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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41) 십사만 사천명의 전도자들 [계 7:11-17]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7.08
7년 환난의 기간은 크게 둘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전 3년 반과 후 3년 반이지요. 전 3년 반은 후 3년 반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그나마 환경이 좀 나은 편입니다. 물론 7년 환난 내내 극심한 자연재해와 전쟁 등 엄청난 재앙들이 늘 곳곳에서 발생합니다. 이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재앙들이지요.

그래도 전 3년 반이, 후 3년 반과 비교하면 그나마 상황이 좀 낫다는 말입니다. 전 3년 반 동안에는 아직 주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핍박이 그리 극심하지는 않은 때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유럽연합이 점차 그 정체를 드러내면서 주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핍박의 강도도 더해 가지요.

하나님께서 십사만 사천 명의 전도자를 세우시는 것도 전 3년 반에 속한 기간 동안입니다. 그나마 아직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환경과 조건이 허락되는 기간이지요. 이 기간 동안에 세움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의 전도자들은 주님을 위해 생명까지도 드릴 수 있는 중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이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쭉정이 신자로 있다가 이 땅에 떨어져서 순교를 통해 간신히 구원받은 사람과는 다르다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자칫 지옥으로 갈 뻔한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기회가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에 이르니 오직 감사 또 감사할 따름이지요.

이들이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 있다 했습니다. 흰 옷은 구원 받은 표이지요. 종려가지는 승리의 상징으로서 이것을 흔든다는 것은 경배와 영광을 돌린다는 표현입니다.

또한 이들은 큰 소리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외치고 있지요. 구원의 기쁨으로 인해 이처럼 큰 소리로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기쁨과 은혜가 충만하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큰 소리로 찬양도 하고 기도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주님께 영광을 돌릴 때 이에 화답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계 7:11-12에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는 24장로들이 있고 네 생물이 있습니다. 천사들의 머리급을 비롯하여 수많은 천사들도 주변에 정렬해 있지요. 구원받은 성도들의 찬양에 화답하며 이들 천사들도 하나님께 경배하고 있습니다. 이때 장로 중에 하나가 요한에게 질문을 합니다.

계 7:13에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이 장로가 흰 옷 입은 자들에 대해 몰라서 묻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당연히 흰옷 입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묻고 있는 것은 요한으로 하여금 깨달음을 얻고 더욱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말해 본인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것을 상대에게 일부러 묻는 것이지요. 이렇게 하면 그냥 알려 주는 것과는 상대방에게 심겨지는 정도가 다릅니다. 더 확실하게 입력이 되지요. 또한 왜 이런 질문을 하는가, 궁구해 봄으로 스스로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던 적이 있지요. 예수님께서 어찌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는지 모르셨겠습니까? 그럼에도 제자들에게 물으셨지요.

이에 제자들은 마 16:14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대답합니다. 당시에 예수님에 대한 안 좋은 말도 있었지만 제자들은 그런 것을 말씀드리지 않았지요. 이는 윗사람을 속이고 숨기려는 거짓 보고와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긍정적인 믿음의 고백이요 선한 고백인 것입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다시 의미 있는 영적인 질문을 던지시지요. 마 16:15에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던 것입니다. 이에 제자 중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지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는 이 고백으로 인해 예수님으로부터 엄청난 영적인 축복을 받습니다.

마 20:33에, 예수님께서 소경된 두 사람에게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셨지요. 이에 소경 둘은 대답하기를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했습니다. 그 결과 두 소경은 눈을 뜨게 되지요.

이때 만약 두 소경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금 소경된 우리를 보시면서도 우리에게 무엇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다니 예수님께서 농담을 하시나?’ ‘예수님께서 어찌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꼭 물어보셔야 아신다는 말인가?’ 이런 육신의 생각을 동원했다면 그들은 응답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본문에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은 누구이며 또 어디서 온 사람들일까요? 이미 앞에서도 설명 드린 대로 이들은 7년 환난 중에 이삭줍기를 통해 구원에 이른 영혼들입니다. 이들 중에는 겨우 구원에만 이른 영혼들도 있지만 십사만 사천 명의 하나님의 종들도 들어있지요.

이들이 다 같이 흰 옷을 입었다 해도 단지 구원에만 이른 영혼들이 입는 흰옷과 십사만 사천의 하나님의 종들이 입는 흰옷과는 다릅니다. 비록 7년 환난 중에 이삭줍기를 통해 구원에 이르렀다 해도 어떤 영혼은 3천층에, 어떤 영혼은 낙원 가장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러한 것들에 대해 아직 자세히 다 아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자신에게 질문을 했던 장로에게 다시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대답하게 됩니다. 이에 장로가 흰 옷 입은 무리에 대해 설명을 해주지요.

계 7:14-17에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이처럼 장로는 이미 흰 옷 입은 무리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에게 질문을 했던 것이지요. 이렇게 함으로써 사도 요한으로 하여금 잠시 궁구해 보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이제 장로가 그들에 대해 설명해 줄 때 더 밝히 깨우칠 수가 있고 마음에 더 명심할 수가 있다 했지요.

먼저, 장로는 그들이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라 했습니다. 바로 7년 환난 가운데서 믿음을 지키고 구원에 이르렀음을 말하지요. 이것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나마 이들은 마음에 선한 양심이 있었기에 7년 환난 중에라도 주님을 영접하고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중에 십사만 사천 명의 하나님의 종들은 특별한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단순한 구원의 차원이 아니라, 3천층을 바라볼 수 있는 자격을 얻었지요. 따라서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는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단순히 구원받았다는 의미이고 또 하나는 마음을 깨끗이 씻었다는 의미이지요.

‘옷’은 곧 ‘마음’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마음을 어린양의 피로 씻어 희게 하였다는 것은 성결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흰 옷 입은 무리들 중에는 단순히 구원에만 이른 영혼들도 있지만 3천층에 가는 영혼도 있는 것입니다. 7년 환난 중에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 구원에 이른다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어찌하든 악을 버리며 마음에 할례까지 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지요. 성령의 도우심을 받은 것이 아님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선한 양심 가운데 마음의 할례를 이루었으니 말입니다.

본 제단을 통해 출판되는 많은 책자들이 장차 7년 환난 때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책자를 비롯한 각종 말씀 자료들을 접하고 하나님의 뜻인 성결에 대해 깨닫게 되지요. 또한 이 책자들은 7년 환난 때 많은 영혼들을 깨우는 역할을 합니다. 이 책자들을 통해 교육받고 무장한 사람들이 다시 나가서 전파하기도 하구요.

그 만큼 책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되도록 더 많은 언어들로 번역하여 전 세계 구석구석까지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7년 환난 중에 구원받은 영혼들, 그들 중에서도 특히 십사만 사천 명의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긴다 했습니다.

이 말씀을 육으로 오해하면 안 되지요. 장차 천국에 가게 되면 아무나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사명이지요. 이러한 사명을 이삭줍기 구원을 통해 얻은 영혼들에게 맡기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들 중에는 3천층에 들어갈 자격을 가진 하나님의 종들도 있습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보좌 앞에까지 나갈 수가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본문에 장로는 왜 이렇게 말한 것일까요? 장차 우리가 천국에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새 예루살렘뿐만이 아니라 천국의 모든 곳을 두루 감찰하십니다. 천국의 어느 처소에 들어갔다 해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것과 같지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천국 어느 곳에 있는 영혼이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선 것과 같이 하나님과 교통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직접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대화하고 교통하는 것과는 다르지요. 그러나 천국은 어느 곳이나 하나님께 속한 영의 공간이기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대화하며 교통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또한 천국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진행되는 행사를 실시간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하늘에 펼쳐 주시는 스크린과 같은 장치를 통해 마치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듯이 현장의 상황을 볼 수가 있지요.

비록 이삭줍기 구원을 통해서지만 그래도 3천층에 들어간 영혼들에게는 주님을 뵐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 초대받아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서 펼쳐지는 연회나 행사에 참석할 수도 있지요.

반면에 낙원에 들어간 영혼들은 새 예루살렘에 한 번 가보는 것이 사실 영원토록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낙원의 대표자급 되는 영혼들에게 그나마 한 번쯤 기회가 주어질 뿐이지요. 막상 새 예루살렘의 누군가로부터 초대장을 받는다 해도 스스로가 민망하여 새 예루살렘에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낙원 가장자리에 들어가는 영혼은 어떻겠습니까?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긴다” 했는데 이 역시 진짜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성전이란 넓은 의미로 천국 전체를 의미하지요. 그러므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천국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산다는 의미입니다. 섬긴다는 의미도 봉사하고 심부름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을 뜻합니다.

장차 천국에 가서 실제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는 분들도 있지요. 시 101:6에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말씀합니다. 이러한 말씀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게 되면 그런 영혼에게는 영광스러운 자리가 허락되지요.

다음으로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들어온 영혼들에게 각각 합당한 처소를 주시지요. 1천층 이상에 들어가는 영혼들에게는 개인적으로 집이 주어집니다. 물론 낙원에 들어가는 영혼들에게도 공동으로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지구요.

“장막을 치신다”는 말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겨우 낙원에 들어가는 영혼들을 위해 그들의 거처를 마련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장막은 “볕이나 비를 막고 사람이 들어가 있도록 둘러치는 막”입니다. 고정된 집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임시적이고 유동적인 거처를 의미하지요.

이런 것처럼 낙원에 들어가는 영혼들에게는 고정된 자기만의 공간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상황에 따라 허락되는 범위 안에서만 쉼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1천층 이상에 들어가는 영혼들에게 있어서는 장막의 의미가 좀 다릅니다.

“장막을 치신다”는 말씀의 두 번째 의미는 낙원과는 달리 자신만의 거처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자신들이 이 땅에서 심고 행한 것에 따라 하늘나라에서 아름다운 상급과 장막으로 갚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3천층 이상에 들어가는 영혼들과 2천층 이하에 머무는 영혼들과는 주어지는 장막의 수준도 차원이 다르지요.

2천층에서 가장 좋은 집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자신이 원하는 시설이 하나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반면에 3천층부터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주어진다 했지요. 물론 새 예루살렘의 집들은 3천층의 집들과 비교할 때 또 차원이 다르구요. 그러니 정녕 천국을 소망하며 믿음이 있다면 어찌하든 3천층 이상, 기왕이면 새 예루살렘에 반드시 들어가고자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천국이 믿어지고 처소마다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 믿어진다면 어찌하든 더 좋은 천국의 처소에 들어가고자 하지 않겠습니까? 더 좋은 천국을 사모하지도 않고 침노해 들어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그것이 온전히 믿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7년 환난 중에 구원받은 영혼들은 전무후무한 환난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특히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혹독한 핍박과 환난이 가해지지요. 주리고 목마르고 이런 저런 해를 받으면서 그 환난과 핍박을 이겨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끝나고 그 영혼이 구원받아 천국에 이르게 되면 그때는 주림도, 목마름도, 해 받음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므로 다시 눈물을 흘릴 일이 없지요. 회개하며 흘렸던 눈물, 핍박과 환난 가운데 흘렸던 눈물 등 7년 환난 동안 신앙생활 하며 흘렸던 그 눈물을 하나님께서 씻어 주십니다. 특히 쭉정이 신자로서 이 땅에 떨어져 극심한 고통과 핍박 가운데 순교하여 간신히 구원에 이르게 된 영혼들은 그만큼 더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진작 기회를 주셨을 때 바르게 신앙생활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철저히 통회 자복하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그들이 순교하여 승리해 냈을 때 바로 이러한 눈물들도 하나님께서 다 씻어 주시지요. 하지만 여러분은 이런 과정을 겪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공중 강림하실 때 휴거되어 공중 혼인잔치에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면 슬픔과 고통의 눈물 없이도 아름다운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지요. 여러분 모두가 이러한 길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다음 시간부터는 일곱째 인을 떼는 사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 가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꼭 7년 환난의 고통을 견뎌내고 구원받은 영혼들의 눈물만을 씻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동안 신앙생활 하면서 많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초신자나 신앙이 어릴 때 흘리던 눈물과 신앙이 성장하여 성숙한 신앙이 되었을 때 흘리는 눈물과는 그 의미가 다르지요.

죄 때문에 회개하는 눈물, 시험이나 핍박이 힘들어서 흘리는 눈물, 자기 악과 감정 때문에 흘리는 눈물, 이러한 눈물은 아직 죄를 버리지 못하고 육에 머물 때 흘리던 눈물입니다. 그러나 영으로 들어오게 되면 더 이상 이런 육적인 눈물은 흘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흘리는 눈물, 영혼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 은혜와 감동과 기쁨과 감사의 눈물, 이런 눈물만을 흘리게 되지요. 영적인 눈물은 너무 도를 지나치게 애통하지만 않는다면 많이 흘릴수록 좋은 것입니다.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 의미 없이 떨어져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들에 의해 받아져서 하늘에 상급으로 쌓이지요.

여러분이 흘린 눈물을 장차 천국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상급과 영광으로 갚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떤 눈물을 흘려야 하겠습니까? 죄와 싸워버리기 위해 아무리 많은 눈물을 흘린다 해도 그것은 상급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연히 버려야 하는 죄를 버리기 위해 흘리는 눈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신속히 죄를 벗고 영으로 들어오셔서 하늘에 상급으로 쌓이는 눈물을 흘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쁨과 감사와 행복의 눈물만 흘리시고요. 전 세계에 아직도 주님을 모른 채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한 눈물도 잊지 마십시오.

늘 은혜와 감동의 눈물이 넘치는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방울방울 맺힌 여러분의 눈물을 통해 여러분이 아름다운 진주와 같은 영혼들로 나와져서 새 예루살렘 열두 진주 문을 당당히 통과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7-13 오후 1:21:24 Posted
2023-09-01 오후 4:00:36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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