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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육

제목
2차 영혼육 (8) 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을 하려면 [고후 10:3-6]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1.12.19
지난 시간에 이어 혼의 작용을 진리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혼이란 ‘사람의 두뇌에 있는 기억장치’와 ‘그 안에 저장된 기억 내용들’, 그리고 ‘이 내용들을 재생해서 활용하는 생각’을 총칭합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배우면서 느끼고 기억하는 것, 또 기억을 떠올려 생각하는 것은 모두 혼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작용들이지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러한 혼의 작용을 진리 안에서 해야 합니다. 선입관을 가지고 상대를 오해하거나 판단 정죄하고, 미워하고 시기하며 감정을 품는 등 비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합당한 진리의 혼의 작용을 해야 하나님을 닮은 참자녀로, 영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을 할 수 있는 방법 첫째, 둘째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고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을 하려면

첫째, 모든 것을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의 기준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어릴 때부터 배운 가르침이 다르고 자라난 환경과 문화 속에서 서로 다른 교양과 가치관을 만들어 왔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생각과 가치관을 주장하여 다른 사람이나 상황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이지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기준은 진리, 곧 66권 성경 안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둘째, 느낄 때도 진리에 합당하게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대하든지 진리의 느낌을 가지려면 처음 입력시킬 때부터 진리에 합당한 느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처음에 어떻게 느꼈는지에 따라 이후의 느낌이 크게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어떤 부모님이 아이를 꾸짖으면서 “목사님한테 혼난다” 하고 자신이 섬기는 목자를 무서운 분으로 입력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아이가 자라면서 목사님을 보면 무서워하여 피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아이에게 느낌을 어떻게 심어 주었느냐에 따라 이렇게 반응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어떤 일을 하면서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을 보고 비진리로 혼의 작용을 하면 ‘저 사람은 너무 들렌다, 잘난 체한다’ 하면서 감정이 생깁니다. 이렇게 비진리의 느낌이 한번 입력되고 나면 이후로도 그 사람을 볼 때는 계속해서 안 좋은 감정이 생기기 쉬운 것이지요.
반면에 진리로 혼의 작용을 하면, 똑같은 사람을 보고도 ‘저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참 열심이 있구나, 사랑스럽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떤 느낌이 한번 심어져 버리면 그 느낌을 없애려고 해도 쉽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선 가운데 받아들임으로 처음부터 진리로 느끼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미 비진리로 잘못 입력된 느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때는 비진리의 느낌을 진리의 느낌으로 바꿔 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릴 때부터 귀신이나 악한 영들에 대해 무서운 이야기들을 들으며 성장한 사람은 공포스러운 느낌으로 입력이 되어 있습니다.
공포 영화를 보고 나서 어둠 가운데 혼자 있으면 오싹오싹하기도 하고 별일 아닌 것에 놀라기도 하지요. 이럴 때 ‘안 무섭다’고 스스로 부인해 보기도 하고, 무서운 것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써 보기도 하지만 그럴수록 오히려 더 강하게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두려움을 잊으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마음에서 깨달으면 느낌이 바뀝니다. 악한 영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두려워하므로 믿음 있는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명하면 물러갑니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고 빛 가운데 살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므로 악한 영들은 우리를 만질 수도 없고, 오히려 영적인 빛으로 인해 두려워서 떠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한 영들의 정체를 밝히 알면 두려운 느낌이 더 이상 두렵지 않은 느낌으로 바뀌지요.
오래전 성지 순례를 갔을 때, 유럽 박물관의 조각상들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민망해하는 분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 또한 느낌이 잘못 입력된 경우입니다.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자신에게 입력된 느낌을 바꿔 버리면 전혀 민망하거나 부끄러워할 것이 없지요. 범사에 진리로 생각하면서 진리의 느낌으로 받아들일 때, 비진리의 느낌을 진리의 느낌으로 바꿔 나갈 때 혼의 작용 또한 진리로만 하게 됩니다.

셋째, 범사에 상대의 입장에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말을 듣거나 상황을 볼 때 자신의 입장과 경험, 사고방식 가운데 받아들이면 여러 가지 비진리의 혼의 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자기 생각에 맞춰 상대의 말을 가감하기도 하고 판단 정죄하거나 오해하여 감정을 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내가 이번에 금강산에 다녀왔는데, 경치가 너무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날 정도였다” 말했다고 합시다.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산에 대한 자료들이 즉각 떠오릅니다. 예전에 산에 가 본 경험이나, 금강산에 직접 가 보지는 않았다 해도 사진이나 텔레비전에서 본 금강산에 대한 자료 등이 떠오르는데, 대부분 이런 자료들을 토대로 해서 상대의 말을 받아들이지요.
그러다 보면 “산을 보고 눈물이 날 정도라니, 너무 과장해서 말한다”라며 판단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전에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보면서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을 받은 일이 없는 것이지요.
또 어떤 사람이 화상을 입어 계속해서 고통을 호소한다고 합시다. 그런 고통을 겪어 보지 못했거나 인내심이 더 강한 사람이 볼 때는 ‘엄살이 참 심하다’ 생각합니다. 이렇게 자기 입장과 경험에 맞춰서 상대의 말을 받아들이면 비진리의 혼의 작용이 나오게 되지요.
하지만 상대의 입장에서 받아들인다면 ‘내가 산에 갔을 때는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지만, 저 사람이 볼 때는 아름다웠나 보다’ 하고 이해하려 하고 믿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상대가 엄살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고통을 이해해 줍니다.

만일 늦게 퇴근한 남편이 아내가 묻는 말에 대답도 잘 해주지 않고 퉁명스럽게 대했다고 합시다.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나를 사랑한다면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하고 서운한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주면 ?남편이 피곤해서 그러는가 보다’ 혹은 ‘오늘 무슨 힘든 일이 있었나?’ 하면서 이해하고 품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남편이 힘을 내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지요.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었다 해도 늦게까지 기다린 아내의 입장을 생각하면 아내를 서운하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둘 중 한 사람만이라도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여 진리로 혼의 작용을 하면 화평이 깨어질 일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은 왜 저런 모습일까? 하고 판단하고 멸시하기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겠지’ 하거나 ‘아직 온전한 것은 아니니까’ 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상대를 이해할 수 있으면 허물을 보아도 용서할 수 있고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고 품어 버리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을 좇을 수 있으니 미워할 것도 없고 마음이 불편할 것도 없지요. 설령 상대로 인해 자신이 해를 입는다 해도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 주는 사람은 그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사랑하고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7년간 병 중에 있을 때, 돈을 벌지 못하고 가족을 고생시킨다고 해서 저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람들을 도무지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아픈 것도 서러운데 그처럼 멸시하는 사람들에게 서운하고 한이 맺혔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을 치료받은 후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알게 되자, 그들에 대한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딸이나 여동생을 데려다가 심한 고생을 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그렇게 미워할 수도 있었겠다고 이해하게 된 것이지요. 그러자 그들을 미워하고 싫어하던 감정이 사라지고 사랑하고 섬길 수 있는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능히 원수까지도 사랑하게 됩니다.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가 그러했지요. 스데반 집사는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유대인들의 악함을 지적했는데 이 말에 찔림이 된 유대인들은 그를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는 아무 잘못도 없이 돌에 맞아 죽어 가면서도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보의 기도를 올렸지요(행 7:60).
물론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라는 것이 무조건 잘못을 묵인하여 덮어 주라는 것도 아니고, 악을 행하는 사람을 보고 “선하다”고 거짓말을 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을 기준으로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고, 때로는 스데반이 그런 것처럼 상대의 악함을 깨우쳐 주고 권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으로 인해 상대를 미워하고 무시하는 것이 아니며, 잘못에 대해 책망한다 해도 상대가 회개하여 영혼이 잘되기를 원하는 참된 사랑에서 하는 것이지요 이런 마음이기 때문에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긍휼의 기도를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혼의 작용을 진리로 하려고 할 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노력과 동시에 불같이 기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야 하지요.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말과 행실을 늘 점검하면서 혼의 작용을 진리로 바꿔 나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으로 들어가면 생각이나 느낌을 쉽게 지배할 수 있습니다. 영이 주인이 되어 혼과 육을 지배하기 때문에 마음먹기에 따라 모든 것을 조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싶지 않으면 즉시 차단할 수도 있고 심지어 냄새나 소리, 통증까지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차단할 수 있지요.
모든 생각과 느낌을 지배하여 진리로만 혼의 작용을 하면 항상 기쁨과 감사로 충만하며, 생명과 평안이 넘칩니다(롬 8:6). 우리가 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을 하기 위해 계속 기도하면서 노력해 나가면 결국은 변화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리의 생각, 영의 생각들만 할 수 있고 생각과 느낌을 마음먹은 대로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진리로 분별하며, 진리로 보고 듣고 느낌으로 비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들을 다 벗어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리의 생각을 하는 신령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12-23 오전 1:39:07 Posted
2021-12-26 오전 11:52:13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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