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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 예배

제목
십자가의 도 (13) 십자가의 처형 (1) [요 19:23-24, 사 53:5-6]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3.10.29
오늘은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에 담긴 섭리와 예수님께서 손발에 못 박히신 섭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벌거벗긴 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채찍에 맞고 가시관을 쓰심으로 온 얼굴과 몸에 피가 낭자한 채 못 박히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처형 장소인 골고다 언덕까지 오르셨습니다. 마침내 언덕 위에 도착하자 군병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깁니다.
요한복음 19장 23~24절에 “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말씀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겉옷과 속옷을 다 빼앗기고 완전히 벌거벗긴 채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존귀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미천한 피조물인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은 수치를 당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받아야 하는 수치와 부끄러움을 대신 감당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조롱과 멸시 천대를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이지요.
만일 여러분의 몸과 옷에 썩은 음식물이나 배설물이 잔뜩 묻어서 심한 악취가 난다면 그 상태로 많은 사람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씻어내기까지는 사람들 앞에 나서기가 부끄러울 것입니다. 그런데 몸에 묻은 오물보다 더 추하고 부끄러운 것이 바로 죄라는 사실입니다.
아담도 처음 선악과를 먹고 범죄했을 때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로 숨었습니다. 죄가 있기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죄에 대해 무감각해져 갑니다. 모두 죄 가운데 살다 보니 죄를 짓고 악을 행하면서도 ‘남들도 다 그러는데.’ 하며 양심이 무뎌지는 것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은 마지막 때로 더 악한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세대가 악해진다 해도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부끄러운 죄상들이 낱낱이 드러납니다. 더욱이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는 큰 수치를 당하게 되지요. 자신의 더러운 마음과 행실이 낱낱이 드러나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수치와 능욕을 대신 감당하시므로 이를 믿는 우리가 죄인이 당하게 될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창세기 3장 21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벌거벗은 수치를 가릴 수 있도록 자상하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도 벌거벗긴 채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죄인들의 수치를 대속해 주셨지요.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계 3:18) 권면하셨습니다. 성도님들도 죄인들을 대신해 부끄러움을 당하신 주님의 사랑에, 중심에서 더욱 감사하시고 속히 온전한 성결을 이루어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주님을 맞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의 겉옷과 속옷에 담긴 섭리

군병들은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눠서 네 사람이 나눠 가졌습니다. 속옷은 재단하지 않고 위로부터 통으로 짠 옷이므로 한 사람이 제비 뽑아 가졌지요. 성경에는 왜 이렇게 예수님의 옷에 대해 자세히 기록되어 있을까요?
시편 22편 18절에는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했고, 요한복음 19장 24절에는 “… 이는 성경에 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하여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옷을 통해 하나님의 중요한 섭리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 이후 이스라엘 역사에 대해 예표하고 있는 내용이지요.

1) 예수님 겉옷에 예표 된 이스라엘 고난의 역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겉옷은 영적으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요, 그 백성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겉옷을 네 깃으로 나누었으니, 옷의 형체가 없어지고 옷을 만든 재료, 곧 천 조각만 남은 것입니다.
곧 이스라엘의 왕이신 예수님의 겉옷이 나뉜 것과 같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망하여 그 형체가 없어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옷의 재료였던 천 조각만 남은 것처럼 이스라엘 족속이라는 이름만 남게 되지요.
또 로마 군병들이 옷을 나눈 것은 이스라엘이 로마군에 의해 멸망할 것을 의미합니다. 겉옷이 네 깃으로 나눠진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사방, 곧 동서남북 세계 각처로 뿔뿔이 흩어질 것을 나타내지요.
누가복음 19장 43~44절에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하신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은 주 후 70년에 디도 장군이 이끄는 로마 군대에 의해 포위공격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말았지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하신 대로 로마 군병들은 성전을 이룬 돌들까지도 다 흩어 버립니다.
이에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동서남북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이후 유대인들은 흩어져 살면서 이방인들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아야 했지요. 그 가운데 가장 처참한 사건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정권에 의한 학살입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당했고, 더구나 벌거벗긴 채 죽임당해야 했지요.
이러한 죽음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죽였으므로 그 후손에게 임한 저주 중의 하나였습니다. 예수님의 처형을 요구한 것이 유대인들이었고,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말하므로(마 27:25) 예수님을 죽인 방법 그대로 보응받은 것이지요(잠 18:21). 이러한 고난의 역사가 예수님의 겉옷을 넷으로 찢은 사건 안에 예표 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2) 예수님 속옷에 예표 된 이스라엘의 민족성과 신앙심
예수님의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곧 여러 개의 천을 바느질하여 만든 것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속옷은 사람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신 예수님의 속옷은 이스라엘 후손들의 마음을 의미하며,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신앙을 나타내지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시조는 야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시고 그에게서 난 열두 아들들로부터 이스라엘 나라의 열두 지파를 형성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긴 세월 동안 다른 민족과 통혼하지 않고 단일민족으로 이어졌으며,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섬겨 왔지요.
그런데 솔로몬 왕의 아들 르호보암 때 내분이 일어나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이후 북이스라엘은 이방인들과 통혼해 단일민족으로서의 순수성을 잃어버렸지요. 남유다만이 참 이스라엘의 후손으로서 이방인과 섞이지 않은 단일민족으로 남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유다 사람, 곧 유대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옷이 위로부터 하나로 짜 내려온 것처럼, 유대인들은 순수한 단일민족으로 이어져 온 것입니다.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의 속옷을 찢지 않았습니다. 위로부터 짜 내려온 옷을 찢으면 올이 풀려서 아무 쓸모가 없게 되기 때문에 제비를 뽑아서 한 사람이 가져갔지요. 이는 영적으로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향한 마음 중심은 결코 사람이 나누거나 없애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로마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멸망시켰지만,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까지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예루살렘 함락 이후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진 유대인들은 그처럼 오랜 세월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지요. 자신들의 민족과 신앙을 고수하다가 1948년 5월 14일, 조상들의 땅으로 돌아가 독립 국가를 세웠습니다. 에스겔서 38장 8~12절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말년에 세계 곳곳에서 백성들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와 나라를 회복할 것이 예언되어 있지요. 이는 조상인 야곱으로부터 물려받은 유대인들의 마음 중심과 신앙이 그만큼 굳건했기에 가능했고, 위로부터 짠 예수님의 속옷이 그대로 보존된 것이 바로 이러한 역사를 미리 알려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3. 손과 발에 못 박히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옷을 벗긴 채 십자가에 손발을 못 박히셨습니다. 완전히 숨이 끊어지시기까지 십자가에 매달리신 채로 여섯 시간가량이나 고통을 견뎌내셔야 했지요. 예수님께서 손과 발에 못 박히셔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이 손과 발로 지은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입니다. 마가복음 9장 43~45절에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했습니다.
손이 있기 때문에 그 손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며 발이 있기 때문에 그 발로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서 범죄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해 손과 발을 잘라야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자녀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손발을 자르지 않아도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고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버릴 수가 있지요. 이미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양손과 양발에 못 박혀 피 흘리심으로 손과 발로 범하는 죄를 대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를 믿는다고 하고 입술로는 회개한다고 하면서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회개는 거짓말이라고 하시지요(요일 1:6). 육체의 일을 행하는 자, 곧 행함으로 범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갈 5:19~21).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손과 발에 못 박혀 고통받으셨음을 정녕 믿는다면 다시는 죄를 범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범죄한 것을 마음 중심에서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지을 수 없지요. 죄를 버리지 않고 예전 모습 그대로 사는 사람은 참믿음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아닙니다. 구원과도 상관없는 사람이지요.
물론 변화되려고 노력하는데도 아직 믿음이 약할 때는 거듭 범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심으로 회개하고 다시 죄를 버리기 위해 노력해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시지요. 다시 은혜를 주시고 죄를 버릴 능력을 주십니다.
죄를 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는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죄를 버리고 거룩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큰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제 구원받은 자녀들을 데리러 다시 오실 때가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대속하시고 죄를 사하시기 위해 처참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하루빨리 신부단장을 마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한 분도 빠짐없이 들림 받아 혼인 잔치에 참여하시기를 신랑 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10-27 오후 1:46:15 Posted
2023-11-04 오전 12:18:5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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