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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2)  [계 1:2-4]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1.08.13
우리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아시는 분은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의 그릇은 어떤지, 성격은 어떤지, 어떤 달란트를 가지고 있는지, 중심은 어떠한지 등을 속속들이 다 아시지요. 그러니 우리들에게 가장 합당하고 좋은 길로 인도하실 수 있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주 안에서 어떠한 사명에 가장 합당한지를 아시므로 그에게 맞는 사명을 주시게 되지요.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저 사람에게는 저 사명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시각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제자 요한을 부르실 때만 해도 그 당시의 요한의 모습만을 보면 사람들은 그가 장차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위해 쓰임 받게 될지를 전혀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막 3:17에 보면 예수님께서 요한과 그의 형제 야고보에게 보아너게 즉, 우뢰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더해 주시는 장면이 나오지요. 그리고 왜 이들에게 이러한 이름이 더해졌는지를 잘 알 수 있는 사건이 바로 눅 9:52 이하에 나옵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을 위해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저희를 받아들이지 않았지요. 그러자 이어지는 54절에 보면,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합니다.

우뢰의 아들이라 불리었던 요한의 급하고 격렬한 성격이 잘 나타나 있지요. 바로 이러한 요한이 훗날에는 변화되어 수많은 사람을 품고 회개시키는 사랑의 사도요, 또한 주님 앞에 무수한 기도를 쌓아 올림으로 계시의 말씀을 받아 내리는 사명자가 된 것입니다. 변화되기 이전의 요한을 생각한다면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사명이지요.

그러나 누구보다도 요한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잘 다듬고 변화시키셔서 주님의 귀한 도구로 쓰임 받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주님의 여러 제자들과 사도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일에 가장 합당한 자로서 사도 요한을 택하셨던 것이지요. 요한계시록과 같이 깊은 계시의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끌어내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무수한 인내의 세월 가운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절제해야 하며 능히 마음을 다스려 나갈 수 있어야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변화된 요한이 바로 이러한 그릇으로 합당할 것을 아셨기에 그를 통해 이처럼 막중한 사명, 곧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런 것처럼, 저와 여러분에 대해서도 누구보다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가장 알맞은 길로 이끄시기 위한 계획과 섭리를 가지고 계시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는 대로 각 사람에게 가장 합당한 대로 사명을 주시고 인도해 가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해 큰 자부심과 열정을 가지고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그릇대로 사명을 주시되 어떤 사명은 귀하고 어떤 사명은 덜 귀한 것이 아니라 정녕 사명을 맡은 사람이 자신의 사명을 얼마나 귀히 여기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사명의 가치가 달라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도 “계시”라는 단어에 대해 막연하게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을 수 있는가?’ 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 무조건 잘못되고 이상한 것으로 몰아가기도 하지요.

이런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는 물론이고 초대교회 당시에도 있었던 것을 봅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에 정통하며 율법대로 산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자신들은 전혀 체험하지도 못하는 영의 세계를 주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은 체험해 나갑니다.

그러니 제사장들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은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일어났던 것이고 자신들의 입지에도 큰 위협을 느끼게 되자 주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을 잘못되었다 하며 몰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러한 유대인들로부터 잘못되었다는 말을 들었던 사람들 특히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말까지 들었던 사도 바울의 경우에는 많은 계시가 임했던 것을 알 수가 있지요. 따르는 권능의 역사들로 그 말씀을 확증했구요.

고전 14:6에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했고, 고후 12:1에는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했습니다.

또 고후 12:7에서는 ‘여러 계시를 받았다’ 했고, 갈 1:11-12에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시대이든 신약시대이든 하나님께서는 악은 모양이라도 없고 거룩하며 주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들과 교통하셨고, 그들에게 주신 계시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밝히 선포해 나가셨지요. 사도 요한 역시 그러한 자격을 갖추었기에 마지막 때의 깊은 비밀을 담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받아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2절에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말씀합니다.

요한은 하나님과의 교통함 가운데 받은 내용과 자신이 환상을 통해 본 내용,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시는 동안 증거하시고 행하셨던 것들을 자기가 본 대로 기록했다 말하고 있지요.

요한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 또는 지식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더하거나 빼는 것 없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주신 그대로를 성령의 감동함으로 정확하게 기록했습니다. 이처럼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시작함에 있어서 먼저 이 책에 기록된 내용이 누구로부터 왔는지를 분명히 했던 것이지요.

이 요한계시록의 모든 말씀은 오직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나온 것이므로 사람 편에서 자기 생각과 이론에 맞추어 판단해서도 안 되는 것이며, 믿지 못하여 의심해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내용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일점일획 틀림이 없는 사실이며 반드시 이루어질 일들이지요. 먼저 이 사실을 믿고 계시록을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 예언의 말씀’이란, 직접적으로는 요한계시록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넓게는 성경 66권 말씀 전체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대할 때 단지 이 안에 담긴 내용만 가지고는 그 내용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지요.

성경의 말씀은 반드시 짝이 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서로 짝을 맞추어야 전체적인 의미를 올바르게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이 한 권의 책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성경 66권의 말씀 전체를 함께 짝을 맞추며 풀어 나가야 하지요.

그런데 본문에는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 말씀합니다. 먼저 ‘읽는 자’라고 했는데, 읽는 것은 개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한 사람 한 사람 개인적으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읽는 자’라고 단수를 썼지요.

그런데 본문에 ‘읽는다’ 하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단지 지식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말씀을 알기 원하고 깨닫기 원하여 정녕 사모하는 마음으로 읽기를 원하시지요. 그럴 때라야 읽는 말씀이 마음에 심겨지며 영의 양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듣는 자들”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자들’이라 하여 복수를 썼습니다. 이것은 단에서 선포하는 말씀을 여러분 전체가 듣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지요. 말씀을 증거하는 것은 주로 개인보다는 다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자연히 많은 사람이 함께 듣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때도 “듣는다”고 하는 말씀이 단순히 증거되는 말씀을 귀로 듣는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요. 아무리 많은 말씀을 들어도 자기 생각 가운데 걸러서 듣는다거나 선하지 못한 마음으로 들으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의심하거나 판단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마음의 문을 열고 선한 마음으로 들어야 하며 자기 생각과 지식에 맞추어 들어서도 안 되지요. 또한 증거되는 말씀도 정녕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보장받는 사람의 입술을 통해 나오는 말씀이어야 그 말씀을 들을 때, 듣는 사람에게도 변화와 생명이 될 수 있는 것이구요.

마지막으로 “지키는 자들”이라 했는데, 여러분이 이 예언의 말씀을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하면서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지켜 행합니다. 그래서 “자들”이라 복수로 말씀하신 것이며 이렇게 지켜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바로 복이 임하게 되지요.

읽기만 한다고 해서 복이 임하는 것도 아니고, 듣기만 한다고 해서 복이 임하는 것도 아니며, 읽고 듣고 지켜 행하는 이 삼박자가 맞을 때 비로소 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읽지 않고 듣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가 없으니 결국 말씀대로 지켜 행할 수도 없으므로 복을 받을 수가 없지요.

하지만 읽고 들었다 해도 정작 지켜 행하지 않으면 이런 경우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구요.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늘 가까이 해야 함을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반드시 지켜 행할 때만이 약속된 복을 받을 수 있음을 누누이 말씀합니다.

시 103:17-18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했지요. 또한 시 119:1에는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라고 했습니다.

시 101:6 후반절에는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하는 이러한 큰 소망의 말씀까지 주셨지요. 신약에도 마 7:24에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했습니다.

약 1:22에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이어지는 25절에는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했지요.

이처럼 성경은 읽고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할 것과 그렇게 할 때 복이 임하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처럼 마지막 때에 대한 너무나 중요한 말씀을 읽고 듣는다 해도 그냥 흘려버리고 만다면 아무런 유익도 되지 않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읽고 들은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더욱이 “때가 가까움이라” 하신 대로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곧 가까이 다가올 마지막 때의 징조들과 관련된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마지막 때의 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읽고 들어서 어떻게 지켜 행하느냐에 따라 신랑 되신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자세가 전혀 달라지게 됩니다.

“때가 가깝다”고 아무리 외쳐도 그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여전히 세상과 짝하며 세상 가운데 살아간다면 이런 사람은 전혀 주님 맞을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지요. 그러니 이런 사람은 막상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러 오셨을 때는 가장 중요한 구원의 복조차 받기 어려운 것입니다.

반면에 지금까지는 비록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지 못했다 해도 이제부터라도 말씀대로 지켜 행하며 바른 신앙생활 가운데로 들어온다면, 이런 사람에게는 “복이 있다” 하신 대로 가장 소중한 구원의 복이 임할 뿐만 아니라, 성경에 약속된 수많은 복이 임하게 되지요.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처럼 “때가 가깝다.” “이 일들이 속히 되어진다.” 이런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을 핑계 삼아 도리어 잘못된 신앙생활로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학생의 경우에 ‘이제 곧 주님이 오실 텐데 공부는 해서 무엇 하나.’ 하며 학생의 본분까지도 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학교 공부도 등한시 하고, 학생의 신분을 벗어나는 행동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학생의 입에서 ‘주님 오실 때가 가깝다.’고 하는 말이 정말 그 사실을 믿는 마음에서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정말 주님께서 오실 때가 가깝다는 것을 믿는다면 오히려 학생으로서 해야 할 바를 더 열심히 하겠지요.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녀가 될 것이고, 주변으로부터도 인정받는 학생이 될 것입니다. 물론 더 깨어 기도하며 하늘에 상급 쌓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것이구요.

그런데 그렇게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믿지 않기 때문이며, 어차피 공부하기 싫어하고 놀려고만 하던 사람이 ‘주님 오실 때가 가깝다’는 것을 핑계 삼아 더욱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도, 사업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운 것을 알면 알수록 더 열심히 충성할 것이고 더 열심히 일도 하고 사업도 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들을 위해 쓰지 않겠습니까?

하늘에 더 많은 상급도 쌓기 위해 더욱 부지런히 사명감당도 하며 무엇보다도 신부단장을 위해 노력할 것이구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당장이라도 주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 만날 ‘나의 때’는 언제가 될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곧 오신다’는 말을 들으면 너무나 마음이 기쁘고 설레게 됩니다. 사람 사이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곧 만날 수 있다고 하면 당연히 마음이 설레고 기대가 될 텐데, 하물며 신랑 되신 주님을 곧 만날 수 있고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면 이 얼마나 가슴 벅차고 감격적인 일입니까?

그렇다면 이처럼 가슴 벅차고 감격적인 순간을 기쁘고 행복하게 맞을 수 있는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준비를 해 나가야 할까요? 그 방법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주신 말씀 안에 담겨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내용을 본격적으로 전하기에 앞서 이 편지들을 쓰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을 해 나가고 있지요.

4-6절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를 택하여 그들에게 편지를 보내도록 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일곱 교회는 소아시아라 불리는 지역에 있던 교회들로서 소아시아는 사도 바울이 사역을 시작할 때 처음 대상으로 삼았던 지역이지요.

따라서 그 당시로서는 이 지역에 있던 교회들이 가장 든든한 반석에 서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당시에 십자가의 도와 주님의 부활, 재림 등을 믿는 믿음의 반석에 서 있는 교회들을 택하여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하신 것이지요.

그렇지만 일곱 교회에 주시는 내용이 단지 일곱 교회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의 모든 교회들을 대표하는 것이고, 시공을 초월하여 그 이후로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수많은 교회들과 지금도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들을 대표하고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완전수 ‘칠(7)’에 해당하는 일곱 교회를 택하여 말씀하심으로써 장차 주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실 때까지 있게 될 이 땅의 모든 교회 전체 위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일곱 교회 각각에게 주시는 칭찬과 책망이 꼭 그 교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유형별로 어느 교회에나 있을 수 있는 그런 모습을 말씀해 주고 계시다는 말이지요.

앞으로 새롭게 풀어지는 일곱 교회에 대한 말씀을 들어보시면 이들 일곱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 오늘날에도 얼마나 정확하게 해당되며 그대로 성취되어 가고 있는지를 보면서 놀라게 될 것입니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 했는데, 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장차 오실 이’는 당연히 주님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신 분’은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주님과 성령님도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지만, 태초에 홀로 계셨던 분은 오직 아버지 하나님 한 분이시지요.

그러나 삼위일체 하나님은 근본 하나이시기 때문에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을 지칭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일곱 영이 있다 했지요.

계 4:5에도 보면,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했습니다. 이 일곱 영에 대해서는 다시 설명이 되겠지만, 먼저 간략하게 일곱 영의 개념을 설명드리자면 일곱 영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영입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영의 분리를 통해 하나님과 똑같은 마음을 가진 영을 분리해 내실 수가 있는데, 이렇게 분리되어진 일곱 영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모든 것을 살피고 측량하는 역할을 하지요. 마치 나라의 임금이 직접 가지 못하는 곳에 임금의 권한을 가진 사자를 대신 보내어 모든 것을 살피고 오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임금의 명을 받고 가는 사자는 아무리 정확히 살핀다 해도 임금의 마음과 똑같은 관점에서 살필 수는 없지요. 명을 받은 사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똑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시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곱 영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가진 영이 분리되어 정확히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뜻에 맞추어 모든 것을 살피고 측량하여 결정을 내리지요. 이 일곱 영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어디든지 갈 수가 있으며 모든 사람에 대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살피고 분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일곱 영의 측정 기준에 따라 응답과 축복과 문제 해결 등의 모든 것이 결정되지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 곁에 계십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일곱 영과 같은 영의 분리를 통해 늘 이 땅을 감찰하시지요. 불꽃같은 눈동자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키시며 동시에 불꽃같은 눈동자로 모든 것을 살피십니다.

또한 주님의 영도 주의 자녀들이 모인 곳에는 어디든지 함께하시며 늘 은혜와 능력을 주시며,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시지요. 그리고 마음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도 각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고 여러분이 어느 곳에 있든지 늘 진리 가운데로 이끄시고자 합니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세상을 이기고 나갈 수 있는 힘을 주시지요. 그러시면서 각 사람의 신앙에 대해서도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각 사람에게 맞는 신앙의 길로 인도해 가시지요.

지금도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로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의 삶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풍성하신 은혜와 축복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1-08-18 오전 11:27:32 Posted
2024-01-07 오후 3:08:18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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