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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53) 14만 4천명의 전도자 [계 14:1-10]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10.21
본문에 14만 4천 명의 전도자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계 7장에서 설명한 내용들을 다시 한번 상고해 보겠습니다.

7년 환난 중에 활동하게 될 이들 14만 4천 명의 전도자들은 사실 휴거되지 못하고 7년 환난에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듣고도 마음이 강퍅하여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또는 주님을 영접하고도 여전히 세상이 좋아서 세상과 짝하며 살았던 쭉정이 신자들과도 다르지요.

이들은 예수님에 대해 잘 알지 못하여 제대로 믿을 만한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도 못했던 사람들도 있는 것이고요. 누군가 예수님에 대해 제대로 전해 주었다면 분명히 믿었을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그것도 아주 뜨겁게 믿었을 사람들이지요. 그러한 기회를 얻지 못했기에 이들은 7년 환난 중에 떨어지고 맙니다.

이들은 이때부터 180도 변하지요. 휴거 사건을 보면서, 또한 7년 환난을 맞으면서 이들은 선한 양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참인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들었던 것이 진정 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설령 이전까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몰랐다 해도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을 보면서 비로소 주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 14만 4천의 전도자들은 자신만 주님을 영접하는 데에 그치지 않습니다. 휴거되지 못하고 이 땅에 남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지요. 그만큼 선한 중심을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자기만 믿고 구원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지요. 복음을 전하면 자신의 생명이 위험에 처할 것을 알면서도 어찌하든 한 사람이라도 더 함께 구원받게 하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에서 이러한 마음과 중심을 가진 사람들을 택하여 복음을 전할 일꾼으로 인쳐 주시지요. 그 수가 14만 4천 명인 것이고요. 그리고 이들 14만 4천 명의 전도자들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들은 주어진 시간동안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대부분이 죽음을 맞게 되지요.

악한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7년 환난의 갖가지 재앙 속에서 죽음을 맞기도 합니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이들은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사명을 감당하지요. 복음을 위해 죽도록 충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바로 이들의 죽음을 순교로 인정하시고 3천층의 영광을 허락해 주시지요. 이러한 14만 4천 명의 전도자에 대해 본문에서 다시 한번 언급하고 계십니다.

계 14:1에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만 4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이때 14만 4천의 전도자들은 더 이상 7년 환난의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온 산에 어린양과 함께 섰다” 했지요. 이때는 이미 순교하여 우리 주님과 함께 거룩한 곳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어린양과 함께 섰다”는 것은 그들이 주의 이름으로 순교했기에 받는 영광이 얼마나 큰지를 나타냅니다.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맞이하여 함께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했지요. 7년 환난에 살아남은 이 땅의 사람들 대부분은 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습니다. 즉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14만 4천의 전도자들은 어린양 곧 주님과 하나님의 인을 받았습니다. 이 땅에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주님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능력과 은혜의 인을 쳐주신 것이지요.

이처럼 이마에 주님과 하나님의 이름을 썼다는 데는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성령 시대에는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마음에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습니다. 그러나 7년 환난 중에는 성령이 거두어졌기에 이제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 속에 자기 인내와 의지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행위적인 증거를 통해 구원받기 때문에 이때는 마음에 인치는 것이 아니라 이마에 인을 친다고 하는 것이지요. 또한 이때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있어야 구원에 이를 수가 있기 때문에 어린양의 이름과 함께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계 14:2에 “내가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으니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은데 내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

계 1:15에 보면 우리 주님에 대해 설명하기를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했지요. 하늘에서 나는 소리는 듣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르게 들립니다. 말씀 안에 살지 못하는 사람이 만약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면 너무나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지요.

반면에 마음에 성결을 이루고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사람은 하늘에서 나는 소리에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소리가 우렁차면서도 온유하고 따뜻하며 청아하고 아름답게 들리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하늘의 소리가 어떻게 들릴까요? 굳이 하늘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해도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하냐에 따라 단에서 나오는 말씀도 다르게 들릴 것입니다. 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되고 짐이 되며 힘들게 느껴진다면 여러분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하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들었을 때 무엇이라 대답했습니까? 창 3:10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만약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아” “딸아” 부르신다면 기쁘고 담대하게 “아멘, 제가 여기 있나이다” 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 하늘에서 나는 소리는 바로 14만 4천 명의 전도자가 노래하는 소리입니다. 그들의 노래 소리가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과도 같았던 것이지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주님을 닮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주를 위해 순교할 수 있을 만큼 그 마음이 진리 안에서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그와 같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기에 그들이 올리는 찬양 소리가 맑고 우렁차며 청아하게 들렸던 것입니다. 또한 “큰 뇌성 같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는 권세를 나타냅니다. 마음을 선과 진리로 지키며 순교하기까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 드렸기에 천국에서 그들이 누릴 권세가 큰 것이지요.

7년 환난 중에 순교한 14만 4천 명의 전도자들은 3천층에 들어가게 된다 했습니다. 경작을 잘 받아 성결을 이루고 믿음의 4단계에 이른 자녀들과 동등한 자격을 얻게 되지요. 하지만 휴거 전에 마음을 영으로 일구어 3천층의 자격을 얻은 사람과 7년 환난 중에 순교하여 자격을 얻은 14만 4천 명과는 마음의 차이가 있습니다.

한 가지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갑이라는 학생과 을이라는 학생이 있습니다. ‘갑’이라는 학생은 대도시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녔지요. 반면에 ‘을’이라는 학생은 학교가 없는 섬 마을에 사는 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을이라는 학생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혼자 배워야 했지요. 그것도 정규적인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 안에 속성으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때 두 학생 모두 같은 과정을 거쳐 배우고 똑같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자격을 얻었다 해도 둘에게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을’이라는 학생은 학교생활을 통해 지식 이외에 얻을 수 있는 부수적인 경험을 전혀 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같은 반 친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선배, 후배가 있었던 것도 아니며, 단체 생활을 해볼 수 있는 기회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을’이라는 학생은 ‘갑’이라는 학생과 비교할 때 경험이나 정서, 마음씀 등이 다를 수 있지요. 꼭 이런 경우와 똑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14만 4천 명의 전도자의 경우도 좀 비슷합니다. 휴거 전에 경작을 통해 성결에 이르러 3천층에 들어가는 다른 성도들과는 좀 다르지요. 3천층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똑같이 얻었다 해도 우러나오는 향이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오늘날의 여러분은 기도할 때 그래도 여유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며 차근차근히 하나님께 아뢸 시간이 있지요. 때로는 어린 자녀가 아버지의 품에서 이야기하듯, 때로는 사랑하는 연인에게 고백하듯, 사랑의 고백과 기도를 올릴 수가 있습니다. 날마다 그러한 기도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 주님, 또 성령님과 사랑과 신뢰를 쌓아 나갈 수 있지요. 나중에 천국에 가서도 이처럼 주님과 나눈 행복한 시간들을 추억으로 간직하며 대화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7년 환난 중에 사역하는 전도자들은 기도를 한다 해도 좀 다릅니다. 그들은 이미 성령이 거두어진 상태에서 언제 잡혀서 순교해야 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 속에 살아갑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에 그 안에 어떻게든 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뜨거운 사명감으로 불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처럼 편안하게 사랑을 고백하며 추억에 남을 시간을 쌓아가기란 쉽지 않지요.

물론 하나님께서 14만 4천 명에게는 특별한 은혜와 능력으로 인쳐 주십니다. 그래서 충만함이나 열정이 식지 않고 순교의 순간까지 사역을 감당할 수가 있지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늘 죽음의 위협이 있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오늘날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기란 어렵습니다.

“주님,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찬양하는 이 시간이 너무나 행복해요, 천국의 연회 때는 어떤 모습으로 춤추며 어떤 대화를 주님과 나눌까요?” 이런 내용의 기도를 드릴 만한 마음의 여유도 상황도 별로 없지요. 날마다 들려오는 재앙과 핍박의 소식을 접할 때마다 더욱 비장한 각오를 다져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지키며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한 절박한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입니다. 기도의 예 한 가지만 들었지만 이처럼 휴거 전과 휴거 후의 신앙생활은 상황과 형편이 너무나 다릅니다.

그러니 비록 3천층의 자격은 똑같이 얻었다 해도 각각 다른 환경 가운데서 자격을 얻었기 때문에 마음에서 나오는 향도 다른 것이지요. 그렇다고 양쪽을 비교할 때 어느 쪽이 더 낫고, 어느 쪽이 못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14만 4천 명의 전도자는 비록 7년 환난 중에 주님을 영접했다 해도 그 이전에 신앙생활 했던 그 누구에 못지않게 3천층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었지요. 비록 이전에는 주님을 영접할 기회가 없었지만 일단 주님을 영접한 후에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생명을 다해 복음을 전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순교하기까지는 비록 짧은 시간밖에 없지만 중심이 곧고 선하여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진리로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들이지요. 더구나 이들이 순교에 이르기까지는 얼마나 더 선과 진리로 행하고자 했겠습니까?

여러분도 어떤 시험이나 연단이 오게 되면 더욱 깨어 기도하며 마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말 한마디라도 더 근신하며 생각과 행동에도 더 신중을 기하지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할 것이고, 원수 마귀 사단에게는 송사거리를 내어주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며 노력해 나갑니다.

14만 4천 명의 전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부터 순교하기까지 사실 매 순간이 위태로운 상황의 연속입니다. 그런 가운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진리 안에 거하려고 더욱 노력하게 되지요. 더구나 온 세상을 지배하는 어둠에 맞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 마음에 선과 진리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들은 주어진 시간 안에서 최선을 다해 결국 3천층의 자격을 얻게 됩니다. 설령 그들 중에 좀 부족한 사람이 있다 해도 순교에 이르렀다는 그 사실을 통해 그들의 중심을 증거해 보인 것이 되지요. 시간만 좀 더 주어진다면 능히 성결을 이룰 수 있는 중심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과적으로 이들 14만 4천 명에 대해서는 그들의 죽음을 순교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3천층의 자격을 인정받았기에 그들이 드리는 찬양에는 진리의 마음이 담겨 있지요. 진리의 마음을 담아 드리는 찬양 소리는 많은 물소리와 같이 청아하고 웅장하며 아름답게 들립니다.

또 거문고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소리와 같지요. 이런 찬양의 소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어둠의 세력까지도 물리치는 힘과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처럼 진리의 마음이 담겨진 아름답고 힘 있고 권세 있는 찬양의 소리를 하나님께 올려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14만 4천의 노래는 어떤 내용일까요? 그들은 비록 예전에는 주님을 잘 알지 못해서 휴거되지 못하고 환난 중에 떨어졌지만, 늦게나마 크신 긍휼을 얻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 고난의 세월 속에서도 주를 믿으므로 한 영혼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생명 다해 사명을 감당했지요. 이런 과정 속에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을 높이는 내용의 찬양을 합니다.

또한 7년 환난의 참혹한 재앙 속에서도 남겨진 영혼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찬양하지요. 생명을 바쳐 하나님의 섭리를 이룬 그들이 정결한 마음으로 감사와 감격을 담아 한 목소리로 찬양할 때 그 찬양의 향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하나님 앞에도 진한 향으로 올라가며 이것을 듣는 사도 요한도 감동을 입었던 것입니다.

계 14:3에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만 4천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이들 14만 4천이 부르는 찬양은 구원받은 다른 성도들의 찬양과는 구별됩니다. 물론 7년 환난 전에 구원받고 휴거된 성도들도 각 사람의 마음에 따라 찬양의 향이 서로 다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동정녀 마리아의 향이 다르고, 사도 바울과 아브라함의 찬양의 향이 다르지요.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과 수많은 백성을 인도하며 험난하게 광야 생활을 한 모세가 올리는 찬양의 향이 어찌 같겠습니까? 사람마다 중심과 마음이 다르고, 각자의 사명과 연단의 체험이 다르니 그 찬양의 향도 서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중에서도 14만 4천 전도자들의 찬양은 아주 특별히 구별이 됩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그들은 3천층에 들어온 모든 성도들 중에서도 너무나 특별한 과정을 겪은 사람들이기 때문이지요. 이미 구원의 문이 닫힌 상태에서 뒤늦게 구원받은 그들의 감사와 감격의 마음이 진한 찬양의 향으로 나오게 됩니다.

7년 환난의 그 참혹한 상황 속에서 매순간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복음을 전했던 그들의 마음을 누가 알겠는지요? 그 특별한 체험을 직접 해본 사람 외에는 알 수가 없지요. 그래서 14만 4천 인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다 하신 것입니다.

계 14:4에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여기서 여자란 영적으로 세상을 뜻합니다.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다”는 것은 어둡고 음란한 세상을 본받지 않으며 비진리와 타협하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눈앞의 위협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정욕적인 것이나 육적인 편안함에 마음을 빼앗기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온 힘과 생명을 다해 분주히 뛰었지요.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 간다”는 말씀처럼 오직 주님의 뜻을 따라 순교의 자리까지 갔습니다. 이들은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사람 가운데서”라는 말은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 중에서가 아닙니다. 7년 환난 중에 있는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라는 뜻이지요. 이들은 복음을 잘 알지 못해 휴거 받지 못했지만 7년 환난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볼 때 신속히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지요.

원치 않는 순교를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섭리 가운데 순교하게 됩니다. 기꺼이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중심들이지요. 하나님께서는 그 중심을 보시고 땅에 떨어진 많은 영혼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도록 그들을 전도자로 뽑아 인치신 것입니다.

이처럼 이 땅에 남은 사람들 중에 남들보다 먼저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처음 익은 열매”라 했고 또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라” 한 것이지요.

이들 14만 4천 명의 전도자가 순교하고 나서도 이 땅에는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의지로 끝까지 적그리스도에 대항하고 순교하여 구원에 이르러야 하지요. 이렇게 전도자들의 전도를 받고 주를 영접한 사람들과 혹은 쭉정이 신자였다가 뒤늦게 회개한 사람들은 설령 순교한다 해도 낙원밖에 갈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순교하여 낙원에 가는 사람들 중에도 어떤 사람은 비교적 일찍 순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끝까지 고난 받다가 순교하기도 합니다. 짐승의 표를 받지 않기 위해 끝까지 버텨야 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고 순교하지요. 이때는 육의 생명이 오래 붙어 있는 것보다 오히려 일찍 순교에 이르는 것이 복입니다.

그렇다면 왜 누구는 좀 수월하게 일찍 죽임 당하고 누구는 오래 살아남아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될까요? 이것도 철저히 하나님의 공의에 따른 결과입니다. 각 사람이 쌓은 선악의 정도와 의심하는 정도에 따라 순교하는 시기에도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먼저 순교할 수 있는 은혜를 입었다면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그만큼 선과 진실을 쌓은 것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이전에 악을 많이 쌓았을수록 구원의 값으로 치러야 할 대가도 큰 것이지요.

계 14:5에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이는 그들이 얼마나 진리 가운데 살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말씀이지요. 약 3:2에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입에 거짓말이 없다는 것은 마음 자체가 진실하다는 뜻입니다. 흠이 없다는 것은 성결되었음을 뜻하지요. 주님을 영접하고 몇 년 되지 않는 기간 속에 이렇게 흠 없는 모습으로 순교하기에 이르렀다면 그 중심이 얼마나 합당한 사람들입니까?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도 나름대로 선과 진실을 추구하여 양심에 따라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런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는 14만 4천 명을 택하심으로 최후의 7년 환난 속에서도 다시 한번 구원의 섭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14만 4천과 두 증인은 결코 희망을 찾아 볼 수 없는 절망의 땅에서도 최후까지 구원의 길을 여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그리고 진실한 마음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 마지막 섭리를 이루는 도구가 되었던 사람들은 천국에서 그만한 영광을 누리는 것이고요.

계 14:6에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

이 당시는, 그동안 공중 권세 잡고 있던 악의 영들이 이미 다 이 땅으로 쫓겨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공중은 하나님께 속한 영역이 되었지요. 인간 경작의 기간 동안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잠시 내어주셨던 공중이 다시 하나님께 속한 빛의 영역이 된 것입니다. 이 공중을 천사가 날고 있는데 그는 땅에 거하는 자들 곧 나라와 민족과 족속과 언어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습니다.

벧전 1:24-25에 보면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했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이 복된 소식 즉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변하지 않지요. 하나님의 말씀만이 오직 참이기에 이 말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 왔고 지금도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모두가 심판대 앞에 설 때에 바로 진리인 이 말씀에 비추어 심판을 받습니다.

요 12:48에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말씀하셨지요.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심판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혹여라도 누군가 마지막 심판 날에 “나는 복음에 대해 듣지 못해서 못 믿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땅에 거하는 모든 자들에게 복음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지요. 7년 환난 중에도 얼마든지 기회를 주셨고요. 사람들 스스로가 그 기회를 잡지 않은 것뿐입니다.

사실 7년 환난이 막바지에 이른 이 시점쯤 되면 이 땅에 있는 사람들 중에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휴거 사건 전에도 이미 복음을 접할 기회는 많았지요. 거기다가 휴거 사건을 통해 전 세계는 다시 한번 복음을 접할 기회를 가집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휴거사건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심판과 천국과 지옥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요. 또한 7년 환난 동안에 14만 4천의 전도자들이 전 세계를 누비며 열심히 복음을 전합니다. 여기에다 두 증인까지 등장하여 놀라운 권능과 함께 복음을 전하지요.

이처럼 복음을 접할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잡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당장 눈앞의 유익과 생명에 대한 집착 때문에 대부분이 적그리스도에게 동조하고 말지요. 그러니 마지막 심판 날에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나는 복음을 듣지 못해서 못 믿었습니다.” 이렇게 변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양심 심판의 적용을 받는 사람은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주셨고 마지막 날에 바로 이 복음으로써 심판의 잣대를 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계 14:7에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여러분은 하나님이 두렵습니까? 아니면 전혀 두렵지 않나요? 사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다만 ‘그 두려움이 어떤 종류의 두려움이냐?’ 그것이 문제이지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에도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내심 신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물론 신을 인정하는 사람의 경우이지요. 그러나 겉으로는 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말해도 마음 한편으로는 ‘혹시라도 신이 정말 있으면 어쩌지?’ 이런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악을 행하거나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일을 했을 때는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둘째로, 믿는 사람 중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우로서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죄를 짓는 경우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들었고, 천국과 지옥에 대해 들었지요. 또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럼에도 말씀대로 살지 못하여 어둠에 거하니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는 그래도 믿음이 있다 할 수 있지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짓고 어둠 가운데 살 때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사람이 여전히 죄와 어둠 가운데 살아가고 그러면서도 두려움마저 없다면 이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다 결국 양심에 화인 맞게 되기도 하고 하나님을 대적해 나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도 그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두 가지 경우의 두려움과는 다르지요.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나오는 두려움입니다. 엄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오는 두려움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한다고 해도 이러한 두려움은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 것이고 더욱 성결되기 위해 노력하지요. 결코 교만해질 수도 없고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수도 없는 것이고요. 물론 더 깊은 영의 차원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자체가 없는 단계도 있습니다.

이러한 차원에 이르렀다 해도 결코 하나님 앞에 무례하지 않으며, 자신이 지켜야 할 선을 넘지 않지요. 오히려 더욱 하나님을 의뢰하며 오직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게 됩니다. 고전 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지요.

본문에 공중을 나는 천사도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며 심판의 때가 가까웠음을 알리고 있지요.
여기서 말씀하는 ‘심판하실 시간’에도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나 비록 주님을 영접했다 해도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죽는 그 순간이 심판의 시간입니다. 지금 당장 영혼을 부르시면 그 순간 지옥의 판결을 받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심판하실 시간이란 7년 환난 동안에 이 땅에 임할 심판을 의미합니다. 7년 환난을 통해 이 땅에 남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행한 대로 그 값을 치르게 됩니다. 공의에 따라 정확한 값을 치르지요. 그 값을 합당하게 치른 사람 중에는 이삭줍기 구원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에 이 7년 환난의 기간 동안 더 많은 악을 쌓으므로 다가올 마지막 심판 날에 그 값을 치를 사람도 있습니다.

셋째로, 심판하실 시간이란 주님의 지상 재림의 때를 말합니다. 물론 정확하게 말하자면 백보좌대심판의 때가 마지막 심판의 시간이지요. 하지만 주님의 지상 재림과 함께 7년 환난이 막을 내리게 되면 사실 그때가 모든 심판을 위한 마지막 순간입니다. 지금 천사들이 마지막 심판하실 시간이 가까웠다고 경고하고 있지요. 그만큼 7년 환난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시작이십니다. 이 땅과 천지 만물을 만드시고 인간 경작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지요. 그러므로 모든 역사가 마무리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정확한 계획 안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되고 마무리되지요.

계 14:8에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하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하더라”

여기서 바벨론이란 영적으로 원수 마귀 사단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들의 조종을 받아왔던 적그리스도의 세력을 의미하지요. 그러므로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진다는 것은 이제 원수 마귀 사단에게 허락되었던 시간이 다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미 공중으로부터 이 땅으로 쫓겨난 그들이 최후까지 발악하던 것도 이제는 끝날 때가 되었다는 말이지요.

원수 마귀 사단의 멸망은 곧 적그리스도의 세력의 몰락을 의미합니다. 여러 나라가 연합하여 이루었던 공동체가 분열의 길로 접어드는 것이지요. 세상의 모든 것을 장악하며 마치 그 권세가 영원할 것 같았던 적그리스도는 마침내 분열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 바벨론 곧 적그리스도에 대해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했습니다. 적그리스도는 전 세계를 주관해 가며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만들어간 장본인입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음행’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모든 것이지요. 하나님을 대적하여 비진리를 행하고 하나님과 원수 되게 만드는 모든 것입니다.

7년 환난 중에는 적그리스도의 세력에 동조하며 그들과 연합했던 사람들이 바로 음행에 동참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음행에 동참한 사람들은 진노의 포도주를 먹게 됩니다. 포도주란 원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지요.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기고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또한 입술로는 믿는다 고백하면서도 음행에 동참했다면 그런 사람에게는 예수님의 흘리신 피가 오히려 진노의 포도주가 됩니다. 결국 지옥의 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계 14:9-10에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이제 세 번째 천사가 등장하며 이 땅에 남은 사람들에게 임할 심판을 말합니다. 짐승의 표 666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드렸는데 7년 환난 중에 후 3년 반에 이르면 이 짐승의 표를 받도록 하는 일이 생기지요. 물론 적그리스도는 이 일을 서서히 추진하지만 후 3년 반의 때가 되면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강제적으로 이 표를 받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 표를 받는 것은 적그리스도에게 동조한다는 뜻이며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게 된다는 의미이지요. 이렇게 해서 이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신다 했습니다.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했습니다. 이는 어떤 용서나 긍휼 자비가 전혀 없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최후에 최후까지 주어진 기회마저도 잡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처럼 두려운 심판과 형벌만이 기다리고 있지요. 바로 불과 유황불의 고난입니다.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양 앞에서” 이러한 고난을 받는다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각 사람의 행위를 감찰하는 천사가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한 명의 천사를 더 붙여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도와주도록 하시는 것이고요.

각 사람에게 붙여진 천사는 사람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의 모든 것을 기록합니다. 말과 행동 생각과 마음에 품은 것까지라도 낱낱이 기록하지요. 이것이 마지막 심판 날에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마 12:36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각 사람의 일거수일투족과 심지어 생각과 마음까지 기록한 천사가 마지막 심판 날에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그런 적이 없는데요?” 한다면 이 천사가 나서서 자신이 기록했던 것을 정확하게 증거로 제시하지요. 그러니 이유나 변명, 핑계, 거짓말 등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어린양이신 우리 주님도 심판대 앞에서 심판의 기준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서 가르치시고 친히 본이 되어 행해 주셨던 모든 말씀과 행함이 심판의 근거가 되는 것이지요. “믿습니다.” 고백하면서도 죄와 어둠 가운데 살았던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과 행함을 비추어 준다면 결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거룩한 천사와 주님 앞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심판이 이루어지며 그 결과에 따라 불과 유황의 판결이 나게 되지요. 그 고통은 영원히 쉼이 없습니다. 반면에 이러한 고통과는 상관없이 영원토록 영광과 권세를 누리며 살아갈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영원한 고통이냐 영원한 행복이냐를 결정할 심판에 대해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예전에 널리 유행하던 말 중에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합니다.’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선택의 순간을 만나게 되지요. 한 번 선택을 잘못하고 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다음 선택의 순간의 결정에 따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한 번 잘못된 선택을 하고 난 후에 나중에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오히려 또 다른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지요. 또는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로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끝까지 아무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마음은 7년 환난 중에도 곳곳에 드러나지요. 휴거 되지 못하고 이 땅에 떨어진 사람들이라 하여 그들을 그냥 외면하고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비록 성령은 거두어진 상태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은혜의 기회를 주시지요. 최후에 최후까지도 구원의 길은 열어 놓으십니다. 하물며 지금 은혜의 시대에는 어떻겠습니까?

지금은 구원이 문제가 아니라 새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밝히 열어 놓고 계시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때에 여러분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하고 계십니까? 매 순간의 선택이 새 예루살렘을 향한 길인지 아니면 오히려 뒷걸음하는 길인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여러분의 한 걸음 한 걸음이 오직 천국 새 예루살렘만을 향한 것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10-26 오전 11:23:33 Posted
2023-06-23 오후 3:16:18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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