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정기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30)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한 예언의 내용 [계 4:1-3]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4.08
요한계시록 4장부터는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한 예언의 내용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장차 주님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데리러 오시고, 그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님과의 7년 혼인잔치를 위해 공중으로 들려 올라간 이후의 일들이지요.

앞으로의 내용은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게 될 사람들에게는 직접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계시록 뒷부분에 나오는 공중의 혼인잔치와 천년왕국 그리고 천국 새 예루살렘에 대한 내용 등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것이지요.

계시록의 나머지 대부분의 내용은 장차 이 땅에서 일어나게 될 끔찍한 7년 환난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굳이 필요할 것 같지 않은 이러한 내용들까지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기록케 하시고 성경 66권 말씀의 제일 마지막에 두도록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비록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마지막 순간까지는 늘 깨어 신앙생활 해야 할 것을 경계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이 땅의 7년 환난에 떨어질 사람들에게는 마지막 구원의 끈과도 같은 역할을 하기위한 것이지요. 그때라도 깨닫고 돌이켜 회개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마지막 구원의 기회인 이삭줍기 구원에라도 이를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성경 66권의 마지막 책으로서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바로 성경 전체의 결론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책을 읽을 때 결론까지 다 읽어야 그 책의 내용을 온전하게 알 수 있듯이 성경 역시 요한계시록까지 다 읽고 알아야 하나님의 인간 경작의 섭리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지요.

어떤 주의 종들은 말하기를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잘못 풀면 오히려 해(害)가 된다.’고 하면서 아예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몰라도 된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요한계시록에 담긴 영적인 의미를 정확히 풀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계 22:18-19에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내용은 결코 필요 없는 내용이 아니라 우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고 거룩한 성 즉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출 12:9 후반절-10에 “그 머리와 정강이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고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며 아침까지 남은 것은 곧 소화(燒火)하라”는 말씀대로 우리는 어린양 즉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 말씀 전체를 다 먹어야 합니다.

그것도 아침이 되기 전에 다시 말해,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시기 전에 다 먹어서 양식 삼아야 하지요.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마지막 때에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반드시 알고 먹어서 양식 삼아야 하는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 강해의 말씀을 잘 듣고 꼭 깨어 있는 신앙생활을 하셔서 장차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 모두가 함께 들림 받아 주님 품에 안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부터 살펴볼 계 4장에는 장차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 펼쳐질 광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당시에 이미 앞으로 오랜 세월 후에 있을 하늘나라에서의 일에 대해 이처럼 기록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어떻게 시공을 초월하여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해서까지 자세히 보고 기록할 수가 있었을까요? 이는 사도 요한의 영이 본 것을 기록한 것으로서 영은 시공을 초월하여 앞으로 되어질 일에 대해서도 알 수가 있고, 반대로 과거의 일에 대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1절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 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이 일 후에”라 했는데 “이 일”이란 ‘요한이 계시를 받기 시작한 때부터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을 주신 것’까지를 의미합니다. 요한은 계시를 받을 때 단 번에 받은 것이 아니라 많은 시간에 걸쳐서 기도하고 계시 받고 또 기도하며 계시 받는 것을 되풀이하였지요.

지금까지는 일곱 교회에 대한 내용을 받았고, 이후로는 앞으로 되어질 일들에 대한 예언의 내용을 받아가게 됩니다. 계시를 받기 위해서는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완전히 사로잡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수한 기도를 쌓으며 깊은 기도에 들어가야 하고, 마음은 어떤 흠도 티도 점도 없이 깨끗해야 하지요.

주변의 육적인 환경 역시, 세상과는 단절된 곳일수록 좋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요한이 한적한 밧모섬에서 계시록의 말씀을 받을 수 있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계시를 받을 때에 주님의 음성을 듣기도 했고, 환상을 보기도 했으며, 그의 영이 직접 영의 세계로 이끌려가서 보고 오기도 하였지요.

이제부터 펼쳐지는 내용은 요한의 영이 직접 영의 세계로 이끌려가서 그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것인데 요한의 영이 이렇게 영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영계로 가는 통로를 통과해야 합니다.

본문에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한 것이 바로 영의 세계로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영계의 문이 열린 것을 보여 주신 것이지요. 우리가 사는 이 첫째 하늘 이외에도 둘째 하늘, 셋째 하늘, 넷째 하늘의 공간이 또 있습니다.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과 밝히 교통했던 사람들은 하늘이 정확하게 몇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는지 까지는 모른다 해도 하늘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라는 사실을 알았지요.

느 9:6에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하여 하늘이 여러 개일 뿐만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하늘도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 68:33에도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했고, 렘 10:12에는 “여호와께서 그 권능으로 땅을 지으셨고 그 지혜로 세계를 세우셨고 그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으며” 하여 분명 하늘을 복수로 다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 개의 하늘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하늘들 사이를 오가려면 그 하늘로 통하는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특히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갈 때는 이 육의 몸까지 영의 세계로 갈 수는 없기 때문에 이때는 몸에서 분리된 영만이 갈 수가 있지요.

육의 세계에 있는 몸과 분리된 영이 영의 세계로 들어가서 그곳을 돌아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굳이 영이 분리되어 가지 않더라도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환상”을 통한 방법이지요. ‘환상’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서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영안이 열려서 영의 세계를 보는 경우입니다.

행 7:55-56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경우가 바로 영안이 열려 영의 세계를 본 것이지요.

영안이 열려 보는 경우는 영이 직접 영의 세계로 가는 것이 아니고, 필요에 따라 영의 공간을 열어 보여 주시는 것이므로 보고 깨우칠 수 있는 분야가 제한적입니다. 다시 말해 그 순간에 필요에 따라 어떤 특정한 장면을 보여주시는 경우이지요.

따라서 환상으로 천국을 보았다면 그것은 천국의 전체적인 것을 보기 위한 것보다는 부분적인 것을 보는 경우입니다. 환상이란 영이 직접 영의 세계를 가서 보고 듣고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공간을 열어 어떤 필요에 따라 부분적인 것을 보고 깨우칠 수 있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이라 말 할 수 있지요.

부분적으로 영의 세계를 보고 듣고 체험하는 것과는 달리, 영이 분리되어 영의 세계로 가서 전체적인 것을 보고 듣고 체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영이 분리된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처럼 영 자체가 여럿으로 분리되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으로부터 영이 분리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수많은 영을 분리해 내실 수 있지만, 사람은 몸으로부터 하나의 영이 분리되어 한곳에만 갈 수가 있지요. 사도 요한의 경우가 영이 분리되어 영의 세계를 보고 온 경우입니다.

영을 분리하여 영의 세계를 다녀오는 경우에도 ‘그 사람이 영의 사람이냐, 육의 사람이냐’에 따라서 방법이 달라집니다. 진리의 말씀을 알고 마음이 선하며 그만큼 성결로 이룬 사람 즉,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영의 사람은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자연스럽게 영을 분리하게 됩니다.

이때는 몸에서 영이 분리되었다 해도 이 땅에 있는 몸은 혼적인 작용을 계속하므로 주변의 상황에 대해 느끼고 인식하지요. 그러면서 영으로는 동시에 영의 세계를 보고 듣고 느끼며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바로 이러한 영의 분리를 통해 셋째 하늘에 있는 낙원을 보고 왔지요.
고후 12:1-4에 사도 바울이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 했지요. 이때 사도 바울은 그의 영이 분리되어 낙원에 가서 그곳의 아름다운 것을 보고 들으며 느끼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낙원에 직접 가 있는 것 같았지요.

동시에 이 땅에 있는 자신의 몸도 여전히 호흡하며 주변의 상황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신이 낙원에 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이 땅에 있는 것 같기도 했던 것이지요.

사도 바울이 자기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신다고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영의 세계에 대해 전혀 모르고 오해하며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훼방거리를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이런 식으로 가려서 표현한 것이지요.

영적인 체험이 없는 사람이 사전에 아무런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이러한 상황을 겪게 되면 당연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몇 차례 이런 경험을 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지금이 어떤 상태인지’를 파악하므로 혼란스럽거나 당황하지 않고 영이 더 자유롭게 영의 세계를 돌아볼 수가 있게 되지요.

하나님 편에서 어떤 사람에게 영의 세계를 보여 주시기 위해 그의 영을 분리하게 하실 때는 바로 이러한 방법이 가장 바람직하며 올바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그만큼 마음을 영으로 이루었고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합당한 사람인 경우에 허락될 수 있는 방법이지요. 그래서 이런 방법의 경우는 쉽지가 않습니다.

환상을 통해 부분적인 것을 보여 주시는 경우는 은사를 통해 가능하지만, 이처럼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영을 분리하게 하는 것은 은사 차원을 넘어 성결과도 직접 관련이 있기 때문이지요. 환상을 통해서는 부분적인 것만을 볼 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전체적인 것을 보여 주시고자 할 때는 영의 분리를 통해 역사하시게 됩니다.

영의 분리를 이룰 때 그 사람이 아직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만큼 합당하지 않은 사람일 경우에는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영을 분리를 하는 방법이 아니라, 흔히 “입신”이라 말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천국을 보고 왔다고 하며 간증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처럼 “입신하여 천국에 다녀왔다.”고 간증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입신은 사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시는 경우이지요. 입신을 할 때는 몸이 호흡만 하고 있을 뿐 전혀 의식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 입신을 통해 영이 분리되는 경우에는 간혹 잘못되는 경우가 있지요. 물론 하나님께서 어떤 특별한 섭리 가운데 강권하여 역사하시므로 입신하게 되는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당연히 지켜 주시지만, 그렇다 해도 이 입신의 경우에는 위험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성결되어 진리로 무장된 영의 사람이 아니므로 자칫 분리된 영이 악한 영과 접하여서 잘못되는 경우도 있고, 영의 세계의 길을 잘못 들어서는 경우도 있지요. 또는 스스로는 입신하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입신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 생각 가운데 보고 말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입신의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통해 꼭 역사하시고자 할 때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이 아직 진리를 잘 알지 못하고 선과도 거리가 먼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고자 강권하여 이 입신이라는 방법을 통해 역사하시는 경우가 혹 드물게는 있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러한 입신의 방법을 통한 것이 아닙니다. 공의에 합당한 사람만 있다고 하면 당연히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영을 분리하는 정상적이고 합당한 방법을 통해 얼마든지 역사하실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영의 분리를 통해 영의 세계를 보는 경우라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새 예루살렘과 같은 깊은 영의 차원까지라도 볼 수가 있지요.

지금 사도 요한도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자연스럽게 영의 분리라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까지도 깊이 있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의 영을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으로 이끄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하늘 문을 여시고 사도 요한에게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말씀하고 계시지요.

“이 후에 마땅히 될 일” 즉 앞으로 있을 7년 환난과 7년 혼인잔치, 천년왕국과 백보좌대심판까지의 모든 일을 보여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이때 들려 온 주님의 목소리는 계 1:10에서 들었던 것처럼 나팔 소리와 같은 큰 음성이었지요.

주님께서 사도 요한의 영이 영의 세계로 들어올 것을 말씀하시자 사도 요한은 2절에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한 대로 이내 성령의 감동함을 입어 그의 영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갑니다.

사도 요한이 이때 보는 장면은 그 당시에 하늘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상황이었지요. 사도 요한은 많은 시간을 뛰어넘어 이렇게 미래에 하늘나라에서 일어날 일까지도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그것은 영은 시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뿐이지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사람의 영 또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과거와 미래의 어느 곳이든지 갈 수가 있습니다.

악한 영들도 영으로 된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일까지도 알 수 있는데 대신 그들은 과거와 현재의 일까지만 알 수 있습니다. 미래에 속한 일들은 어디까지나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예지 예정하심 가운데 섭리해 놓으신 것이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아실 수가 있지요.

악한 영들에게는 미래의 일까지 아는 것이 결코 허락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악한 영들에게는 악한 자들을 사주하여 자신들의 하수인처럼 부릴 권세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속한 앞일에 대해서는 약간 알 수 있지요.

예를 들어 악한 사람을 사주하여 다른 사람을 속이고 거짓말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앞일의 결과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악한 영들과 접하여서 사람의 운세를 봐 주고 점을 치는 사람들은 악한 영들이 알려 주는 과거와 현재의 상황 그리고 각 사람의 마음의 악의 정도를 가지고 마치 앞일에 대해 예측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공간을 초월하여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은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뿐이시며 이러한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실 때 합당한 사람을 통해 앞일에 대해서도 밝히 풀어질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본문 2절에 “보라” 하며 이때부터 분리된 영이 보고 듣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 장소가 바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었지요. 영이 분리되어 간다 해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허락되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욱이 사도 요한은 지금 하나님의 보좌와 함께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까지 보고 있지요.

물론 아버지 하나님의 얼굴까지도 자세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3절에서 사도 요한은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 그리고 그 주변까지도 정확하게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대에 가장 합당한 사람인 사도 요한을 통해 마지막 때에 대해 밝히 알리시고자 이처럼 특별한 섭리 가운데 영의 깊은 것까지도 보여 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합당한 사람만 있다면 어찌하든 그를 통해서 앞으로의 되어질 일들에 대해 알리심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깨어 신부단장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릴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앞일에 대해서까지 알려 주실 만큼 아버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사람이 드물지요.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알려 주실 수도 없습니다.

앞일에 대해 알려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임의대로 하시는 것이 아니지요. 철저한 공의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이 나와야만 그를 통해 알려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아무에게나 알려 주신다면 그것이 공의에 맞지도 않는 것이지요.

만약 앞일에 대해 알게 된 사람이 아직 악이 있어서 그것을 사사로이 이용할 때는 오히려 공의 가운데 원수 마귀 사단에게 훼방거리를 내어줄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사도 요한도 공의에 합당한 그릇을 만들었고, 공의에 합당한 기도를 쌓았기 때문에 이처럼 영계의 문을 열고 하늘의 비밀을 끌어내릴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다음 시간에는 사도 요한이 보았던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 즉 하나님의 형상과 주변 상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앞일에 대해 안다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떠하냐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달라지게 되지요.

언제 시험이 있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전혀 준비하지 않으면 미리 알았던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아무리 앞일에 대해 알려 주고 그것을 대비하는 방법까지 알려 주어도 정작 스스로가 그것을 마음에서 깨닫고 준비해 나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도 마찬가지이지요. 아무리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밝히 풀어 주어도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여전히 그대로 갑니다.

계 22:10-12에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는 말씀대로지요.

아직은 기회가 있기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번 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선포케 하심으로 귀 있는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고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도록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알아서 우리 모든 만민의 성도님들과 또한 이 말씀을 듣는 전 세계 모든 분들은 온전히 깨어 신부단장 하는 복된 신앙생활을 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4-13 오후 2:12:11 Posted
2023-10-05 오전 10:38:04 Updated

다음 글 3차 영혼육 (10) 이전글
이전 글 모든 것을 다 내어 줄지라도 다음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