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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십자가의 도 (10)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눅 2:1-7]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3.10.01
오늘은 예수님께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이시고,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사신 섭리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짐승과 다름없는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는 남편인 요셉과 베들레헴에 갔습니다. 당시 베들레헴에는 사관이 모두 차서 묵을 방이 없었기에 마리아는 한 사관의 짐승 우리에서 해산하게 되었지요. 강보에 싸인 예수님을 마땅히 뉠 곳이 없어서 짐승의 먹이를 담는 구유에 뉘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시고 구유에 누이셨을까요?
전도서 3장 18절에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시험해 보시니 짐승과 다름이 없더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사람의 악함을 생각하면 짐승보다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사자나 표범 같은 맹수들도 배가 고프거나 자신이 위험하다고 느낄 때가 아니면 불필요한 살상은 잘 하지 않습니다. 짐승 중에도 한번 짝을 맺으면 평생토록 상대를 배신하지 않고, 새끼를 위해서 많은 희생을 하기도 하지요. 집에서 기르는 개는 자기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며 때로는 주인을 위해 생명을 바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사람이 자기 욕심을 더 채우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여자와 어린아이, 병자들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죽입니다. 가족이나 이웃 간에도 참사랑을 찾아보기 어렵지요. 이혼율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물질의 욕심 때문에 부모와 자식 간에, 형제간에도 서로 싸우고 고소하며, 심지어 죽이기도 합니다. 자기 유익에 맞지 않으면 배신하며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경우도 허다하지요. 사람이 사람을 돈으로 사고팔며 심지어 자녀까지 팔아넘기기도 합니다. 어린 학생들도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일들을 행하지요.
이 밖에도 뉴스를 보면 상상하기도 힘든 끔찍한 사건들을 끊임없이 보도합니다. 그러니 사람이 짐승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 이후 죄인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영이 죽고 혼과 육으로만 살아가니 혼과 육으로만 지어진 짐승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지요. 점점 마음이 죄악으로 물들어 갈수록 세상 정욕과 자기 욕심에 따라 온갖 죄를 지으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악에 물들어 짐승같이 되어 버린 사람들은 반드시 사람의 본분을 되찾아야 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 51절에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양식 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몸이 양식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듯이 사람의 영도 영의 양식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말씀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짐승과 같은 인류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어 주셨지요. 예수님을 통해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되찾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짐승의 먹이 그릇인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2. 짐승과 같은 삶에서 벗어나 참 생명을 얻으려면

전도서 12장 13절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했습니다. 사람의 본분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잠언 8장 13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했고, 하나님 명령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기록된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라” 하신 것은 하고, “하지 말라” 하신 것은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신 것은 지키고, “버리라” 하신 것은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성경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술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경외합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명령은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지만, 정작 자신은 말씀대로 행치 않는 사람들도 많지요.
또 성경 말씀대로 행하라고 하면, “그 무수한 명령을 어떻게 다 지킵니까? 그러려면 신앙 생활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힘들게 하시려고 이러한 말씀들을 명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열심히 공부해라.”, “예의 바르게 행동해라.”, “깨끗하게 씻어라.” 등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자녀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사랑한다고 해서 “공부하기 힘드니까 놀기만 해라.”, “청소하려면 귀찮으니까 지저분하게 살아라.” 이렇게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정말 자녀를 사랑한다면 사람의 본분을 다하여 사람답게 살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것들도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들을 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 하시는 것들은 시험 환난을 겪지 않기 위함이요,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함이지요. “행하라” 하시는 것들을 행할 때 축복받고 응답받으며 천국에 갈 수 있으므로 행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육의 자녀들도 부모를 사랑하고 신뢰하면 그 말씀에 순종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위해 너무나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신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3. 우리에게 부요의 축복을 주시고자 가난한 삶을 사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시며 창조주 하나님과 근본 하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했고, 3장 35절에는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했지요.
이처럼 모든 것의 주인 되신 예수님께서 하늘의 모든 영광을 뒤로 하고 거칠고 척박한 땅에 오셔서 초라한 짐승의 우리에 태어나셨습니다. 태어나실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일평생 가난한 삶을 사셨지요.
마태복음 8장 20절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신 말씀처럼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들을 치료하시기 위해 일정한 거처도 없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셨습니다. 때로는 주리고 목마르면서, 쉬지도 못하시면서 말씀을 전하셨지요.
예수님께서 부유하게 살 능력이 없으셔서 이렇게 가난하게 사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고, 떡 다섯 개와 두 마리의 물고기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고도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에 채워지는 기적을 베푸셨지요. 베드로가 예수님 명대로 고기 잡아 입을 여니 그 속에서 돈이 나왔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굳이 이 땅에서 가난한 삶을 사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부유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가난을 대신 겪어 주심으로 우리에게는 부요의 축복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에게 처음부터 가난의 고통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에덴동산에 살 때는 모든 것이 풍성했고 땅이 풍성한 과실을 내므로 그 과실을 그냥 따 먹기만 하면 되었지요. 그런데 아담이 범죄한 후로는 사람과 함께 만물도 저주받아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므로 땀 흘려 경작해야 식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류가 가난을 겪는 까닭은 아담의 범죄로 인한 저주 때문이었지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친히 가난을 겪으심으로 사람의 가난을 대속해 주시고 우리에게는 부요함을 누릴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4. 믿음으로 심는 모든 사람에게는 영육 간의 축복 임해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믿음으로 구하는 것마다 주기를 원하십니다(마 7:7~11). 그런데 무조건 “아버지, 축복 주세요.” 기도한다고 해서 축복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단서가 있지요.
예를 들어, 요한삼서 1장 2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했는데, ‘영혼이 잘된다’는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잃었던 하나님 형상을 되찾는 것을 뜻합니다.
신명기 28장 2절에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꾸어 줄지라도 꾸지 않으며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으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한다’고 약속하셨지요.
또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했습니다. 심지 않고 거두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 법칙을 어기려는 것이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9장 6~7절에는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했습니다. 농부가 백 평의 옥토를 가졌다 해도 열 평만큼만 씨를 뿌렸다면 그 이상은 거둘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큰 사람이라 해도 많이 심었을 때라야 많이 거두며 조금밖에 심지 않았다면 적게 거두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심는 것만큼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곧 갑절 이상을 주시고 영혼이 잘되는 만큼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로 갚아 주시지요. 같은 것을 심었다 해도 즉시 거두게 하실 때보다 오래 기다렸다가 거두게 하실 때는 그 축복이 더욱 크게 돌아옵니다.
여기서 많이 심는 자가 많이 거둔다는 말은 단지 그 액수나 분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물질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중심의 향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헌금을 두 렙돈 드렸을 때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드렸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사르밧 과부가 오랜 가뭄 속에서 마지막 남은 양식인 약간의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엘리야 선지자에게 공궤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뭄이 끝날 때까지 과부와 그 아들에게 양식이 떨어지지 않도록 축복해 주셨지요.
물론 물질로 심었다고 해서 물질로만 갚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당장 물질로 주시지 않아도 영혼이 잘되게 하시는 축복이 참된 축복이지요. 이방인이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여 구제를 많이 했던 고넬료는 사도 베드로를 통해 온 가족이 구원받는 은총을 받았고, 하나님 앞에 열심히 선행과 구제를 쌓았던 도르가는 죽었다가 기도 받고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사람의 본분을 되찾고 가난을 대속하신 주님의 은혜 속에 거하시므로 영육 간에 풍성한 축복을 받아 누리며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10-01 오전 10:22:18 Posted
2023-10-06 오후 1:38:3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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