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십자가의 도

제목
십자가의 도(4)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창1:27-28,2:7]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5.04.10
오늘은 하나님께서 왜 이 땅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경작하시는지에 대해 증거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작도 끝도 없으신 분이며,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아득한 태초로부터 스스로 존재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인가에 이르러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계획을 세우게 되셨습니다. 바로 천지 창조와 인간 창조의 계획이었지요.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오랜 세월에 거쳐 하나하나의 준비 작업을 이루기 시작하셨습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계시던 영의 공간에서 장차 천하 만물과 인간을 지으실 육의 공간을 구분해 내셨습니다. 그리고 원래 홀로 계셨던 한 분 하나님으로부터 성자, 성령 하나님을 분리해 내심으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게 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때부터 하나님도 형상을 입으셨는데, 바로 우리 사람과 같은 형상이었지요.

영의 세계 안에는 천군과 천사, 그룹 등 영의 존재들을 만드셨고 육의 공간 안에는 장차 인간들이 살아갈 지구를 만들어 놓으셨지요. 이렇게 모든 준비를 갖추신 후에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빛과 궁창, 해와 달, 별 그리고 각종 식물과 동물 등 천하 만물을 지으시고 마지막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람을 만드셨을까요?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면 사람이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답을 얻게 됩니다.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태어난 목적에 맞게 사는 삶이야말로 참으로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인 것입니다.

1.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

창세기 2:7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사람은 친히 흙으로 빚으셨습니다. 오장 육부와 모든 조직에 이르기까지 완벽하게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은 살아 움직이는 생령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흙으로 빚어놓은 형상이 어떻게 살아 움직일 수 있는가” 하며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피조물인 사람도 지식이 더하니 사람과 비슷한 로봇을 만들어 냅니다. 사람의 두뇌를 흉내 내어 컴퓨터를 만들기도 하고 인공 장기나 인공 피부를 만들어 내기도 하지요. 피조물인 사람도 이런 일들을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사람이 자신의 생각 속에 한계를 만들어 놓았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이런 생각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창조의 역사를 보여주십니다. 본교회의 부흥성회나 제가 강사로 섰던 해외 성회에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를 직접 체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중에는 소아마비나 교통사고로 양다리의 길이가 달라져서 수년 혹은 수십 년씩 고통 받았던 사람들이 제게 와서 기도를 받은 후 양쪽의 길이가 같아진 경우가 많이 있지요.

예를 들어, 본교회 송희경 집사님은 선천성 뇌성마비로 인해 왼쪽 다리가 오른쪽보다 4센티미터 짧았습니다. 걸을 때도 다리를 절었을 뿐 아니라 척추와 골반이 뒤틀려 있으므로 오래 서 있거나 걷기가 힘들었지요. 그러던 중, 1997년 본교회 부흥성회에 참석하여 저에게 기도를 받고 그 자리에서 짧았던 왼쪽 다리가 길어짐으로 똑바로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짧았던 다리 때문에 휘었던 척추가 펴지면서 뒤틀린 골반도 정상으로 돌아왔으며, 더구나 신장이 3센티미터 이상 커졌던 것이지요.

또 2002년 인도 연합대성회에 참석했던 가네쉬라는 소년은 골반뼈 낭종이라는 병으로 골반뼈와 고관절을 잘라낸 상태였습니다. 뼈를 잘라낸 부위에는 금속판을 넣고 볼트로 죄어서 대퇴골과 골반을 연결해야 했지요. 이후에도 가네쉬는 통증으로 계속 고통 받았고 목발을 의지하여 겨우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회에 참석해서 저의 기도를 받은 순간에 모든 통증이 사라져 버렸고 목발 없이도 혼자 걷고 뛰며 운동경기까지도 할 수 있게 되었지요. 이러한 창조의 역사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사람을 창조하셨음을 확실히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첫사람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후에 사람이 후손을 이어갈 수 있도록 생명의 씨를 주셨습니다. 곧 남자의 정자와 여자의 난자를 주신 것이지요. 정자와 난자 안에는 부모의 모든 기가 결집되어 있습니다. 그 작은 생명의 씨 안에 외모는 물론 성격, 지능, 습관 등이 다 들어 있어서 자녀들이 부모를 닮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를 닮아서 태어날 수 있도록 생명의 씨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 씨를 통해 잉태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부모의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아이가 생겨나지만 그 생명의 잉태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류의 조상인 아담은 누구를 닮았을까요? 창세기 1:27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말씀한 대로 아담과 하와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이때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는 것은 단지 겉모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이며 몸은 영혼을 담는 그릇일 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 할 때 더 중요한 의미는 바로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왔으며 하나님을 닮은 영으로 지음 받았다는 데 있지요. 처음 지음 받았을 때 아담의 영은 거룩하고 성결하신 하나님과 같이 선과 빛과 진리로만 채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범죄한 이후 인류는 점점 죄와 악에 물들어갔고 결국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 인간을 창조하시고 경작하시는 이유

우리가 “왜 사는가” 하는 인생의 목적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왜 인간을 지으시고 이 땅에 경작하시는지”를 깨우치면 됩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비유들이 나오는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땅을 경작하여 농사를 짓고 열매와 곡식을 거두는 비유들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네 가지 밭에 비유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밭의 종류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앗이 그 마음에 임할 때 진리로 결실하는 정도가 다른 것을 설명하셨지요.

또 마태복음 3장의 알곡과 쭉정이 비유나 마태복음 13장의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장차 있을 심판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알곡과 같은 영혼들은 심판날에 천국 곡간에 들어가지만 가라지와 쭉정이 같은 영혼들은 지옥 불에 던져진다는 것이지요.

성경의 이러한 비유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사람을 지으시고 인류 역사를 섭리해 가시는 과정이 바로 경작하는 것과 같음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농부가 추수하기 위해 땅을 일구어 경작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경작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아담을 창조하셨고 인간을 경작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하나님과 사랑을 주고받을 참된 자녀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놀라운 권능과 두려운 심판자로서의 권세, 엄격한 공의 등 신성적인 면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긍휼, 자비 등의 인성적인 면도 있으시지요.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도 하고 슬퍼하고 탄식하시기도 합니다. 이렇게 인성을 가지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외로이 홀로 있는 것보다는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대상이 있기를 원하셨지요. 그래서 인간을 창조하고 경작하기로 계획하신 것입니다.

물론 굳이 인간을 만들지 않으셔도 하나님께는 수많은 천사와 천군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무조건 순종하는 존재로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영광을 돌렸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순종하는 천사들과 달리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으로, 자유의지 가운데 순종하는 참된 자녀를 원하셨습니다.

비유를 들어, 여러분의 가정에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순종하는 뛰어난 성능의 로봇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때로 말썽도 부리지만 자라면서 점차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고 헤아림으로 중심에서 부모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함께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자녀가 있다면 누가 더 소중하겠는지요? 아무리 순종을 잘 하고 사람과 비슷한 로봇이라 해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자녀에 비할 수는 없지요.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여 스스로 순종하는 자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참된 자녀를 얻기 원하셨기에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농부가 최선을 다해 경작을 한다 해도 추수 때는 알곡만 있는 것이 아니라 쭉정이가 섞여 나오기 마련입니다. 쭉정이는 먹지도 못하며 알곡과 함께 곡간에 넣으면 알곡까지도 못 먹게 되지요. 그러니 쭉정이는 거름으로 쓰거나 불에 태워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인간을 경작하신 후 최후에는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작업을 하시지요.

마태복음 3:12에 보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꺼지지 않는 불’이란 지옥 불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마지막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 경작을 마감하시고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시지요. 이때 알곡이 아닌 쭉정이가 된 사람들은 심판을 통해 지옥 불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가는 알곡과 지옥에 가는 쭉정이는 각각 어떤 사람일까요? 알곡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부지런히 죄악을 벗어버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이지요. 반면에 쭉정이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을 말합니다. 비진리와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다 알곡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입으로는 주를 믿는다 해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세상 정욕을 좇아 죄악 가운데 사는 사람들도 알곡이 아닌 쭉정이인 것이지요. 그래서 마태복음 7:21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알곡이 되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딤전 2:4). 그래서 독생자 예수님까지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 주셨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는 사람이나 여전히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으로서의 참된 가치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의 본분을 행치 못하니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존재요, 쭉정이에 불과한 것이지요.

이렇게 사람의 가치성을 잃은 쭉정이를 알곡된 영혼들과 함께 천국에 들일 수는 없습니다. 세상 정욕 가운데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며 욕심과 다툼과 온갖 악을 가진 사람들을 천국에 들인다면 더 이상 천국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곳, 영광스러운 곳이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되지요.

그러면 천국에 들어오지 못한 영혼들은 그냥 소멸되어 버릴까요? 사람의 영혼은 영원불멸한 것이기에 소멸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들도 한곳에 모아서 영원히 가둬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둬두는 장소가 바로 지옥이요, 쭉정이가 된 영혼들은 각자의 죄값에 따라 꺼지지 않는 불 가운데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지옥 책자 참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목적에 따라 알곡이 되기 위해 살아야 합니다. 가장 먼저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하지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서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여러분을 아름다운 천국으로 이끌어 들이셔서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함께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닮아 거룩하고 성결한 마음을 가진 참된 자녀로 나와 영화로운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며 영원히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5-04-09 오전 5:22:08 Posted
2019-07-24 오전 10:50:11 Updated

다음 글 십자가의 도(5) 이전글
이전 글 십자가의 도(3) 다음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