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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욥기 강해 (5) 욥의 곤고와 번뇌 [욥 3:13-26]
설교자
당회장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2.03.20
오늘은 욥의 번뇌하는 모습을 살펴보면서 참 평강이 없는 이유와 성령 충만함을 입는 방법, 두려움이 없는 사랑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생명력이 있는 씨앗과 같습니다. 욥의 원망과탄식의 말을 살펴보면서 악한 말의 무익함을 깨우쳐 항상 선한 말, 긍정적인 말로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1. 욥의 곤고와 번뇌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욥 3:13~16)
여기서 목백들이란, 지방의 백성을 치리하고 다스리는 고위 관리들을 의미하고, 의사들이란, 어떤 문제나 일에 대해 논의함으로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욥은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미 죽어 음부에 간 세상 임금들이나 의사들과, 백성들을 치리하는 관원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의미가 있는 말씀이 아니라 욥의 생각에서 나온 비진리의 말입니다.
욥은 또 어머니가 자신을 순산하지 않았다면 ‘낙태한 아이처럼 세상에 있지 않으니 지금의 고통도 받지 않았을 텐데’ 하며 한탄하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욥 3:17~19)
욥은 자신이 만약 사산되어 음부에 갔다면 평강을 얻을 거라면서 음부의 생활상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감독자란 구속받는 자체를 의미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구속할 수도 있고, 윗사람이나 혹은 하나님 말씀 안에 구속받을 수 있는 것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음부란 아무것도 구속받지 않고 큰 자나 작은 자가 피차 일반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진리가 아니라 욥의 생각 속에서 나온 비진리의 말입니다.
누가복음 16장을 보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한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길 수 있었지만, 오직 먹고 마시며 취하다가 음부에 간 부자는 불구덩이에서 영원히 고통당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서 쉬는 곳이 윗음부이며, 부자가 불구덩이에서 고통당하는 곳이 아랫음부입니다. 욥의 말처럼 선인이나 악인이 똑같은 음부에 가는 것도 아니고,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죄인과 악인이 떨어지는 아랫음부는 지옥 사자들로부터 많은 고통을 당하는 곳이지요.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욥 3:20)
재산과 자녀를 다 잃었으며 온몸에 악창까지 난 욥은 심히 곤고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빛과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두움에 있다가 빛 가운데로 나온 사람들이 신앙생활 하는 중에 시험이 오면 욥과 같이 탄식을 하게 되지요. 내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탄식하시며 “죄를 버려라, 말씀 안에 살아라…” 하시는데, 그것을 지키지 못하니 곤고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진리를 모를 때에는 편했는데, 진리를 알고 나니 ‘내가 어찌하여 빛을 보았던고, 내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알았던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욥 3:21~22)
욥은 죽기를 바랐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어느 곳에 값진 보배가 묻혀 있는 것을 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그것을 얻고자 갈급하며 열심히 땅을 파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간절함보다 더한 간절함으로 욥이 죽음을 원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욥은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악창의 고통으로 인하여 물이 쏟아지는 것 같은 신음이 나왔고, 음식을 먹어야 할 때는 탄식이 나왔습니다(욥 3:24). 죽는 것이 소원인데 음식을 먹으면 생명이 연장되고, 그렇다고 안 먹을 수도 없으니 탄식이 나왔던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양식을 먹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 제단을 만나 권능을 보고 말씀을 들으면 은혜가 충만하고 행복해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고 말씀대로 지켜 행하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점점 힘들어지지요.
“차라리 이 성결의 복음을 몰랐더라면 다른 교회에서 편하게 신앙생활 할 텐데… 죄와 싸우느라고 이렇게 힘들지 않을 텐데…” 하면서 말입니다. 악을 버리고 싶은데 원대로 되지 않으니 마음이 곤고해지고 충만함을 잃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영의 양식을 먹지 않을 수도 없고 교회를 떠날 수도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욥과 같은 탄식이 나옵니다. 성결의 복음을 통해 구원의 길과 새 예루살렘을 알았기 때문에 다시 세상으로 갈 수도 없지요.
또 충만할 때는 “새 예루살렘 소망하며 달려가겠습니다.”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나는 낙원만 가도 좋으니 좀 편하게 신앙생활 했으면 좋겠다.” 이런 고백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말씀하셨으니, 새 예루살렘의 영광을 바라보며 열심히 영의 양식 먹기를 즐겨 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어야겠습니다.


2. 욥의 두려움

욥은 행위적으로는 거의 완벽하게 신앙생활 했지만 늘 마음에 불안과 염려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치지 않으실까, 징계하지는 않으실까, 혹시 내 자녀들에게 어떤 재앙이 임하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결국 그가 두려워했던 대로 재앙이 임했고, 또 질병이 올까 무서워했던 대로 몸에 질병까지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욥 3:25)라고 고백하지요.
이는 아직 본성 속에 악의 모양이 있음으로 인해 오는 두려움이었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지 못해서 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성도님들 중에도 아직 마음에 죄성이 남아 있어서 근본의 두려움이 있다면 ‘내가 신속히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녀가 되어야지’ 하는 소망으로 바꿔 나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행하면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 없고 담대합니다(요일 3:21~22). 또 각자 믿음의 분량 안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까닭 없는 저주가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잠 26:2).
하지만 욥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알지 못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이유 없이 징계하실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3. 평강이 없는 이유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욥 3:26)
안온이란 “편안하고 고요함” 곧 안정된 상태의 생활 기반을 의미합니다. 욥은 재물과 자녀들을 다 잃으니 평강이나 안정된 생활 기반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욥이 믿음과 하늘의 소망이 없는 사람임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말입니다. 참된 평강과 안식은 육적인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 중에도 평강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믿음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에 참 평강이 임합니다. 하나님께 의지하지 못하고 내 생각과 계획을 앞세우니 실패할까 염려되고, 속을까 불안하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고민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것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 하늘나라 소망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 명예욕, 권세욕, 자랑, 자존심, 교만 등 헛된 것들을 내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천국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죄의 담이 있거나 육신의 생각 가운데 빠져 살거나 기도하지 못하는 경우에 성령 충만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떠나 진리 안에 거할 때 성령 충만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서 아는 만큼 지켜 행할 때 성령이 기뻐하시므로 충만함이 오는 것입니다.
또 믿음이 있는 사람은 혹여 질병이 오더라도 하나님 앞에 믿고 맡기므로 평강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녀나 아무 보금자리가 없더라도 천국의 소망이 있으면 안식을 누릴 수 있지요.
그런데 욥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줄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천국 소망도 없었고, 그저 고난 속에 탄식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안온’은 영혼이 잘되었을 때 따라옵니다. 영혼이 잘되면 물질, 가족, 건강의 축복이 따라오니 어떠한 것에도 염려가 없을 뿐 아니라 안온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지요.
또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기도할 때(마 6:33). ‘참된 안온’이 따라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의식주는 물론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고 마음의 소원도 신속히 응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는 것은 참믿음과 온전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순종합니다. 하나님께 이유를 여쭈어 보지도 않습니다. 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또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아무런 반문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믿었기 때문에 조금도 오해하지 않고 기쁘게 순종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욥과도 바로 이러한 관계를 이루기 원하셨습니다. 언젠가는 자기에게 불행이 닥칠 수도 있다고 염려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선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관계 속에서 참된 사랑과 평안과 축복을 누리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기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으심으로 하나님과 사이에 온전한 신뢰의 관계, 두려움이 없는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022-03-23 오후 1:24:20 Posted
2022-03-25 오후 4:21:32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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