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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54) 짐승과 우상 [계 14:11-18]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10.28
지난 시간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계 14:9-10에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한다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세력과 그들의 우두머리를 경배하며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적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이마나 손에 표를 받게 되지요. 그것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게 되는데 이는 곧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의미하지요. 이 형벌은 끝이 없습니다.

계 14:11에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리로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하더라”

고통의 지옥불은 영원히 꺼지지 않으며 거기서 피어오르는 고난의 연기도 밤낮 없이 세세토록 올라갑니다. 최후의 백보좌대심판이 있기 전에는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영혼들이 아래 음부에서 대기하며 형벌을 받고 있지요.

아래 음부에서의 고통도 너무나 참혹하지만 적어도 잠깐 동안은 쉼이 있습니다. 계속해서 형벌이 이어지는 가운데 다시 새롭게 형벌이 시작되기 전까지 아주 잠깐 동안의 쉼은 있지요. 물론 곧 다시 이어질 형벌에 대한 공포로 인해 마음 편히 쉼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형벌 사이의 간격은 있다는 말이지요.

예전에 ‘지옥’ 설교를 할 때 성령을 심히도 훼방한 어떤 부부가 아래 음부에서 형벌 받는 모습을 설명했습니다. 불이 지펴진 투명한 항아리 안에 독하고 고약한 냄새나는 액체가 가득 차 있지요. 이 안에 부부가 번갈아 가면서 한 사람씩 들어가 형벌을 받게 됩니다.

끓는 액체 속에 들어가면 온몸이 두꺼비 등처럼 부르트고 안구가 튀어나올 정도로 고통을 받지요. 항아리 밖으로 머리라도 내밀면 지옥사자가 사정없이 짓밟아 다시 밀어 넣는데 그의 발에는 못 같은 것이 빽빽이 박혀있습니다. 그 발길질을 피하려고 머리를 집어넣지만 뜨거운 고통을 이기지 못해 다시 머리를 내밀고 그러면 또 지옥사자의 발에 짓밟히지요.

부부 중에 하나가 형벌을 받는 동안 다른 하나는 그 장면을 지켜봅니다. 항아리가 투명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고통 받는 모습을 밖에서도 그대로 볼 수가 있지요. 이렇게 상대가 형벌 받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부부간의 정으로 인해 상대를 건져달라고 애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지지요.

“너 때문에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한다.” 하며 나중에는 상대를 욕하고 서로 원망합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덜 고통을 받기 위해 상대의 형벌이 더 길어지기를 바라지요. “그를 거기에 더 오래 있게 하소서, 잠시라도 내가 더 쉴 수 있기 원합니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래 음부에서는 참혹한 형벌의 고통이 계속되지만 그래도 잠시의 쉼이라도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대심판 후에 지옥의 불못이나 유황못에 떨어지면 거기서는 잠시의 숨 돌릴 틈도 없지요. 누구와 교대하는 것도 없고, 언젠가 이 고통이 끝나리라는 소망도 없습니다. 끊임없는 고통으로 몸부림쳐야 하고, 더욱이 유황못에 떨어진 경우에는 그 뜨거움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지요.

본문에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 기록한 말씀이 바로 이 지옥의 참상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설령 7년 환난에 떨어진 사람이라도 적그리스도가 아무리 고문하고 회유한다 해도 결코 짐승의 표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고문이 아무리 잔혹하다 해도 그 고통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순교할 수만 있다면 그나마 지옥만은 면할 수 있지요. 하지만 그 고문의 시간을 못 이겨서 짐승의 표를 받고 나면 그 후로는 영원한 형벌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반면에 그 고통을 이겨내면 그 후에는 쉼이 있지요.

계 14:12에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물론 이 말씀은 창세 이래 구원받은 모든 성도에게 해당됩니다. “믿습니다.” 고백만 한다고 해서 모두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요. 믿는 사람에게는 인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기 위한 인내가 있는 것이지요. 영원한 내세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좁은 길도 마다하지 않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인내가 없다면 결코 할 수 없지요.

이 말씀은 특별히 7년 환난 동안에 이 땅에 남은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비록 그때라도 회개하고 돌이켜서 어찌하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어떤 상황에서도 주를 믿는 신앙을 지켜야 하지요. 그러한 인내가 있어야 만이 그 영혼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계 14:13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구원받았다는 뜻이지요. “자금 이후로” 즉 이제부터라는 것은 7년 환난 중을 의미합니다. 7년 환난 중에라도 주 안에서 죽었다면 그는 정녕 복 있는 사람이지요. ‘구사일생’이라는 말처럼 그 험난한 상황 속에서도 간신히 구원받은 소수의 사람에 들어갔으니 얼마나 복됩니까? 이때는 오래 살아 있을수록 고난이 더해지니 한시라도 빨리 주 안에서 죽는 것이 오히려 더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셨습니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쉰다는 것은 이제 모든 핍박의 고난을 면하고 영육 간에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는 것은 그들이 믿음을 지켜 순교한 그 행함으로 인해 구원을 얻어 쉼을 얻게 된다는 뜻이지요. 순교의 행함으로 구원의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계 14:14-16에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 또 다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하니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낫을 땅에 휘두르매 곡식이 거두어지니라”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다는 것은 큰 영광을 나타냅니다. 24장로가 쓴 면류관이 바로 금 면류관이라 한 대로 천국에서 주어지는 금 면류관은 큰 영광입니다.

‘이(利)한 낫’ 즉 날카로운 낫이 나오는데 낫은 풀이나 곡식을 베는 도구입니다. 이 낫은 영적으로 하나님께서 때가 이르매 어떤 일에 매듭을 지으신다는 의미이지요. 즉 잘라서 끝내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바로 6천 년 인간 경작을 마무리하시고 그 열매를 거두신다는 의미로 낫이 등장한 것입니다.

천사가 하나님의 명을 전달하자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들고 있던 낫을 땅에 휘두르고 이에 곡식이 거두어졌습니다. 여기서 곡식은 구원받은 영혼들을 의미합니다. 땅을 경작하여 곡식을 수확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경작하여 알곡 된 참 자녀들을 얻고자 하셨지요.

그래서 ‘인간 경작의 역사’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농부가 곡식을 경작하듯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경작하신다는 의미이지요. 농사를 지을 때도 한 번 심고 거두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매년마다 심고 거두기를 반복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아담의 범죄 이후 6천 년의 세월 동안 무수한 사람들을 경작하셨습니다.

마침내 정하신 기한이 다 차므로 이제는 모든 경작을 마무리하시게 되지요. 이렇게 모든 인간 경작의 역사를 마무리하는 것을 본문에서는 “낫을 휘둘러서 익은 곡식을 거둔다”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름 위에 앉은 이는 누구일까요? 여기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구약의 관점으로는 모세입니다.
본문에 모세를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처럼 보인다고 표현한 이유는 천국에서 모세의 영광을 표현하기 위함이지요.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은 지금 영안이 열려 보기는 하지만 자신은 아직 육의 몸을 입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이미 천국의 영광을 입고 있는 모세를 보니 그 모습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것이지요. 더구나 모세는 경작 받은 영혼들 중에 가장 높은 서열에 속해 있으니 얼마나 빛나고 엄위한 모습이겠습니까? 그러니 사람이라고 하지 못하고 “사람과 같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모세가 여기 등장하는 것일까요?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약의 율법을 받아 내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영계의 법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이 땅의 법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신 영의 세계의 법에도 따라야 하지요. 이러한 영의 세계의 법칙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수많은 영계의 법칙들 중에 이 땅에서 우리가 지키고 행해야 할 것을 알려 주신 것이지요. 이 율법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고 영의 세계를 유지하는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동시에 인간 경작에 필요한 모든 것도 담겨있지요.

인간 경작의 기한과 목적 그리고 방법까지 다 담겨 있습니다. 또한 축복과 저주, 죄와 사망, 심판과 구원 등 이 모든 것들이 설명되어 있지요. 우리가 이러한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구원받고 축복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런 사람은 사람의 본분을 떠난 것이고, 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무리 사람의 형상을 입고 있어도 사람의 본분을 떠나 짐승과 같이 되면 그는 천국에 이를 수가 없지요. 그래서 경작을 다 마친 후 모세에게 주신 율법이 심판의 기준이 됩니다.

모세가 낫을 휘둘러 곡식을 거둔다는 것이 바로 모세에게 주신 율법에 따라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의미이지요.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 모세의 율법이므로 모세가 낫을 휘둘러 곡식을 거두는 것입니다.

둘째로, 구름 위에 앉아 낫을 든 이는 주님을 의미합니다.
요 5:27에 보면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심판자요 재판장이십니다. 그 권세를 혼자만 가지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도 심판의 권세를 나눠 주셨지요. 최후의 대심판 때도 성부 하나님 홀로가 아니라 성자, 성령 하나님도 함께 보좌에 앉아 심판하십니다.

구약 시대의 심판의 기준은 모세에게 주신 율법입니다. 구약의 관점으로 볼 때는 낫을 들고 거두는 이가 모세가 된다 했지요. 그러나 신약에서는 주님을 믿는 믿음에 따라 심판이 이뤄집니다. 또한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이며 모세도 율법을 완성하실 주님의 그림자입니다.

행 3:22-23에 보면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했지요. 그리고 이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러면서 이후로는 심판의 기준이 주님이 되시지요.

요 3:17-18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하셨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사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고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율법을 온전히 이루셨지요. 이제부터는 예수님께서 그 낫을 휘둘러 구원받을 영혼들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사람의 아들이라 하지 않고 사람과 같은 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구름 위에 앉으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육의 세상의 하늘과는 다른 공간에 계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사람이 경작 받는 육의 세상은 제1하늘이요 가장 낮은 차원의 공간입니다. 반면에 주님께서 계시는 곳은 영의 공간으로서 제3하늘 혹은 제4하늘이지요. 이렇게 주님께서 다른 차원의 하늘에 계신 것을 구름 위에 앉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한 장면을 보았다 해도 거기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담겨 있을 수 있습니다. 요한이 본 이가 모세였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분이 바로 주님이 된다는 말입니다.

본문에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할 때 좀 이상하다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구름 위에 앉으신 이가 모세 혹은 주님이신데 어찌 천사가 감히 명령할 수 있냐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여기 등장하는 천사가 지금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사자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역사를 볼 때 아무리 서열이 높은 신하나 왕족이라 해도 왕의 사자가 와서 명령을 전할 때는 그 사자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왕의 사자가 왕의 명령을 대신 전할 때는 왕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전하지요. 왕의 명을 받고 있는 상대방에게 존칭을 쓴다거나 높임말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이치로, 지금 천사가 모세나 주님께 함부로 말을 낮춰 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명령을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치는 것은 위엄과 두려움과 긴박함 속에 이 모든 일들이 이뤄진다는 의미이지요.

계 14:17-18에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이번에는 사람이 아닌 천사가 낫을 들고 성전에서부터 나옵니다. 이 천사도 날카로운 낫을 들고 있는데 이 낫은 앞에 나온 낫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앞에서 휘두른 낫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륜에 따라 인간 경작의 섭리를 마무리한다는 의미였지요.

반면에 지금 천사가 들고 있는 낫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진리의 심판으로 마지막 결말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앞에서도 주님이 곧 심판의 기준이 되신다 했습니다. 비록 구약 시대에는 모세의 율법이 심판의 기준이 되었지만 결국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지요.

벧전 3:19에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말씀합니다. 옥에 있는 영들에게 무엇을 전파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 구약 시대에 구원받은 영들이 대기하던 곳에 가서 복음을 전파하셨지요.

모든 구원받은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리의 심판으로 인간 경작의 결말이 드러나게 되지요. 또 다른 낫을 든 천사가 지금 바로 이 일을 수행하려는 것이구요.

제단에서 나온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낫을 든 천사에게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명합니다. 불을 다스리는 천사는 심판과 재앙에 대한 권한을 받은 천사입니다. 이 천사가 다스리는 불에는 육적인 불과 영적인 불,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육적인 불이란 전쟁 무기들을 통해 일어나는 재앙의 불입니다. 인간의 악 속에서 만들어진 불이지요. 다음으로 영적인 불이란 영원히 꺼지지 않고 타는 지옥불입니다. 이런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명하니 이제 낫을 든 천사가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게 됩니다.

땅의 포도송이는 무엇일까요? 앞에서는 낫을 휘둘러 익은 곡식을 거둔다 했습니다. 이는 주를 믿는 믿음을 지킨 사람들 곧 구원받을 영혼들을 거둬들이는 것이지요. 반면에 “땅의 포도송이”란 어둠에 속해 죄 가운데 살았던 자들이 육의 기운을 받아서 맺게 된 열매입니다. 주님은 참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라 했지요.

포도나무 가지는 시간이 흘러 철이 바뀌고 수확의 때가 이르러야 열매를 맺습니다. 즉 인간 경작 6천 년의 때가 차고 나서야 포도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의 가지인 우리가 맺게 되는 열매가 바로 포도송이요 포도 열매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도 맺고, 사랑의 열매도 맺고, 빛의 열매도 맺는 것이지요.

육의 열매를 맺게 되는 사람들은 ‘땅의 포도송이’를 맺습니다. 어둠에 속해 죄 가운데 살면서 육의 기운을 받아서 비진리의 열매를 맺지요. 때가 되어 경작의 경륜이 마무리 될 때는 구원받을 알곡 영혼들을 거두는 것뿐 아니라 구원받지 못할 영혼들도 거둬들입니다.

마 13장에 보면 좋은 씨를 뿌린 밭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심어 놓았습니다. 종들이 가라지를 뽑아야 하는지를 묻자 주인이 무어라 대답합니까? 29-30에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했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알곡을 거두는데 이때 가라지도 함께 거둬서 알곡은 곳간에 넣고, 가라지는 불에 태웁니다.

계 14:19-20에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주를 부인하던 자들에게 불을 다스리는 천사의 지엄한 명에 따라 불의 재앙과 형벌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이라는 것은 심판의 틀을 말합니다. 이 심판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왕성할 때는 그 권세가 영원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며 그 추종자들도 형벌 가운데 떨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렇게 심판이 있을 것을 무수히 외쳐도 세상의 사람들은 그 말을 듣지 않지요. 설마, 설마 하며 돌이키려 하지 않습니다. 당장 눈앞에 보여지는 것에 현혹되어 앞일에 대해 깨닫지를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지막 때에 대해 예수님께서 마 24:37-39에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말씀합니다.

7년 환난이 끝나가는 시점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휴거사건도 보았고, 7년 환난의 수많은 재앙들을 보았으면서도 여전히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러다 마지막 기회마저 놓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눈에 보이는 현실에 연연하지 마시고 마지막 때의 징조를 보고 깨닫는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추수하는 마지막 날에 천국의 알곡 창고에 들어가는 귀한 영혼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11-02 오전 11:36:37 Posted
2023-06-07 오후 1:32:25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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