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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십자가의 도 (8) 예수가 왜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가 (3) [고전 2:6-9]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3.09.17
지난 시간에 이어 구세주의 자격 조건을 살펴봄으로 왜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실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세주로서의 합당한 자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율법 중 토지 무르기 법칙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자격 조건은 첫 번째가 사람이어야 하고, 두 번째는 아담의 후예가 아니어야 하며, 세 번째는 원수 마귀를 이길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 자격 조건은 무엇일까요?


구세주의 자격 조건 네 번째는, ‘목숨까지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형이 부유해 동생의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동생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모른 체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생을 사랑한다면 자신이 큰 손해를 본다 해도 그 빚을 갚아 주려 하지요. 토지 무르기 법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토지를 팔게 되었을 때 부유한 근족이 있다면 그 근족은 그 토지를 무를 자격도 있고, 토지를 무를 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근족이 아무리 부유하다 해도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서 근족의 밭을 무르지 않겠다고 하면 밭을 무를 수가 없지요. 근족이 사랑의 마음이 있어서 상대를 도와주려고 할 때라야 토지 무르기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룻기 4장에서도 나오미라는 여인의 집안이 가난해 기업을 팔게 되었는데, 그 토지를 무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근족은 자신이 손해를 입지 않으려고 토지 무르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근족 보아스는 사랑이 있으므로 그 집안의 토지를 물러 주었지요.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 구세주의 세 가지 조건을 다 갖추셨습니다. 그러나 만일 예수님께서 사랑이 없었다면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희생이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죄인들을 대신해 사망의 형벌을 받아야 하지요. 더구나 가장 흉악한 죄인처럼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물과 피를 다 쏟으며 처형당해야 합니다.


‘나무’에 달려 ‘피’ 흘리고 죽어야 하는 대속의 섭리

세상에는 죄인들을 처형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영적으로 죄인들의 죄를 대속할 구세주는 단지 대신해서 죽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계의 법칙에 따라서 반드시 ‘나무’에 달려야 하며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하지요.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율법의 저주’란, 로마서 6장 23절에 나온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을 의미합니다. 영계의 법칙에 의해 범죄한 사람에게 ‘사망’이라는 율법의 저주가 임하게 되었으니, 구세주가 율법의 저주에서 인류를 해방할 방법도 영계의 법칙에 따라야 합니다. 곧 저주받은 사람이 달려야 할 나무에 구세주가 대신 달려 줘야 하는 것이 영계의 법칙이지요.
피를 흘리고 죽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위기 17장 14절에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라…” 했고,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했지요.
인류는 죄로 인해 영원한 생명을 잃었습니다. 물론 이 땅에 사는 동안은 호흡이 붙어 있고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히 살 수 있는 참 생명은 잃어버렸지요. 영적으로 피는 생명과 일체이므로, 구세주의 피 흘림이 있어야만 죄인들이 죄 사함을 받고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아무나 나무에 달려 피를 흘려준다고 해서 인류의 죄가 사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죗값을 대속할 수 있는 피는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의 피라야 하지요. 죄성이 전혀 없는 흠도 점도 없는 깨끗한 피를 흘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 없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이처럼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려고 하겠습니까? 자신의 생명보다 상대를 더 사랑할 때, 어떤 고통을 당하더라도 상대를 살리고 싶을 때라야 그런 희생을 치를 수 있지요.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러한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처형은 고대의 처형법 중에서도 가장 잔인하고 참혹한 것으로,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불평하고 원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저 악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야 하는가? 내가 왜 죄인들 때문에 그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하면서 십자가에 달리기를 거부하실 수도 있었지요. 피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묵묵히 고난의 길을 가셨고, 참혹한 나무 십자가를 지고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독생자 아들을 화목제로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독생자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했고, 로마서 5장 7~8절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했지요.
비유 들어, 한 나라의 왕에게 너무나 사랑스러운 외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 중에 흉악한 살인자가 있어서 법에 따라 사형을 당하게 되었지요. 이 살인자가 살아날 방법은 죄 없는 사람이 대신해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어떤 왕이 그 살인자를 살리기 위해서 죄 없는 자기의 외아들을 죽음에 내어주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는 없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 땅의 왕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죄인 된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죄 없는 독생자를 사망의 형벌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흠도 티도 없으신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에 대한 너무나 큰 사랑을 증명하셨지요.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손에 붙잡혀 채찍에 맞으시고 나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지극히 사랑하는 독생자가 고난을 겪을 때 이를 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 또한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죄인들을 구하기 위해 독생자 아들을 내어주시고, 모든 슬픔과 희생을 감당하셨지요.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주님의 사랑은 세상 어떤 사랑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소유를 다 드린다 해도 그 은혜를 능히 갚을 수가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랑을 중심에서 깨달은 사람들은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주님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고, 끝내는 생명을 드려 순교에 이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깨우쳐 주 안에서 영적인 사랑 이뤄야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안다면 세상 어떤 부귀와 명예를 얻는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어떠한 핍박이 온다 해도 주님의 사랑을 저버릴 수 없고 부모 형제나 자녀, 혹은 남편이나 아내를 하나님과 주님보다 더 사랑할 수는 없지요. 물론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이전보다 더 진실하고 더 깊은 영적인 사랑을 이루게 되지요.
세상의 사랑은 아무리 생명 다해 사랑한다고 말해도 결국은 자기 유익을 좇아 사랑하는 것이고 시간이 지나면 변질하는 것을 봅니다. 가령 한창 연애할 때는 “영원히 당신만 사랑합니다.”, “내 생명보다 더 사랑합니다.”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뜨겁게 사랑하던 사람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랑이 식고 변질해 헤어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서로 헤어진 후에는 또 다른 상대를 만나서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고백하지요.
오랫동안 사랑해서 마침내 결혼까지 했어도 연애할 때와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연애 시절에는 하루 종일 함께 있어도 집에 돌아오면 몇 시간씩 전화로 대화를 나눴는데, 결혼한 후에는 권태기란 말이 나옵니다. 결혼 전에는 서로의 유익을 먼저 구해 줬는데 이제는 자기 유익을 먼저 구하며 무슨 문제가 생기면 서로 상대의 탓을 하지요. 그러다가 결국은 원수처럼 사이가 나빠져서 이혼에 이르는 경우도 있는 것을 봅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어릴 때는 세상에서 부모님을 제일 사랑하며 평생 효도하고 살 것 같은데 장성해 배우자와 자녀가 생기면 부모님은 뒷전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하고 병든 부모님을 부양하기 싫어서 형제들끼리 다투는 일도 생기고 여러 비극적인 일들이 생기기도 하지요.
부모의 사랑도 어찌 보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자녀를 위해 헌신하는 것 같지만 이 또한 자기 유익에 맞지 않을 때는 변질합니다. 자녀가 장성해 부모 자녀 사이에 의견 충돌이 생기고 자녀가 부모를 심히 서운하게 만들면 인연을 끊다시피 하는 일도 생기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질하는 사랑이 아니고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대적하는 죄인들을 위해서 독생자 아들까지 내어주신 사랑이며 자신들을 위해 오신 구세주를 조롱하고 못 박아 죽이는 죄인들에 대해서도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간구하시면서 생명까지 다 내어주신 진실한 사랑이지요.
주 안에서 믿음의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는 영적인 사랑 또한 세월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더 아름답게 승화되는 사랑입니다.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상대를 위해 생명까지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이지요. 그러니 주님을 사랑하게 될수록 부부간에도 더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섬겨주며, 부모님께도 더 마음 다해 영육 간에 섬겨 드림으로 갈수록 더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죄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돌아가셨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해도 그 길로 가지 않고 멸망의 길로 간다면 그는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되지요. 전도자의 말을 믿고 구원의 길로 나올 때라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아무리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예수님 외에는 구세주의 네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구세주의 모든 조건에 합당하시고, 죄인 되었던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우리가 받아야 하는 사망의 형벌을 대신 받고 돌아가셨지요.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위해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마음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며 많은 영혼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09-14 오후 9:17:20 Posted
2023-09-22 오후 4:32:54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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