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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80) 생명나무 [계 22:2-6]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3.06.23
천국에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발원한 생명수 강물이 새 예루살렘에서부터 낙원에 이르기까지 두루 돌아 흐르고 있습니다. 생명수 강의 좌우로는 정금길을 따라 가로수와 같이 생명나무가 심겨있지요.

생명나무는 한 종류만이 아니라 열두 종류가 있어서 각각 다른 실과를 맺는다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열두 가지 생명나무를 생명수 강가에 두신 뜻은 무엇일까요? 먼저 생명나무는 영적으로 천국에 들어간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미합니다.

시편 1:2-3에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했지요.

여기서 ‘나무’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의미합니다. 천국 생명수 강가에 심기운 생명나무도 생명수 곧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아 천국에 이른 하나님의 자녀들을 상징하지요.

이 생명나무가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힌다 했는데 열둘(12)의 의미는
첫째로 “만국”입니다.
성경을 보면 야곱의 열두 아들로 인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형성되었습니다. 이 이스라엘을 통해 예수님이 오셨고, 만국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지게 하셨지요.

또 만국에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 것도 주님의 열두 제자를 통해서입니다. 복음을 들은 만국 백성 누구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 삼으면 천국 백성이 될 수가 있지요. 바로 이런 의미로 생명수 강가에 열두 가지의 생명나무를 두신 것입니다.

둘째로 열둘(12)의 의미는 빛의 수입니다.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빛의 자녀가 된 영혼들에게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신다는 뜻이지요. 이러한 열두 가지 생명나무에 맺히는 형형색색의 생명 과일들은 성도들이 빛 가운데 살면서 맺은 열매들입니다. 빛의 열매, 성령의 열매, 의의 열매 등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생명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했지요.
‘소성(蘇醒)’이란 ‘중한 병에서 다시 회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나무의 잎사귀들은 진한 녹색에 반짝반짝 윤기가 흐르며 넓고 큼직하게 생겼지요.

천국의 나뭇잎은 시간이 지난다 해도 시들거나 지지 않습니다. 이 잎사귀들이 만국을 소성하기 위해 있다는 것은 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나무에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먼저 나무가 자라서 가지를 뻗고 잎사귀를 내며 꽃이 피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나무가 성장하기까지는 뿌리에서 양분과 물을 흡수해야 합니다. 또 성장한 나무에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뭇잎이 있어야 하지요. 나뭇잎에서 빛을 받아 광합성을 해야만 영양을 공급받아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만국의 모든 사람들은 죄로 인해 사망으로 갈 운명이었습니다. 잠깐 동안 육의 생명은 붙어 있으나 그 결말은 사망이니 사실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날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처지였던 사람도 영생을 얻어 소성될 수가 있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그저 말로만 “믿습니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지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물로 비유해서 설명을 합니다. 또 하나님은 빛 자체이시며 하나님의 말씀 또한 빛이시지요. 나무가 수분을 흡수해야 살 수 있고 빛을 받아야 양분을 생산하며 열매를 맺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곧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배울 때 들어서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지켜 행해야 하지요. 그럴 때 여러분의 삶 속에 저주가 떠나고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생명나무의 잎사귀가 만국을 소성케 하기 위해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담고 있지요. 성도들이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대로 양식 삼아 나갈 때 모든 사망과 저주에서 벗어나 생명과 축복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 22: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모든 인류는 아담 범죄 이후로 율법의 저주 아래서 고통받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는 겪지 않았던 온갖 질병과 자연 재해, 가난, 죽음, 전쟁 등 일평생 가슴 아픈 일들을 겪으며 살지요.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성도들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되었지만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인간 경작을 받습니다. 이미 구원을 받았다 해도 연단을 받으면서 수고하고 애쓰는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는 질병이나 사고, 재앙을 당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부모나 조상이 우상 숭배를 심히 하거나 하나님을 대적하여 악을 심히 쌓았을 때 그 후손들까지 저주 아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후손은 주님을 영접하여 믿게 되었다 해도 조상이 쌓은 저주에서 완전히 풀려나기까지는 영육 간에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 나가는 사람도 믿음이 장성하는 과정에서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연단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핍박받고 애매히 고난받는 일도 있구요. 물론 열심히 영으로 변화되어 가는 사람들은 항상 그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를 좇아 마음의 연단이 있고 또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한 눈물과 애통은 늘 있기 마련이지요. 결국 온전한 평안과 참된 행복은 천국에 가야만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더 이상 어떤 저주와도 상관없이 영원한 행복과 기쁨만 누리게 됩니다. 더구나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 곁에서 사는 삶은 얼마나 황홀하고 행복하겠는지요. 하나님께서는 그동안의 연단을 잘 통과하여 새 예루살렘에 들어온 자녀들에게 모든 아픔과 눈물을 닦아 주시며 위로하십니다.

자녀를 두신 성도님들은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잘 이해하길 바랍니다. 예를 들어 자녀들이 싫어하는 일이라도 부모 입장에서는 억지로 시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자녀에게 엄한 말도 하고 야단도 치지만 결국 시키는 대로 잘 순종한 자녀들을 보면 부모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사랑스럽지요. “수고했다, 잘했다, 고맙다.” 하면서 자녀를 꼭 안아주기도 하고, 자녀가 좋아하는 것을 사주면서 위로하기도 합니다. 또 부모가 잘못한 자녀들을 징계할 때도 자녀가 미워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자녀가 잘못을 회개하거나 더 이상 혼낼 필요가 없게 되면 금세 안아주고 달래주지요.

노아의 홍수 때도 그랬습니다. 노아가 애타게 심판을 경고했지만 세상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모든 인류를 심판한 홍수 속에서 오직 노아와 그 가족들만이 살아남았지요. 이들이 비록 살아남기는 했지만 온 세상을 멸망시킨 지엄한 심판을 목도했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바로 가까운 곳에 함께 살았던 이웃도, 친척이나 친구들도 모두 사라져 버렸지요. 온 땅을 할퀴고 지나간 홍수 뒤의 세상에 자신들만 남아있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때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하늘에 무지개를 보여주십니다. 다시는 이러한 홍수의 심판이 없을 것이라고 언약하는 증표로 보여주신 것이지요. 노아와 그 가족들이 얼마나 감동이 되었겠습니까? 홍수의 심판으로 인한 두려움과 슬픔, 불안함 이런 것들이 다 사라지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깊은 평안을 느꼈을 것입니다.

본문에 “다시 저주가 없다”는 말씀을 통해서도 이러한 아버지 하나님의 자상한 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동안 저주받은 세상에서 연단 받으며 흘렸던 많은 눈물을 닦아주시며 “수고했다, 고생했다, 이제는 행복만 있단다.” 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은 눈앞에 펼쳐진 천국의 영광을 볼 때도 너무나 행복하지만 더 이상 저주가 없음을 깨달을 때 위로와 평안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3절 후반절에는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는 새 예루살렘 안에 있는데 새 예루살렘 안에서도 정중앙에 있지요. 천국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기억하시겠지만 새 예루살렘은 크게 세 영역으로 나눠집니다. 곧 성부 하나님의 영역, 성자 하나님의 영역 그리고 성령 하나님의 영역으로 나눠지지요. 이 세 영역의 정점 곧 중심점과 같은 지점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좌가 있습니다.

막 16:19에 보면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어린양 곧 우리 주님의 보좌는 하나님 우편에 있습니다. 성령님의 보좌는 주님과 반대편 곧 아버지 하나님의 좌편에 있구요.

계 22:3-4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여기서 그의 종들이란 이 땅에서 주의 종의 직분을 가졌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된 종으로서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한 사람들을 말하지요. 종은 자기의 의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오직 주인에게 순종만 하는 것이 종이지요.

빌 2:5-8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또 고후 1:19에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했지요.

예수님처럼 오직 예와 아멘으로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참된 종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살전 4:3전반절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신 대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결입니다.

참으로 순종하는 종 진정한 종이라면 반드시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버림으로 성결을 이루지요. 그리고 사명 감당에 있어서도 자신의 생명을 다해 맡겨진 모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합니다. 이러한 참된 종들은 당연히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뿐 아니라 하나님을 친밀하게 섬기며 하나님과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의 얼굴이 보고 싶으시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을 뵙기 위해서는 합당한 자격을 갖춰야만 합니다. 주님을 뵙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이지요. 죄인이 하나님을 대면하면 그 영적인 빛으로 인해 살 수가 없습니다.

출애굽기 19-2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시고자 시내산에 강림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시내산 위에 있고 심히 큰 나팔 소리가 울려났지요. 또 연기가 자욱한데 하나님께서는 불 가운데서 강림하셨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죽을 것을 염려하여 산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경계하셨지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두려워 떨며 감히 하나님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고 음성조차 직접 들을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멀리 서서 모세에게 부탁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했지요.

빛 되신 하나님의 위엄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산에 임하신 징조만 보고도 감히 그 앞에 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 마 5:8에 “마음이 청결한 자”라야 하나님을 볼 것이라 하셨습니다.

히 12:14에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했지요.

물론 아직 온전히 성결을 이루지 못했다 해도 은혜 가운데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경우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직접 하나님을 대면해서 보는 것과는 다르지요. 하나님 편에서 그 빛을 가리워 주시므로 일시적으로 그 형상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리워 주시지 않은 채 사람이 그 빛을 그대로 마주하게 된다면 살 수가 없지요 이 땅에서 성결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서도 하나님의 얼굴도 주님의 얼굴도 영원히 볼 수가 없습니다. 그 품에 직접 안길 수도 없구요.

예를 들어 1천층에 들어간 사람이라면 주님이 눈앞에 계신다 해도 찬란한 영광의 빛 때문에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지요. 또 여러분이 성결되지 못했다면 주님을 대할 때만 아니라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 성도들을 대할 때도 그들의 빛을 바로 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이 사는 1천층보다 높은 처소에 마음대로 들어갈 수도 없구요.

다른 처소에 특별히 초청받아 들어갈 때는 거기에 맞는 의복을 빌려 입어야만 그 처소의 빛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 사람들은 어둠을 다 벗어 버리고 빛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천국의 어느 곳이라도 다닐 수 있고, 하나님도, 주님도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가 있지요.

계 22:4 후반절 “그의 이름이 저희 이마에 있다”

계 3:12에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한 축복의 말씀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하여 모든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는 성도들에게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어린양이신 주님의 새 이름을 기록한다 했지요.

그런데 이 새 이름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주님은 물론, 우리 모두도 천국에 가면 지금 쓰는 이름이 아니라 새 이름을 받게 되지요. 빌라델비아 교회 위에 기록되는 주님의 새 이름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입니다.

물론 이 이름은 이 땅의 언어가 아닌 천국의 언어로 불려지지요. 우리 주님의 새 이름을 기록한다는 것은 실제로 성도들의 몸에 문신하듯 어떤 글자를 써넣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영적으로 주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인치시고 보장하신다는 의미이지요.

본문에 나오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마는, 사람을 볼 때 가장 두드러지게 눈에 들어오는 부분이지요. 비유를 들어 여러분이 새 책을 보게 된다면 어디를 가장 먼저 볼까요? 맨 앞표지와 거기에 써 있는 제목을 봅니다.

그런 것처럼 사람의 몸에서도 어떤 글자를 쓰거나 표를 붙일 때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 이마이지요. 그리고 이마에 무엇을 새기고 다닌다면 그 사람에 대해 매우 중요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위치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면 사람들이 볼 때 쉽게 눈에 띄며 그의 영광을 알 수 있지요. 곧 “그의 이름이 저희 이마에 있다”는 말씀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들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계 22: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

천국에는 더 이상 저주도 없고, 밤의 어둠도 없다 했습니다. 오직 빛이신 하나님의 영광만이 영원히 온 천국을 비추게 되지요. 그리고 그 영광 가운데 새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세세토록 왕노릇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계 20:4에 보면 천년왕국 때에도 성도들이 왕노릇을 한다 했지요. 이 천년왕국에서 왕노릇하는 사람들과 천국에 들어가서 왕노릇하는 사람들은 그 범위가 다릅니다. 천년왕국 때 왕노릇한다는 말씀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다 해당하지요. 천년왕국 때는 구원받은 영의 사람들과 구원받지 못했지만 7년 환난 때 살아남은 육의 사람들이 공존한다 했습니다.

이때 육의 사람들에 비할 때 이미 구원받은 영의 사람들의 생활은 왕과 같이 영화롭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천년왕국을 설명할 때 자세하게 살펴보았구요.

영으로 들어간 성도들뿐 아니라 믿음의 1, 2단계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이라 해도 육의 사람들의 생활에 비하면 왕처럼 존귀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반면 천국에 들어가서 왕노릇 하는 것은 새 예루살렘에 들어온 자녀들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의 왕들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릴 뿐 아니라 천국의 다른 처소에 사는 성도들에 비해서도 훨씬 영화로운 삶을 삽니다.

물론 왕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왕의 사랑받는 왕자들도 왕처럼 영화를 누리지요. 그런 것처럼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서 족히 왕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천국의 다른 처소를 두루 돌아다니며 각 처소에 사는 성도들에게 은혜를 입혀주기도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대신하여 두루 살피며 각 처소마다 행복이 더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계 22:6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여기서 “이 말”이란 새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만이 아니라 요한이 기록한 계시록의 모든 말씀을 포함합니다. 일곱 교회에 대한 주님의 편지, 공중 혼인잔치와 칠 년 대환난, 최후의 대심판, 그리고 천국과 지옥에 이르기까지 모든 말씀을 다 포함하지요.

이러한 계시록의 모든 말씀은 요한이 보고 들은 그대로 기록한 참된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하게 하신 모든 성경이 다 신실하고 참된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장차 이뤄질 일들을 선지자들로 하여금 힘써 전하게 하셨지요. 듣는 사람들을 깨우쳐서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것과 모든 사람은 죽은 후에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되며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알려주십니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빛 가운데 살아야 함을 깨우쳐 주시지요.

또한 말씀만 듣고는 믿지 않는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증거를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천지 만물을 보아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증거가 잘 나타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권능을 베푸셔서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들을 나타내 보이시지요. 이런 일들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을 믿고 말씀대로 가치 있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기도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것을 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모세가 열 재앙을 베풀고 권능을 행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증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었지요.

예수님께서도 많은 병자를 치료하시고 기사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이런 일들을 보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회개했지요. 여러분도 이런 역사들을 무수히 체험했고 항상 목격해 온 증인들입니다.

사람의 지혜와 능력으로 불가능한 일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가능해 지는 것을 지금까지 너무나 많이 보아 왔지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참인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정녕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지요. 오늘은 여기까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2023-06-22 오후 3:38:30 Posted
2023-06-30 오후 4:19:13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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