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까지 천년왕국에 대한 설명을 마쳤습니다.
원수 마귀 사단의 미혹을 받은 육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공격하려고 할 때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와 순간에 멸해 버리지요. 그리고 요한이 보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집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크고 흰 보좌 곧 하나님의 보좌를 보게 되었는데“ 최후의 대심판을 위해 마련된 보좌이지요.
영이신 하나님의 보좌는 원래 근본의 하늘 곧 넷째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나 3하늘의 천국에도 있고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1하늘에도 얼마든지 그 보좌를 베푸실 수가 있지요. 그러니 ‘어떻게 1하늘에 곧 이 육의 세상에 영이신 하나님의 보좌가 내려올 수 있는가?’ 이런 생각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영광의 빛이 나고 무지개가 둘러서 평안함과 충만함을 줍니다.
물론 성결되지 못한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도 사랑과 경외하는 마음으로 평안하게 대할 수는 있지요. 그러나 대심판 때의 백보좌는 심히 강한 위엄과 권세가 느껴지므로 구원받은 영혼들이라 할지라도 저절로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의 경우에는 그 보좌의 위엄 앞에 서는 것만으로도 심히 두려워 떨게 되지요.
이 보좌는 이 땅에서 왕들이 앉는 하나의 의자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좌정하시는 그 자리만이 아니라 보좌 주변의 구분된 공간들까지 포함하지요. 보좌가 “희다”고 하는 것은 빛이 너무나 밝고 찬란하여 온통 하얗게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희다”는 것은 맑고 깨끗함, 진실과 영원함 이런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표현이구요.
이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보좌가 1하늘에 베풀어지고 이제 창세 이래 경작 받은 모든 영혼들에 대해 대대적인 심판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 심판은 1하늘에서 이뤄진다 했습니다. 이는 인류가 경작 받은 바로 이 공간에서 각자의 행함에 따라 심판을 이룬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1하늘에서 심판을 하신다 해도 이 심판 때의 공간은 지금과 같이 제한된 육의 공간이 아닙니다.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기록한 대로 심판 때는 땅과 하늘이라는 경계가 상관없습니다. 대심판을 위해서 1하늘에서 3하늘까지 모든 공간이 마치 하나의 공간처럼 열리게 되지요.
비유를 들어 하나의 건물 안에서 1층의 천장이 없어져버리면 1층과 2층이 하나의 공간처럼 합쳐집니다. 1층에서 일어나는 일을 2층에서도 볼 수 있고 들을 수도 있지요. 다시 2층의 천장이 없어지면 1, 2, 3층이 모두 하나의 공간이 되구요. 이런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여러 개의 다른 차원의 하늘들을 열어 하나의 공간처럼 만드십니다. 그래서 어느 공간에 있다 해도 하나님의 보좌 바로 앞에 선 것처럼 생생하게 그 위엄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 백보좌 대심판이 이뤄지는 시점에 심판받을 영혼들은 여러 공간에 흩어져 있습니다. 먼저 이 땅에서 천년왕국을 보낸 사람들은 그대로 1하늘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되지요. 그리고 구원받은 영혼들 중에서도 윗음부에 머물고 있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모태에서 죽음을 맞았지만 양심 심판으로 구원받은 영혼들이지요.
또 7년 환난 때 구원받은 자들 중 천년왕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별도의 장소에 있는 영혼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혼인잔치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순교한 때로부터 심판 때까지 2하늘의 구별된 장소에서 대기한다 했지요. 그리고 심판 후에는 낙원의 가장자리에 이르게 되구요.
다음으로 구원받지 못한 채 아랫음부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윗음부와 아랫음부, 2하늘 등 각각의 장소에 흩어져 있던 영혼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지요. 이들이 다 1하늘의 공간으로 옮겨오는 것이 아니고 공간이 하나로 열려서 마치 한 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아랫음부의 경우 아랫음부의 하늘이 벗겨지는 것처럼 공간이 열립니다. 그러면 그 순간 아랫음부의 사람들도 1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 바로 앞에 선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렇게 윗음부와 아랫음부뿐 아니라 둘째 하늘의 에덴동산의 사람들도 생생하게 이 심판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치 하나 된 공간에서 보는 것처럼 이 놀라운 광경을 낱낱이 목도하지요. 물론 그들은 경작을 받지도 않았고 대심판을 받는 대상도 아닙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경작 받고 심판받는 사람들은 그들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의 시조인 아담과 그 후손들이지요. 더구나 에덴에 사는 사람 중 많은 수가 아담과 하와의 자녀요 손자, 손녀로서 함께 살았고 아담의 영광과 저주를 목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사람들의 일은 그들에게도 항상 궁금한 관심 분야이지요. 이제 이 대심판을 목도하는 것은 에덴동산의 사람들에게도 경작에 대해 좋은 깨우침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 때는 3하늘도 열립니다. 3하늘 천국의 하나님의 보좌 앞에는 수정과 같이 맑은 유리 바다가 있지요.
심판 때는 이 유리 바다에 각 사람들의 행위가 세세하게 비춰집니다. 3하늘의 공간이 열리면 이 유리 바다도 1하늘에 펼쳐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옮겨진 것처럼 모든 이들 앞에 나타나 보이지요. 이렇게 여러 공간이 하나처럼 열리기 때문에 심판 때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1하늘의 땅과 하늘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고 표현했지요.
또 한 가지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이 심판 이후로는 1하늘의 땅과 하늘이 더 이상 아무런 역할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1하늘의 지구는 물론 태양계도 전 우주도 어차피 인간 경작을 위해 만드신 공간이지요. 이제 심판 후에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이 다시 이 지구를 찾아와서 돌아보는 일도 없고 에덴동산의 사람들이 올 일도 없습니다. 지구에 생명력이 있어서 운행되거나 네 계절이 펼쳐지는 것도 아니구요.
그러나 이 공간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공간 자체가 존재는 하되 하나님께서 그 공간으로 통하는 문을 닫아버리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에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했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이란 영이 죽은 자 곧 구원과 상관없는 자들을 말합니다.
이 땅에서 살 때의 지위나 부귀영화에 상관없이 큰 자나 작은 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됩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이 사람들은 모두가 지옥으로 가게 되지요. 그중에서도 각자의 행위에 따라 불못으로 가거나 그보다 7배나 뜨거운 유황못으로 갑니다.
본문에 보면 책들과 생명책이 구분되어 나옵니다. 생명책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책입니다. 그리고 다른 책들에는 모든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행위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책들은 누가 기록한 것일까요? 이 기록을 전담한 천사들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담당하는 천사가 붙여져서 각 사람이 이 땅에서 태어나 죽을 때까지 모든 마음과 생각, 행위를 기록하는 것이지요.
마 12:36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하셨습니다. 이처럼 말 한마디까지 기록되어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남을 미워하므로 흘긴 눈빛 하나, 비방하고 험담한 말 한마디, 때리고 혈기내고 싸운 것, 살인, 간음, 도적질, 침하나 뱉은 것까지도 천사들은 놓치는 것이 없지요.
물론 선한 일을 한 것도 다 기록하구요. 구원받은 자녀들의 행위도 다 기록은 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도들의 경우 주님을 영접하기 전에 지은 죄들은 주님을 영접할 때 사해지기 때문입니다.
시 103:12에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한 대로 주님을 믿고 죄를 회개할 때 보혈의 공로로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또 주님을 영접한 후에 지은 죄들도 중심에서 회개하고 돌이켜 빛 가운데 거하면 다시금 용서받을 수 있지요. 그렇다 해서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무조건 용서받는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 회개라야 하지요.
히 10:26에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 했습니다.
참으로 회개했다면 그 후로는 변화되어 회개의 열매를 맺어나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회개하면 용서받으니까’ 하면서 계속 죄를 지어나가면 이것은 믿음도 아니고 용서받을 수도 없지요. 또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 성령 훼방, 거역, 모독한 경우도 사함 받을 수 없는 사망에 이르는 죄라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회개의 영을 주시지 않으므로 회개할 수조차 없습니다. 심판받은 후에는 불과 유황못 중에서도 유황못에 들어가게 되지요. 책에 기록된 내용을 근거로 심판을 할 때 혹 “나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하고 부인하는 사람이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책들에 기록된 내용 외에 더 확실한 증거 자료를 보여 주십니다. 바로 셋째 하늘의 하나님 보좌 앞에 있는 유리 바다에 나오는 장면들이지요. 여기서 책에 기록된 바로 그 내용이 마치 영화처럼 그대로 재현되어 보입니다.
당시의 말이나 행동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 의도까지도 다 보여주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마음과 생각, 뜻, 중심, 말과 행실, 모든 것을 다 종합하여 정확한 증거에 의해 진행됩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나는 억울하다”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본문 13절에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했습니다. 죽은 자 곧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심판을 받는데 바다와 사망, 음부가 그들을 내어준다 했지요.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먼저 ‘바다’란 영적으로 사람이 경작 받은 터전 곧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바다가 곧 세상이 죽은 자들을 내어준다는 것은 이 심판받을 자들이 세상에서 경작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려 주지요. 또한 세상은 심판을 위해 죽은 자들의 육을 내어줍니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고 죽음을 맞으면 그 영혼은 아랫음부에 갇히게 되고 육은 썩어서 세상 어딘가에 흙으로 변해 있지요. 그런데 대심판 때가 되면 아랫음부에 있던 죽은 자들의 영혼도 심판에 맞는 육을 입게 됩니다.
물론 이들의 영혼육은 구원받은 자녀들의 영혼육과는 다릅니다. 표현상 ‘영’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영’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고, 영의 구실을 할 수 없는 죽은 영이지요. 단지 영체만 남아서 영원불멸의 속성을 지닌 것뿐입니다. 그들의 육도 성도들의 부활체와는 달리 신령한 몸이 아닙니다. 단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영원불멸의 속성을 지닌 육이지요.
구원받은 성도들이 온전한 영체를 입으면 천국이라는 공간에서 누리는 기쁨과 행복을 더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와 비슷한 의미로 죽은 자들도 심판을 위해 육을 입게 되면 지옥의 형벌이 더 생생하게 와 닿습니다.
아랫음부의 형벌보다 지옥의 형벌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이 더 큽니다. 그런데 더욱이 지옥에서는 육을 입기 때문에 육을 입지 않은 아랫 음부에서보다 그 고통이 더 뚜렷하게 느껴지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사망이 죽은 자들을 내어준다” 했습니다. 이 말씀은 죽은 자들이 심판을 받는 것은 바로 자신들의 행위로 인한 것임을 말합니다. 롬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대로 모든 심판이 철저히 공의에 의해 이뤄진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지요.
경작 받는 동안 지은 각자의 죄과에 의해서 죽은 후에는 아랫음부로 떨어지고 그 후에는 불못과 유황못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을 위해 사망이 죽은 자들을 내어주면 그들은 형벌을 받고 있던 아랫음부에서 잠시 동안 풀려 나오지요. 이렇게 죽은 자들이 잠시 사망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둘째 부활’입니다.
그러면 첫째 부활은 언제 일어났습니까? 계 20:6에 천년왕국을 설명하면서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했지요.
주님을 믿은 성도들은 주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실 때 휴거되어 ‘첫째 부활’에 동참했습니다. 부활체를 입고 7년 공중 혼인 잔치에 참여한 후 천년왕국에 내려와서 왕 노릇 하지요. 그런데 이 말씀을 들으실 때 ‘그냥 부활이 아니라 첫째 부활이라면 둘째 부활도 있다는 말인가?’ 하고 궁금해 하신 분들이 있으십니까?
당시에는 제가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지만 만약 여러분이 관심 있게 본문을 읽으셨다면 당연히 궁금해 하셨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명백하게 ‘둘째 부활’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사망이 죽은 자들을 내어준다”는 말씀이 바로 둘째 부활에 해당합니다. 둘째 사망 곧 불못과 유황못의 심판에 앞서서, 사망이 죽은 자들을 내어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부활은 생명과 구원의 부활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만 해당하는 두려움과 심판의 부활입니다. 이처럼 둘째 부활은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상관이 없는 일이기 때문에 성경에는 굳이 부활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지요.
사망이 죽은 자들을 내어주면 그들은 아랫음부의 형벌에서 잠시 동안 풀려납니다. 그렇다 해도 이는 아주 잠깐 순간의 휴식일 뿐 어떠한 평안도 소망도 없습니다. 곧 심판을 받게 되면 전보다 더 참혹한 지옥의 형벌이 있음을 알기에 두려움에 가득 차서 기다리는 것뿐이지요.
또 “음부가 죽은 자들을 내어준다” 했습니다. 이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사망이 죽은 자들을 내어주니 그들이 몸을 입고 보좌 앞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공간이 하나로 열리므로 그들은 아랫음부에 머물고 있지만 1하늘의 보좌 앞에 있는 사람 못지않게 생생히 그 위엄과 권세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처럼 바다와 사망과 음부가 모두 죽은 자들을 내어주므로 누구 하나도 피할 수 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그래서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참고로 기억하실 것은 이미 백보좌 대심판 전에 심판을 받아 지옥에 떨어진 자들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7년 환난이 끝날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산 채로 유황못에 던지운다 했지요. 또 천년왕국이 끝날 때, 배신한 육의 사람들은 불로 멸망당하고 불과 유황못에 던지운다 했습니다. 이들은 이미 심판을 받아 지옥에 들어갔으니 대심판 때에 다시 심판을 받지는 않습니다. 다만 모든 공간이 하나로 열릴 때 지옥의 공간도 열리게 되므로 그들도 불과 유황불 속에서 고통 받으며 대심판의 광경을 볼 수는 있는 것이지요.
14절-15절에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했습니다.
여기서 불못이라는 것은 불과 유황못을 다 포함하여 지옥을 대표하는 표현입니다. 사망도 아랫음부도 자기 역할을 다했고 사망에 해당하는 자들, 아랫음부에 있던 자들은 이제 지옥에 던져집니다. 사망과 음부는 불못에 던지운다 했지만 이 세상 곧 바다는 불못에 던지운다고 하지 않았지요. 세상 곧 육의 공간인 1하늘을 지옥에 던질 필요는 없기 때문에 앞에서 설명한 대로 그냥 폐해질 뿐입니다.
아랫음부 가운데서도 예외적인 경우는 다음에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딤전 5:24-25에 보면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도 각자 죄의 경중이 다릅니다. 그래서 죄가 더 중한 사람은 유황못에 들어가고 그보다 덜한 사람은 불못에 들어간다 했지요. 대심판 때에는 밝히 드러나는 죄 곧 더 중한 죄인들이 먼저 심판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심판을 받는 대로 한 사람씩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가 심판을 받고 나면 한꺼번에 지옥의 각 장소로 떨어지는 것이구요.
이제 최후의 대심판에 대한 본문 설명은 대략적으로 마쳤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여기까지 잘 이해했다 해도 대심판에 대한 전체적인 윤곽은 아직 잘 그려지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없는 내용들을 좀 더 보충하여 다음 시간에 이어서 설명하겠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과 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 구원받아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지엄하신 재판장 앞에서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선한 양심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영접한 여러분들은 심판에 대해 들어도 오히려 천국의 소망이 더해지지요. 내가 한 믿음의 행함과 선행, 충성한 것이 과연 어떠한 상급으로 주어질 것인가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주님을 믿었으니 성령을 받았으니 감사하다” 하는 경우에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계 3:5에 주님께서 약속하시기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하셨지요.
출 32:32에서도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한 번 구원받아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었다 해도 때에 따라서는 그 이름이 지워질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살전 5:19에는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한 번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 해도 계속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나가면 성령이 소멸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믿는다 하면서도 죄 가운데 살다가 성령이 소멸된 사람은 결국 믿지 않은 사람과 다를 바가 없지요.
지엄하신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그제야 얼마나 후회가 막심하겠습니까? ‘내가 왜 말씀대로 살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배웠는데 그 헛된 정욕과 세상 것들을 취하느라고 이제 이렇게 두려운 자리에 서게 되었구나!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한 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가슴을 찢으며 한탄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결코 이런 분이 없기 바랍니다.
모두가 두려움이 아닌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더 좋은 처소와 상급을 받을 수 있어야 하지요. 오늘도 이런 소망으로 하루하루를 채워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심판이 끝나는 그 순간, 여러분은 기쁨과 감사의 찬송으로 천국 문에 들어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04-13 오후 2:09:57 Posted
2023-06-04 오전 11:32:36 Upd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