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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29) 라오디게아 교회 (3), 일곱 교회 정리 [계 3:14-22]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04.01
오늘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마지막으로 일곱 교회가 주는 교훈에 대해 증거하면서 일곱 교회 말씀을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3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말씀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상태가 되었을 때 사람은 마음이 낮아지고 겸비해짐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마음도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려는 갈급한 마음도 됩니다.

반면에 심령이 부요해져 있는 사람은 교만, 자존심, 이기심, 욕심 등으로 마음이 가득 채워져 있기에 하나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없지요. 오히려 마음에 세상의 것을 더 채우려고만 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예전으로 돌아가 다시 심령이 부요해지는 경우가 있지요.

마음이 진리로 채워져서 부요한 것이 아니라, 눌러 놓았던 육의 마음들이 되살아나면서 마음이 다시 높아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특히, 부와 명예와 권세 등을 가지게 되면 스스로 ‘나는 부요하다’ 생각하면서 신앙이 점점 육의 신앙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있지요.

신앙생활은 한다고 하지만, 정작 진리에 대한 사모함이나 갈급함도 없고, 기도도 점점 쉬다가 마침내 멈추게 되며 영적인 것에 대한 사모함도 사라집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인 행함만이 있을 뿐이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보다는 내 자신과 세상의 일이 우선이 되지요.

본문에 보면, 이런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들이 부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것임을 알아야 하지요. 성령께서 탄식하시므로 영혼이 곤고해도 이미 스스로가 깨닫지 못하고 있고, 그 상태로 계속 가다가는 결국 구원에서조차 멀어지게 되니 ‘가련하다’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졌다 해도 정작 하늘나라에는 아무것도 쌓은 것이 없으니 실상은 가난한 자인 것이고, 영의 세계나 영적인 것에 대해 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니 눈 먼 것이지요. 신랑 되신 주님을 맞이하여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신부단장도 못하고 있는 것이니, 신부로서 예복도 준비하지 못한 채 벌거벗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향해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케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며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말씀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해결책까지 주셨음에도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주님의 더욱 엄한 책망과 징계가 따르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19절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하셨는데,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징계를 허락하시는 이유와 목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시는 것이고, 그 목적은 결국 징계를 통해 회개하고 열심을 내게 하려는 것이지요(히 12:6-8).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징계를 허락하심도 그 자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죄를 지었음에도 그에 대해 아무런 책망이나 징계가 없다면 결국에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영계의 법칙에 따라 사망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느껴야 하는 것이고, 징계를 통해서라도 이러한 사랑을 느끼는 사람은 결국 회개하고 돌이켜 변화될 수가 있지요.

반면에 징계를 받아도 아무런 깨달음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징계를 허락하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다음에는 잘못을 해도 징계조차 오지 않게 되지요. “믿는다.” 하는 사람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죄를 지어 가는데도, 형통하며 징계도 없다면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외면을 당한 상태이므로 이보다 더한 불행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라면 그가 잘못된 길로 갔을 때 사생자와 같이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사랑의 매를 드시는 것이고, 이것이 징계 받는 본인에게도 축복이지요. 징계가 당장에는 무섭고 두려울 수 있지만, ‘이 징계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징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게 됩니다.

그렇다 하여 꼭 징계가 임할 때까지 계속 잘못된 길로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를 허락하시기 전에 말씀으로 깨우쳐도 주시고, 권면도 해보시며 책망을 해서라도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이럴 때, 조금이라도 더 빨리 깨달아서 회개하고 돌이키면 좋겠지만, 혹여 그렇지 못해서 징계가 임하게 되었다 해도 그것마저도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달아서 이제는 정녕 마음 중심으로부터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잃었던 하나님과의 신뢰관계도 회복해 나가고 하늘나라에도 다시금 상급을 쌓아나가야 하지요.

이어지는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책망만 들었던 라오디게아 교회가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해 주는 약속의 말씀이지요. 지금까지는 미지근한 신앙생활로 인해 영적인 깊은 잠에 빠져 있었지만, 이제라도 주님의 음성을 듣고 깨어나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주님께서 문밖에 서서 두드리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생각을 두드리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는 이를 마음에 담아 양식 삼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먼저 진리의 말씀이 생각의 문을 통해 들어와야 하며 다음으로 마음의 문을 통해 마음 안으로 들어와야 하지요.

마치 어떤 집 안의 안방에 들어갈 때에도 먼저 대문을 지나고 다음으로 안방문을 통과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설령 여러분의 생각과 이론이 맞지 않아도 먼저 생각의 문을 열고 아멘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말씀이 마음 안에 담겨지면 차츰 말씀대로 지켜 행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곧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은 생각의 문을 통해 말씀을 받았다 해도 정작 중요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말씀이 머리에 지식으로만 남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지식적인 믿음, 곧 행함이 따르지 않는 죽은 믿음이며, 이런 믿음으로는 결국 미지근한 신앙에 머무르게 됩니다.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해서 듣고 아는 말씀은 많다 해도 막상 행함을 통해 마음에 영으로 일구지 못했으니 믿어지는 영적인 믿음도 오지 않게 되고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되고 말지요.

주님께서는 아무리 능력이 있다 해도 사람의 마음 문을 강제로 열지는 않으시는데 그것은 공의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 문을 강제로 열어 영적인 믿음을 가지게 하신다면 이 세상에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없고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도 없겠지만, 그것은 공의 가운데 이루어지는 경작이 아니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스스로 우러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참 자녀를 얻기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의 문과 마음의 문을 자꾸 두드리기는 하시되 그 문을 여는 것은 우리 자신임을 알아야 하지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마음 문까지도 활짝 열어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므로 진리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이 세상과 원수 마귀 사단을 이길 수가 있지요. 또한 지금이라도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의 경고의 말씀을 받아서 돌이켜 회개한 사람 역시 이기는 사람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21절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주님처럼, 끝까지 이기는 사람 역시 구원받은 자리에 이르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책망의 말씀만을 하셨지만, 그들이 이제라도 회개하고 돌이켰을 때는 이처럼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지요. 구원의 방주의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까지는 그래도 아직은 기회가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되 끝까지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좁은 길을 끝까지 변함없이 감사와 기쁨과 사랑으로 갔을 때만이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오실 때에 영광을 함께 누리는 자리에 설 수 있지요.

지금까지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볼 수 있는 너무나 중요한 말씀입니다. 더욱이 주님 오실 때가 참으로 가까운 이때에 정녕 깨어 있기 위해 필요한 말씀이지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신 대로, 지금은 많은 교회들과 성도들이 자기를 돌아보아야 할 때이지요.

영적인 잠에 빠져 있었다면 이제라도 깨어나야 할 때이며, 세상으로부터 더욱 자기를 지켜야 할 때입니다. ‘믿는다.’ 했던 자신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할 때이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변화시켜 신부 단장을 해 나가야 할 때이지요.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은 특히 오늘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교회들에게서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지적과 권면과 책망과 교훈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해 각각의 교회들이 무엇 때문에 지적과 책망을 받았고 반면에 무엇으로 인해 칭찬 받았는지를 깨닫는다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신앙을 가진 교회와 성도들로 나올 수가 있는 것이지요. 어떤 교회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교회이며, 어떤 성도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성도인지를 깨우쳐서 그와 같이 변화되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일곱 교회의 주요 교훈 요약
에베소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기를 힘쓰고 진리에 위배되는 것들은 버리며 사명 감당도 잘하면서 서로 사랑하여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였지요. 이런 에베소 교회는 주님으로부터 처음 사랑을 버린 것에 대해 책망을 들었습니다.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찾지 않으면 촛대까지도 옮겨질 수 있음을 말씀하셨지요.

서머나 교회는 주의 이름으로 인해 많은 핍박과 환난을 당해야 했지만, 주님께서는 이것이 결국은 축복임을 말씀하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믿음으로 생명 다해 충성했을 때, 하늘나라에서 주어지게 될 큰 상급을 약속해 주고 계시지요.

다음으로 버가모 교회는 적당주의 신앙과 더 나아가 이단 사상에 물든 교회들을 대표하여 주님으로부터 책망과 경계의 말씀을 들었지요.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발람과 같이 세상과 짝하는 신앙을 가진 것과 니골라당과 같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변질시켜 이단사상으로 빠지는 교회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두아디라 교회 역시 나름대로는 열심히 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있는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이 나가고 있는 교회입니다. 육적으로는 아무리 충성하는 것 같고, 갈수록 더 열심 내는 것 같아 보여도, 정작 마음에는 할례를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육적인 충성에 불과하며 하나님 앞에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자칫 이세벨과 같은 거짓 선지자의 미혹에 빠져 진리에서 벗어나 버릴 수가 있는 것이지요. 마음에 할례하지 않고 외형적인 것에만 치중하는 신앙은 결국 구원받기도 어려운 쭉정이의 신앙과 같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데 교회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을 가진 교회로서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은 교회입니다. 참 믿음을 가졌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행함도 따르게 되며 이렇게 행할 때만이 주님을 믿고 사랑한다는 증거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어린 신앙을 가졌을 때부터 진리의 말씀에 따라 예와 아멘으로 순종하며 행해 온 교회로서 주님으로부터 큰 칭찬과 축복의 약속을 받은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교회들이 바로 이러한 빌라델비아 교회와 같이 행하여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축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도 귀한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는 복되고 아름다운 교회들이 되어야 하지요.

라오디게아 교회는 뜨겁지 않은 교회, 더 이상 열심을 내려고도 하지 않으므로 신앙이 정체되어 버린 교회를 대표하여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은 교회입니다. 열심내고 뜨거웠을 때, 주님으로부터 받은 많은 축복을 가지고 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열심 내기보다는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점차 세상과 타협해 가며 부와 명예와 권세를 추구해 가는 모습에 대해 일깨워 주고 계신 것이지요. 주님께서 이런 교회와 성도들에게 징계까지라도 허락하시는 것이 결국은 사랑이며 축복임을 깨달아,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이킬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을 통해 ‘내가 믿노라 했는데 그것이 과연 참 믿음이었는가?’, ‘나는 과연 첫사랑을 잃지 않았는가?’, ‘그동안 하나님 앞에 죽도록 충성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과연 영적인 충성이었는가?’ 이런 것들을 점검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죽은 믿음과 산 믿음’,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 ‘세상과 타협하는 적당주의 신앙’과 ‘미지근한 신앙’ 등 오늘날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한번쯤은 꼭 자신의 신앙에 비추어 보아야 할 귀한 교훈을 얻을 수가 있었지요. 각 교회에 주시는 한 말씀 한 말씀이 현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꼭 필요한 말씀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는 이제 다시 한번 각자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시고 혹여 부족하고 미진한 분야가 있었다면 지금이라도 신속히 돌이키고 변화되어서 이제는 영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무리 입술로 외치고 마음에서 간절히 원한다고 해도, 영으로 준비되어야 만이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한 그릇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축복의 대열에 꼭 함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4-06 오전 10:13:55 Posted
2023-10-26 오후 2:57:08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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