전에는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리고 외침을 당하지 않도록 지킴을 받았습니까. 전에는 아무리 큰 군대와 맞서 싸울 때도 하나님께만 의지하여 승리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적이 침략하자 사람을 의지하게 되고, 그것도 이방 나라의 왕에게 도움을 청하지요.
이 일로 아사 왕은 ‘하나니’라는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책망을 듣게 되었는데, 이때 왕은 회개하고 돌이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지자를 가두고 학대했습니다. 이 일로 아사 왕에게는 징계가 임하여 발에 중한 병이 들고 말았지요. 이때라도 회개할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사랑과 긍휼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다면, 그 징계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돌이킬 기회를 주신 것임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사왕은 이 징계를 받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을 수가 없었고, 오히려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됩니다. 결국 세상의 의원을 의지하다가 마침내 치료받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되지요. 미지근한 신앙의 결과를 잘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베드로전서 5:8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한 것처럼, 항상 성령의 충만함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원수 마귀 사단이 삼킬 자를 찾아 덤빌 때 그 훼방을 이겨낼 힘이 없으므로 자칫 사망의 길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것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뜨거운 신앙을 갖기 원하십니다. 더욱이 여러분은 천국 중에서도 가장 좋은 새 예루살렘을 목표하며 달려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더더욱 주님 오실 때까지 뜨거운 믿음을 변함없이 지켜나가야 합니다.

또한 여러분의 그러한 뜨거움을 주변에도 전하시기 바랍니다. 미지근했던 물이라도 뜨거운 물을 계속 부으면 점차 더워지게 되고, 차가웠던 물도 계속해서 뜨거운 물을 부으면 결국에는 더워지게 되지요. 이런 것처럼 열정과 뜨거운 신앙을 가진 사람은 점차 주변까지도 뜨겁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영의 사람 한 명이 있음으로 인해서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함께 영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나 자신부터가 뜨거운 신앙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고, 혹여 뜨거움이 좀 식어진다 싶으면 뜨거운 사람과 가까이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의 모습을 통해 도전도 받고 상대의 충만함을 전달받아 자신도 다시금 뜨거워 질 수가 있지요.

혹여 미지근하거나 차가운 신앙으로 인해 연단이나 징계가 온다 해도 그것은 정녕 여러분을 더 좋은 천국으로 인도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임을 믿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더 뜨거운 신앙을 가지심으로 천국에 있는 여러분의 집집마다 뜨거운 열심을 나타내는 홍보석이 찬란히 빛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3-16 오후 12:50:08 Posted
2023-10-26 오후 2:56:10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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