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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 철야 예배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28) 라오디게아 교회 (2) [계 3:14-22]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3.18
오늘은 주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을 통해 미지근한 신앙이 과연 무엇이며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무엇인지에 대해 증거하고자 합니다.

세상 속담 중에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 있던 사람이 어떤 도움을 받아 처지가 좋아지게 되자, 예전에 어렵고 힘든 시절은 물론이고 그 당시에 받았던 도움까지도 다 잊어버리고 만다는 의미이지요.

신앙 안에서도 이처럼 여러 가지 문제들로 어렵고 힘든 시절,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간구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입게 되었는데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하고 세상과 짝해 나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들에 대해 혹자는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그렇게 될 줄 모르시고 축복을 주신 것인가’ 하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영혼이 잘되는 축복을 먼저 받게 하고 나서,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주고자 하시는데 그것이 진정한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영계에는 공의의 법칙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직은 비록 영혼이 잘된 상태는 아니라 해도 그 당시에 자신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최선을 다해 믿음을 내보이고 정성으로 심으며 기도했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열매를 거두는 것이 공의입니다.

물론 영혼이 잘되는 축복도 주시겠지만, 그 순간에 믿음으로 심고 행한 것은 거두게 하시지요. 만약 모든 사람이 다 영혼이 잘된 후에야 범사가 잘되는 축복도 받을 수 있다면 과연 응답받고 축복받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렇게 응답받고 축복받은 이후의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받은 응답과 축복이 온전한 것으로 열매 맺히기도 하고, 반대로 다시 사라져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이후에 어떻게 행해 나가느냐 그리고 받은 축복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도 중요한 것이지요.

때로는 교회들 중에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가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충성해 나가면 하나님께서는 부흥과 물질의 축복도 주시며 성도들에게도 합당한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다 보면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적으로도 부와 명예와 권세를 가지게 되는데 이로 인해 세상과 타협해 가는 경우가 문제이지요.

교회가 부와 명예와 권세를 구하거나 그것을 가지고자 욕심을 내서도 안 되겠지만, 설령 그러한 것을 가지게 되었다 해도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해 좋은 의도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더욱 겸비한 모습으로 주변을 섬김으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나타내기 위해 힘써야 하지요.

어떤 교회들은 부와 명예와 권세를 얻게 되었을 때,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찌하면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할까? 어찌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더 확장해 갈까?’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해 가면서 부와 명예와 권세를 가진 사람들과 연합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여 세상에서 부와 명예와 권세를 가진 사람들을 배척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연히 그러한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어야 하고 주 안에서 교제하여 그들에게도 믿음을 심어 주어 그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너무나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순수한 목적이 아니라 교회가 더 큰 부와 명예와 권세를 얻기 위해 세상과 짝해 가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계시록 3:16에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며 미지근하다”는 말씀에는 바로 이러한 교회들을 향한 주님의 책망도 담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신앙이 미지근하다는 말씀에 담긴 가장 중요하면서도 근본적인 의미는 바로 하나님과 세상 양쪽에 걸쳐 있는 신앙을 말하지요. 쉽게 말해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가 상황에 따라 자기 유익이나 편의를 좇아 좋은 쪽을 택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13에 보면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재물이란, 꼭 물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대표적으로 상징하는 것으로서, 이처럼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과 하나님을 동시에 사랑하며 섬길 수는 없다는 말씀이지요(요일 2:15).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양다리를 걸치며 신앙생활 하는 것이 마치 지혜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이는 결코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미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을 입에서 토하여 내치시겠다 말씀하시지요(계 3:16).

요한계시록 3:17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했지요.

차라리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인정한다면 하나님께 매달려 돌이킬 기회라도 얻을 텐데,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스스로가 ‘나는 부자라’ 여기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지도 못하고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말하며 열심을 내려고 하지도 않고, 변화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지요.

이러한 사람이 과연 부족함이 없는 부요한 사람일까요? 설령 육적인 부족함은 없다 해도 기도하지 않으므로 영적으로는 영혼이 항상 곤고하여 육적으로는 아무리 부와 명예와 권세와 학식 등 많은 것을 가졌다 해도 결국은 영혼이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으므로 이런 사람을 가련하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들을 가난하다고 하신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이 땅에서의 육적인 부요는 결국 모든 것이 썩어지고 없어질 허무한 것에 불과합니다. 썩지 아니할 하늘나라에 영원한 상급을 쌓아 가고 있는 사람이 진정 부요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 충성 봉사하지도 못하고, 물질이 아까워서 심지도 못하니 결국 하늘나라에 쌓을 것이 없으므로 설령 나중에 회개하여 간신히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 해도 받을 상급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난하다’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런 사람들을 눈멀었다 하신 것은 이렇게 미지근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신령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신령한 영의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세에 대한 소망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현실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반면에 영안이 열려서 영의 세계를 보는 사람이나, 또한 말씀에 대한 영안이 열려서 말씀을 영적으로 깨닫고 이해하는 사람은 내세에 대한 분명한 소망이 있기에 결코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지요. 말씀을 통해 자신을 열심히 발견하며 어두움을 벗고 빛으로 나오게 됩니다. 또한 하늘나라에 쌓기 위해 열심히 충성, 봉사하며 정성껏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심어 나갑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은 자신의 어두움을 발견하지 못하므로 여전히 어두움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마 6:22-23). 그러니 성도로서 당연히 입어야 할 의(義)의 옷을 입지 못하지요. 그래서 이들을 향해 또한 ‘벌거벗었다’ 하는 것입니다. 의의 옷을 입지 못했기 때문에. ‘옷’은 ‘사람의 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의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마음에 할례하여 마음에 의를 이룬다.’는 뜻이지요.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마음에 할례를 하지 않고 말씀대로 행하지도 않으니 그 마음이 여전히 죄악으로 가득한 마음이요,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곧 영적으로는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는 모습이 되는 것이지요.

사람이 겉으로 아름답고 화려한 옷을 입었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할례하지 않으므로 여전히 죄악을 품고 있다면, 이는 겉으로 아무리 좋은 옷을 입었다 해도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는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놓고 다니는 것과 같지요.

어두움이 조금도 없는 천국에서는 세마포 흰옷을 입게 되는데,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 (계 19:8)했습니다. 천국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죄로 물든 육의 더러운 옷을 벗어 버리고 아름다운 예복인 의의 옷으로 갈아입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요(마 22:10-14).

그러므로 신랑 되신 주님을 맞아 아름다운 신부로서 천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신부 단장하여 예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여러분은 미지근한 신앙, 즉 곤고한 것이나 가련한 것, 가난한 것이나, 눈 먼 것, 벌거벗은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지요.

주님께서는 미지근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요한계시록 3:18에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금’은 정금 같은 믿음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금’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보배 중에 보배인 믿음을 금에 비유하여 말씀하신 것이지요. 따라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는 말씀은 금과 같이 변함없는 믿음을 소유하라는 뜻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구원받아 천국에 갈 수 있고, 마태복음 9:29에 “너희 믿음대로 되라” 말씀한 대로, 믿음이 있어야 이 땅에서도 무엇이든 구하여 응답받을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입술로만 ‘믿습니다’ 고백한다고 해서 그것을 무조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어야 하며 또한 상황과 조건에 상관없이 변함없는 한결같은 믿음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을 영적인 믿음이라고 하며, 이처럼 변함없는 영적인 믿음을 성경에서는 금 또는 정금에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한번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적으로 믿고 따릅니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 선지자는 바로 이러한 영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에게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던 이스라엘에 비를 내리시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이 말씀을 끝까지 믿고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 땅에 꿇어 엎드려 그 얼굴이 무릎 사이로 들어갈 만큼 일곱 번 간절히 기도하여 큰 비를 내리게 하는 응답을 받게 됩니다. 일곱은 완전수로 일곱 번 만에 응답받았다는 것은 끝까지 믿고 기도하여 응답받았다는 의미이지요.

만약 일곱 번째에 응답이 없었다 해도 엘리야 선지자는 응답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믿음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셨으니 엘리야 선지자는 그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었기 때문이지요. 이것이 바로 참 믿음입니다.

이처럼 한 번 믿은 하나님을 끝까지 믿는 것이 정금과 같은 영적인 믿음이지요. 그런데 이런 믿음이 그냥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정금이 나오기까지는 불로 단련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듯이 믿음 역시 연단의 과정이 있어야 정금같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많은 시험과 환난을 거치면서 승리하고 죄를 피 흘리기까지 싸워 버리며 말씀대로 살기 위해 수고하고 인내하며 절제해 나갈 때, 바로 이러한 연단의 과정들을 통해 비로소 정금과 같은 믿음을 소유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하셨습니다.
여기서 흰옷은 성도들의 거룩한 행실을 의미하는데 거룩한 행실은 바로 거룩한 마음으로부터 나오게 되지요. 마태복음 12:34 후반절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말씀한 대로 결국 마음에 있는 것이 말과 행동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거룩케 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거룩한 척 외식하는 사람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없으며 언젠가는 그 마음의 악이 드러나게 되지요. 따라서 본문에 흰옷을 입는다는 말씀은 마음 안에 있던 비진리의 검은 마음을 벗고 진리의 하얀 마음으로 만들어 간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할 때만이 의의 옷을 입게 되므로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을 수가 있지요.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벌거벗은 것도 모른 채,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짐승보다 못한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을 수치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러나 죄로 물든 검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죄와 어두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바 된 사람의 본분을 잃고 있는 것이 바로, 영적으로 벌거벗은 수치이며 이것이야말로 정말 부끄러운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자신의 벌거벗은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이러한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지요.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모습조차도 발견하지 못하는 영적인 장님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하십니다. 이는 곧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믿음을 가지고 말씀대로 살아가다 보면 차츰 성령의 음성도 듣게 되고 진리가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며 영적인 분별력이 생기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영안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안이 열렸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이해가 되고 천국에 대한 소망도 주어지게 되며,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발견하여 진리로 변화될 수가 있지요. 그러므로 ‘영안이 열린다’는 것은 실제 영안이 열려 영의 세계를 본다는 의미도 있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깨달음을 통해 ‘내 자신’을 진리로 변화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에 대해 알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는 사람이라면 세상과 짝하며 살 수도 없는 것이고, 어찌하든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어두움을 발견하여 진리로 변화되고자 노력하게 되지요. 이런 사람이 빛 가운데 사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더 깊은 사귐의 단계에 들어가게 되고,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 하나님 앞에 결코 미지근한 신앙이 되지 말고 날이 갈수록 더 뜨거워지는 신앙이,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시는 날까지 변함없이 계속되심으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보장을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3-23 오후 1:23:40 Posted
2023-10-26 오후 2:57:08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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