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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40) 십사만 사천의 하나님의 종들 [계 7:5-10]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7.01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해서 십사만 사천 명의 하나님의 종들에 대해 설명합니다.
이들은 7년 환난 동안에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세워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에서 각각 만 이천 명씩이 나온다 했지요. 이것은 육적인 의미로서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 했습니다.

십사만 사천 명은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족속들 가운데서 나오게 되지요. 이들을 이스라엘 지파에서 세웠다 표현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종들이라는 영적인 의미입니다.

이들 십사만 사천 명을 설명할 때, 그냥 간단하게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각각에서 일만 이천 명씩 십사만 사천 명”이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굳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일일이 하나씩 거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들의 이름 속에는 영적으로 구원받아 성결에 이르게 되는 과정이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은 이스라엘 곧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입니다. 야곱이나 야곱의 아내들이 자녀를 낳을 때마다 나름대로 의미를 담아 지은 것이었지요.

예를 들어 야곱의 장자 “르우벤”의 이름은 “보라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르우벤의 어미 레아가 첫아들을 낳았을 때 자기의 기쁨과 자부심을 담아 지은 이름입니다. 이처럼 레아는 자기 상황에 맞게 의미를 부여하여 이름을 지은 것이지요. 그런데 이 이름의 의미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영적으로는 다르게 설명됩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롭게 배열하셨지요. 이 배열의 순서에 따라 각각의 이름에 담긴 의미를 영적으로 살펴보면, 성결을 향해 가는 신앙의 성장과정이 설명됩니다.

맨 먼저 나오는 지파는 유다 지파인데 원래 이스라엘의 장자는 르우벤임에도 유다 지파가 르우벤보다 앞서 나온 이유는 바로 유다 지파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어떠한 사람의 혈통을 타고 나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지요. 그러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유다 지파이기에 육적인 혈통으로는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오셨다 말하는 것이고 이처럼 예수님께서 나신 유다 지파가 당연히 열두 지파의 머리로 나오는 것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에는 “찬송함”이라는 뜻이 있지요.
이는 바로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찬송한다는 의미이지요.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날에 허다한 천군이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노래했던 것과 같이 구세주의 나심을 찬송한다는 의미입니다.

다음으로 르우벤이란 이름에는 “보라 아들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지요.
바로 찬송 가운데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이 신앙의 첫 단계입니다. 비로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지요. 믿음의 단계로 말하자면 1단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나면 세 번째 이름인 갓이 의미하는 ‘복됨’이라는 뜻과 같이 복된 사람이 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복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의 참된 복을 받게 되는 것이지요. 복된 소식인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구원에 이르므로 복된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복된 사람이 되고 나면 이제부터 마음 안에 기쁨이 넘치는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지요.

네 번째 이름인 아셀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마귀의 자녀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는데 주를 영접하고 천국에 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그러니 구원받아 참된 신앙생활을 할 때는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반면에 교회를 다닌다 해도 구원의 도를 바로 알지 못하면 기쁨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 하나님을 만나고 주님을 영접했을 때는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쁨이 넘치다가도 점차 기쁨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결코 구원의 기쁨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진리대로 살지 않고 점점 세상과 타협하는 마음이, 하나님과 멀어지기 때문에 기쁨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날이 갈수록 해가 갈수록 구원의 기쁨이 더해지시길 바랍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사람마다 차이는 좀 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제 믿음의 2단계로 접어들게 되지요. 이때부터 말씀을 들어 진리를 알게 되면서 죄를 싸워 버리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다섯 번째 이름인 납달리는 “경쟁한다”라는 뜻인데,
마 11:12에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는 말씀과 같이 이제는 죄를 열심히 싸워 버리기 시작하면서 천국을 침노해 들어가는 것이지요.

더 좋은 천국에 대한 사모함이 생기기 때문에 어떻게든 빨리 직분도 받고, 사명도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 봉사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신앙 안에서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되지요. 죄를 열심히 싸워 버리며 충성하다 보면 믿음의 3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여섯 번째 “므낫세”라는 이름은 “잊어버린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잊어버린다는 말일까요? 어떤 서운함이나 억울함과 같은 감정들 즉 악을 품지 않고 잊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점차 성장하게 되면 점차 마음에 감정을 품지 않는 단계에 이릅니다.

서운할 수 있는 일이나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좋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이해하고 품으며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려고 노력하게 되지요. 자신에게 악을 행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음에 “꽁” 하고 담아두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기회가 되면 그것을 갚아 주려는 마음이 아니지요. 물 흐르듯이 흘려보내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마 6:12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면 다시는 그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으십니다. 이러한 은혜를 입고 있는 여러분은 마땅히 여러분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용서하고 사랑하며 죄를 기억치 않을 수 있어야 하지요.

열두 지파 중에 빠진 “단”의 의미는 오히려 “억울함을 푼다”는 뜻입니다.
상대를 품고 이해하며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 억울함을 풀고자 하는 사람이 있지요. 억울함을 풀고자 하는 마음, 감정을 품고 있다가 갚으려는 마음이 돼서는 안 됩니다. 억울함을 푼다는 의미의 단 지파가 열두 지파에서 빠진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에서 이러한 악한 마음은 다 빼내 버려야 합니다.

므낫세는 열두 지파 중에 여섯 번째 즉 중간 정도에 나옵니다.
믿음의 5단계 중에서도 마음에 감정을 두지 않고 잊을 수 있는 단계는 3단계 중반을 넘어야 합니다. 믿음의 1단계나 2단계에서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을 마음에서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서 오른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왼편도 돌려대는 것이 진리인 줄은 알지요. 하지만 실제로 애매히 오른뺨을 맞게 되면, 믿음의 1단계에서는 너무나 속상하고 상대가 괘씸하게 여겨집니다. 자신도 즉시로 갚아 주려는 마음이 들게 되고 결국 행함으로도 나오게 되지요.

믿음의 2단계에 있는 사람은 상대에게 애매히 뺨을 맞았다 해서 즉시로 맞서 싸우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어찌하든 참아 보려고 하지만 속에서는 부글부글 끓지요.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므로 감정이 폭발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믿음의 3단계에서도 물론 속으로는 열이 납니다. 하지만 마음속의 감정과 맞대응하고 싶은 충동을 열심히 참습니다. 믿음의 3단계 정도 되면 이처럼 폭발하지 않고 참을 정도는 되지요. 이렇게 마음속의 악들과 싸워 나가다 보면 이제는 눌러 참는 것이 아니라, 점차 감정 자체가 생기지 않게 됩니다.

3단계 중반을 넘어 반석 정도에 들어서면 이때는 악한 일을 당해도 어느 정도 참고 인내하며 잊어버릴 수가 있지요. 원한을 풀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눌러 참는 것도 아니며, 상대의 잘못을 아예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지금 이 단계에 비추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당한 일을 당했습니다. 애매히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혹은 내가 많이 수고한 일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공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신지요? 상대의 허물을 다 잊어버리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만 바라보십니까?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드리는 신앙이라면 그만큼 영으로 가까이 들어오신 것입니다.

다음은 시므온입니다. “시므온”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들으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감찰하시고 간구와 기도를 들으시는 차원을 의미하지요. 물론 하나님께서는 늘 자녀들을 살피시고 간구와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러나 영의 차원으로 깊이 들어오면, 하나님께서는 더욱 신속히 기도와 간구에 응답해 주십니다. 육의 신앙에 머물고 있을 때와 영의 신앙으로 들어왔을 때와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차원이 다르지요.

영의 신앙으로 들어왔다 해도 온 영으로 들어왔을 때와 비교하면 또 응답의 차원이 크게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것을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심었습니다. 이때 영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일반적으로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받게 됩니다. 대략 갑절의 축복은 받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영으로 들어오고 온 영으로 들어오면 삼십 배, 더 나아가 육십 배, 백배의 축복도 받을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으로 들어오기 전에는 오랫동안 작정하여 기도하고 금식해야 하는 일도 영으로 들어오게 되면 응답의 기간이 훨씬 짧아지지요. 온 영으로 들어오면 마음에 품기만 해도 필요한 순간에 즉시로 응답이 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해 두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여덟 번째 레위는 “연합함”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주님과 연합한다는 의미입니다. 엡 5:31-32에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여기서 교회란 성도 개개인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이 주님을 영접하면 성령을 받고, 주님과 하나가 되지요. 남녀가 혼인하여 하나가 되듯이 신랑 되신 주님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과 연합하는 것은 좀 더 깊은 차원의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대로 순종하여 진리 안에 온전히 거한다는 의미이지요.

요 17:21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하셨지요. 주님을 사랑하고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 안에 거합니다. 마음의 죄악까지 벗어 버리고 온전히 주님과 하나 되기 위해 노력하지요.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진리 가운데 살지 않고 여전히 죄 가운데 살면 오히려 죄의 주관자인 마귀와 연합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니 참으로 믿음이 있다면 부지런히 마음의 악까지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온전히 성결되어 진리 안에 거해야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주님과 하나 된 자녀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며 영광을 받으십니다.

다음으로 아홉 번째는 잇사갈입니다. 잇사갈의 이름에는 ‘값’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곧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의미합니다.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충성하고 봉사했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그에 따른 상급을 주십니다. 잇사갈이란 이름은 바로 죽도록 충성하며 온 집에 충성하기 위해 달려가는 단계를 의미합니다.

영으로 들어간 사람은 이 땅의 썩어질 어떤 것에도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하늘의 상급만을 바라봅니다. 자신의 마음과 뜻과 정성과 시간을 다해 주어질 상급의 값을 치러 나가는 것입니다. 계 2:10 후반부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말씀합니다. 죽도록 충성해 나가는 사람에게는 생명의 면류관 이상의 값이 주어집니다. 적어도 3천층 이상의 처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열 번째, 스불론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바로 ‘거함’입니다.
이 땅에서도 온전히 주님 안에 거하면 천국에서도 그에 합당한 곳에 거할 수 있습니다. 빛 가운데 거한 만큼 천국에서도 가장 빛난 곳에 거하게 되지요. 요 15:7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대로 이때는 심은 것의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축복도 받고, 마음에 품는 대로 응답되는 것이지요.

열한 번째인 요셉이라는 이름에는 ‘더함’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온 영의 차원으로 들어오게 되면 자신만 축복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까지도 넘치게 축복을 받지요. 요셉으로 인해 결국 야곱과 그의 모든 가족들까지도 극심한 가뭄에서 구원받은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차원까지 들어오게 되면 장차 천국에서는 어떤 자리에 있겠습니까? 요셉과 같은 차원의 신앙에 이르렀다면 당연히 새 예루살렘의 영광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열두 번째는 베냐민입니다. 베냐민의 이름에는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는 주님께서 앉으시지요. 행함에 따라 얼마든지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을 수 있습니다. 마 20:23에 “가라사대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하셨지요.

주님의 보좌 좌우편에 앉는 영광도 꼭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에 합당한 자격을 갖춤으로 믿음으로 침노해 들어온 사람의 몫이지요. 열심히 죄를 싸워버리고 성결된 사람, 온 집에 죽도록 충성한 사람, 이런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합당한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더 닮은 사람일수록 하나님 보좌에도 더 가까이 가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모두가 열심히 천국을 침노하여 이처럼 존귀한 자리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이름에 담긴 의미와 그것이 성결의 단계, 곧 믿음의 단계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두 지파를 통해 7년 환난 동안에도 구원의 섭리를 이루십니다. 이때는 심히도 짧은 시일 내에 온 세계에 복음이 전해져야 하지요.

그래서 적은 수가 아닌 십사만 사천 명의 하나님의 종들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들을 통해 온 세계에 다시 한번 복음이 전파됩니다. 이때 7년 환난 이전에 주님을 영접하지 못했던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지요.

계 7:9-10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이때 종려가지를 들고 하나님과 어린양 즉,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많은 무리가 있지요. 이들이 십사만 사천에 의해 전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된 영혼들입니다.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다 했지요.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 중에서 나오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라 했지요. 십사만 사천 명의 하나님의 종들의 전도를 받아 구원에 이른 수는 십사만 사천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러면 그 수가 얼마나 될까요? 사실 100만 명만 되어도 그 수를 세기가 어렵습니다. 따라서 “큰 무리” 역시 그 수가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많은 영혼들이 이삭줍기를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9절에 이들이 흰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들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의미이지요. 종려가지를 흔드는 것은 하나님과 어린양 곧 주님을 경배하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많은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왕이신 주님을 맞이했습니다.

본문에 보니 이들이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했습니다. 작은 소리로 영광을 돌린다 해서 하나님께서 듣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의 기쁨이 넘치다 보니 자연히 큰 소리로 외치는 것입니다. 마음 중심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니 우렁찬 소리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기도나 찬양을 할 때도 중심으로 올리게 되면 크고 충만한 소리가 나오게 됩니다. 그렇다 하여 귀에 거슬리게 소리만 큰 것은 아니지요. 그 안에 은혜와 감동이 담겨 있기 때문에 듣는 사람도 함께 기뻐하며 충만해집니다.

구원의 소망이 끊어진 것과 같은 7년 환난 가운데서 구원을 받았으니 이들이 얼마나 기쁨과 감동으로 찬양하겠습니까? 이렇게 구원받은 무리들이 하나님과 어린양께 영광을 돌릴 때 이에 천사들이 화답을 합니다.

계 7:11-12에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했지요.
여기서부터는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오늘은 신앙의 성장 단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신앙은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러 있는지요? 5년 전, 10년 전과 지금의 신앙을 비교할 때 여전히 비슷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분은 안 계십니까?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제외된 단 지파는 순서로 볼 때 믿음의 3단계 반석에 들어가야 할 신앙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마음에 악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억울함을 풀려고 한다면 어찌하겠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이처럼 마음에 할례하지 않고 정체되어 버리는 분은 결코 없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은 신앙생활에 기쁨이나 감사가 있을 리 없지요. 오히려 짜증과 감정과 오해와 판단, 정죄 등 많은 죄의 담을 쌓아 가게 됩니다. 갖가지 문제가 찾아오기도 하지요. 이런 사람은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나에게 이런 문제가 왔는가?” 하며 자신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영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영적인 신앙생활은 마음의 할례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 했다 해도 마음에 할례를 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육적인 신앙생활에 머무는 것이지요. 육적인 신앙생활은 결국 한계를 맞게 됩니다. 미지근한 신앙이 되는 것이고, 형식적인 신앙이 되는 것이며, 세상과 타협하는 신앙이 되고 말지요.

여러분 모두는 부지런히 마음의 할례하며 영적인 신앙생활을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신앙이 날로 성장하여 주님과 하나 되고 더 나아가 주변이 함께 복을 받는 신앙이 되시고요. 이렇게 성장해 갈 때 바로 세상에 빛을 발하는 전도자의 역할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통해 7년 환난이 오기 전에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에게로 인도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장차 천국에서도 영원히 빛나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이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7-06 오전 11:04:01 Posted
2023-09-01 오후 4:00:36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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