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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55) 알곡과 죽정이 [계 14:17-15:4]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2.11.04
계 14:17-18에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오는데 또한 이한 낫을 가졌더라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불러 가로되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하더라”

본문에 보면 이(利)한 낫 즉 날카로운 낫이 등장합니다. 낫은 무엇인가를 베는 데 쓰는 도구이지요. 따라서 낫은 영적으로 어떤 일을 끝맺음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한 낫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리의 심판으로 마지막 결말을 이룬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제 7년 환난이 막바지에 이르는 시점에서 마침내 마지막 심판의 때가 이르렀음을 뜻하지요. 그리고 그 심판의 기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 3:17-18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러나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입술로만 고백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요. 진정 주님을 믿었다면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 증거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했느냐 하는 것이지요.

약 2:17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말씀한 대로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말은 ‘얼마나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며 살았느냐’가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기준에 따라 알곡과 쭉정이가 나뉘지요.

낫을 든 천사가 그것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둔다 했습니다. 수확을 하고 나면 그중에는 잘 익은 것도 있고, 익지 않은 것도 있지요. 이런 것처럼 심판의 기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알곡과 쭉정이가 나뉜다는 말입니다. “땅의 포도송이”라고 하는 말에는 육의 열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땅의 기운 즉 육의 기운과 비진리를 먹고 자란 열매라는 뜻이지요.

계 14:19-20에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진다는 것은 심판에 던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즉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일을 행했던 이들에게 그의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심판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성령 심판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면 성령을 선물을 받습니다. 그리고 요 16:8에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말씀했지요. 성령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성령께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깨우치게 하십니다.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 안의 악과 불의를 발견하게 되지요. 이때 마음 깊은 곳에 있던 악까지 드러나면 그 순간은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이때 발견된 악을 즉시 버리면 오히려 충만함이 오며 기쁨과 감사가 넘치지요. 또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말씀대로 살 때는 늘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 발견된 악을 버리려 하지 않고, 죄인 줄 알면서도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면 마음이 괴롭고 곤고해지지요. 자기 안에서 두 마음 즉 진리를 좇으려는 마음과 비진리를 좇으려는 마음이 서로 싸우므로 힘들고 곤고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를 벗어났을 때 마음의 괴로움과 곤고함이 오는 것을 성령의 심판이라 말합니다. 마음의 고통으로 와지는 심판이지요. 이런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악을 버리지 않고 어둠의 죄악 가운데 살아가게 되면 점차 성령이 소멸되어 갑니다. 그러기 전에 신속히 회개하고 돌이켜서 성령의 충만함을 회복해야 하지요.

두 번째로 진리의 심판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의 도우심 가운데 깨우침이 온다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진리를 깨우친 대로 그대로 행하는 것은 아니지요. 깨우친 것을 100% 다 행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 그렇지를 못합니다. 사람마다 깨우친 것을 행하는 정도가 다르지요.

이때 얼마나 진리 안에 살아가느냐에 따라 진리의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 안에 살아갈 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지요. 형통함의 축복이 임합니다. 강건함의 축복과 물질의 축복도 받습니다.

반면에 깨우친 진리대로 살지 못할 때는 오히려 사단의 송사를 받게 되지요. 그에 따라 시험 환난이 찾아옵니다. 물질의 어려움, 질병, 가정의 문제 등을 그 대가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우친 것을 얼마나 행하느냐에 따라 형통이냐 불통이냐, 축복이냐 어려움이냐 등이 정해지는 것이지요. 이것을 바로 진리의 심판이라 합니다. 그런데 진리를 행치 않으므로 어떤 문제가 드러나고 그 결과가 열매로 맺히는 단계까지 이르면 이것이 곧 육체의 심판입니다.

자, 세 번째가 바로 이 육체의 심판이지요.
진리를 듣고 깨우치나 그 안에서 살아가지 못하므로 가정의 불화와 육체적 질병 등이 옵니다. 사업터에 문제가 생기고, 일이 꼬이며 물질의 어려움을 겪게 되지요. 이처럼 진리의 심판이 현저히 결과로 드러난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을 육체의 심판이라 말합니다.

결국 성령의 심판의 다음 단계가 진리의 심판이고, 진리의 심판의 다음 단계가 육체의 심판이라 할 수가 있지요. 성령의 심판에서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니 진리의 심판으로 넘어가는 것이고, 진리의 심판에서도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니 육체의 심판으로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러한 성령의 심판, 진리의 심판, 육체의 심판을 종합하면 각 사람의 신앙의 수준이 판가름 납니다. 얼마나 알곡인지 아니면 쭉정이인지가 분별되는 것이지요. 마지막 날에 이 모든 것을 종합하여 심판을 받습니다. 그 결과에 따라 마지막 불의 심판이 있지요.

성령의 음성을 멸시하며 진리 안에 살지 않고 육체의 소욕대로 살아간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고 맙니다. 그래서 마지막 불의 심판을 당하게 되지요. 따라서 마지막 불의 심판을 당하지 않으려면 그 이전의 심판의 단계에서 신속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하는 것이지요.

성령께서 탄식하실 때, 그때 빨리 깨닫고 회개하면 좋지 않습니까? 설령 육체의 심판에까지 이르렀다 해도 그때라도 깨달아 회개하고 돌이키면 되지요. 그래야 영원한 불의 심판만은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6천 년의 역사 동안 인간을 경작하시며 수없이 인내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것을 가르쳤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했지요.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종들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섭리를 이루어가시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점점 과학문명에 의지하고 자신의 지식과 지혜에 의지해 갑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죄악 가운데로 더 깊이 물들어 가고 있지요. 결국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차면 이런 사람들은 큰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조금의 흠도 점도 티도 없이 깨끗하고 온전한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비교할 때 인간의 마음은 너무나 더럽고 추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발견하여 신속히 변화시켜 나가야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진리 안에 거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도록 성령으로 심판하시고, 진리로 심판하시며, 때로는 육체의 심판을 허락하시지요. 그것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깨우치고 변화되도록 연단해 가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저버리게 되면 하나님의 큰 진노의 틀에 던져져서 마지막 불의 심판을 받게 되지요.

계 14:20에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성 밖에 있다’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틀이 밟혀 피가 난다’는 것은 심판으로 인해 받게 될 고통을 의미하지요. 이 땅에 임할 7년 환난으로 인해 흐르게 될 피는 엄청납니다. 이 땅에 떨어진 사람들은 이 7년 환난 동안 불의 심판을 받게 되지요. 3차 세계대전과 자연재해 등을 비롯한 갖가지 재앙들을 통틀어 ‘불의 심판’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심판은 전 세계를 뒤덮습니다. 전 지구상에 임하게 될 엄청난 불의 심판으로 인해 수많은 피가 흐르게 되고, 이를 가리켜 피가 말굴레까지 닿았다 표현한 것이지요. 일천 육백 스다디온은 약 300킬로미터입니다. 흘린 피가 300킬로미터에 이른다는 것은 이 불의 심판이 얼마나 참혹할지를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기회를 주셨지만 결국 그 기회를 잡지 않은 사람들은 이처럼 엄청난 심판에 떨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땅에서 받는 심판의 고통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불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육적인 불의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꺼지지 않는 영적인 불의 심판 곧 지옥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설령 휴거되지 못하고 이 땅에 떨어져서 육적인 불의 심판을 받게 된다 해도 어떻게든 주님의 이름을 붙잡고 승리해야 영적인 불의 심판만은 면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휴거 후의 일까지도 자세히 기록해 놓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들을 귀가 있어서 성령의 하시는 말씀을 들을 사람만이 듣고 깨우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마지막 때에 대해 자세히 풀어 주어도 결국 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이 듣고 회개하여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잡는다는 말이지요.

계 15:1에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

7년 환난이 시작된 이후로 오늘 본문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많은 재앙이 있었습니다. 3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무후무한 재앙이 있었고, 재연 재해를 비롯한 수많은 재앙들이 일어났지요. 앞서 나왔던 일곱 인과 일곱 나팔이 바로 이러한 재앙들을 의미한다 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마지막 재앙이 나옵니다. 이는 7년 환난을 마무리하는 재앙으로서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크고 엄청난 재앙들이지요. 그러나 7년 환난 때 일어나는 재앙들을 보면서 혹여 하나님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무자비하셔서 7년 환난에 떨어진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진노를 쏟아 붓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사실 7년 환난의 재앙들은 인간들 스스로가 자기들의 악함 가운데 사단의 사주를 받아 자초한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3차 세계대전만 하더라도 이는 사람들의 악이 폭발한 결과이지요.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마음을 주관하여 전쟁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악이 쌓이면 공의 가운데 결국 그 열매를 맺게 되지요.

더욱이 7년 환난 때는 이미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계획하신 인간 경작의 역사는 끝났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이 땅을 외면하신 채 어둠의 세력이 주관하는 것을 그냥 두시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를 외면하시면 그를 원수 마귀 사단이 가만 놔두지 않지요.

하나님의 자녀가 빛 가운데 거할 때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원수 마귀 사단으로부터 지키시지요. 그러나 어둠 가운데 살아갈 때는 사단의 송사에 내어주실 수밖에 없지요. 바로 7년 환난 중의 이 땅도 원수 마귀 사단의 주관 아래 놓여 있으므로 사람들은 악에 악을 더해 갑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외면하실 수밖에 없고 그러니 사람들은 자기들의 악을 좇아 더욱 폭력과 파괴와 살생을 자행하지요.

여기다가 사람들이 자기 유익을 좇아 이 땅의 자연을 파괴한 결과로써 엄청난 자연의 재앙 등을 통해 그 값을 치릅니다. 이제 그러한 재앙들이 최고조에 이르면서 막바지를 향해 치달아 가고 있는 상황이지요. 그것을 보면서 사도 요한은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이라 표현했습니다.

계 15:2에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계 4:6에 보면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유리 바다는 수정과 같이 맑고 깨끗합니다.

본문에 보면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다” 했지요. 유리 바다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행한 모든 것을 그대로 보여 주는 역할을 합니다. 어떤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행동을 했는지 까지도 정확하게 비춰주지요. 그러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결코 거짓이나 변명, 핑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7년 환난 동안에 순교하여 구원에 이른 사람들의 모습이 이 유리 바다에 비치면 어떤 모습들이 보이겠습니까? 그들이 어떻게 순교했는지가 보입니다. 7년 환난에 떨어졌다가 그나마 구원에 이른 사람들은 반드시 순교의 과정을 거쳐야 하지요. 순교를 통해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자신의 지난날의 잘못에 대해 공의 가운데 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7년 환난 중에 구원에 이른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 서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순교 장면을 보여 주십니다. 유리 바다에 그 장면을 비춰 주시면서 ‘이들이 이렇게 믿음으로써 값을 치르고 구원에 이르렀다’ 인정해 주시는 것이지요. 이때 보여지는 유리 바다는 불이 섞인 유리 바다처럼 보입니다.

참혹한 재앙과 핍박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순교한 모습이 비춰지니 그 유리 바다에 불이 섞인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사람들은 그날에 말할 수 없는 감사로 그 유리 바다 앞에 설 수가 있지요. 그들은 유리 바닷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계 15:3-4에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하더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셔서 마음의 온전한 할례를 이루도록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케 하셨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마음의 악을 버리고 주님의 마음을 닮는 만큼 마음속에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율법을 주심에 감사하고,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시켜 주심에 감사하지요. 그래서 모세의 노래가 나오고 어린양 즉 주님의 노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휴거되어 올라간 영혼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7년 환난에 떨어졌을 지라도 뒤늦게나마 회개하고 돌이켜 순교를 통해 구원에 이른 사람에게도 해당되지요.

핍박과 고문을 이겨내고 순교했을 때 얻어지는 그 구원의 기쁨과 감사가 마음 중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아버지의 마음과 주님의 마음을 중심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수록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의 그 오묘함과 기이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당연히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만 그것을 느낄 때마다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지요.

오직 주님만이 의롭고 참되십니다. 피조물은 당연히 그분의 이름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한 경외함이 있어야, 죄에서 떠나 진리 가운데 살 수가 있지요. 그렇게 행한 사람은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날 때 그것을 두려움으로 맞이하지 않습니다.

즉 마지막 심판의 때가 가까워 올수록 더욱 의 가운데 행하고자 노력하지요. 그리고 마지막 날에 주를 경배하며 영원한 기쁨과 감사의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주님을 경배하는 찬양을 함께 부르게 되지요.

여러분은 평소에 얼마나 자주 하나님과 주님께 감사와 경배의 찬양을 올리십니까? 물론 우리가 장차 천국에 가면 그때는 세세토록 영원히 삼위일체 하나님께 감사와 경배를 올려 드립니다. 하지만 그때 드리는 감사와 경배의 향이 모두 똑같은 것이 아니지요. 어떤 분의 향은 너무나 진하고 아름다워서 주변에 있는 영혼들까지도 은혜와 감동이 넘치게 됩니다.

반면에 어떤 분은 당당히 나서지도 못하지요. 그런데 장차 천국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어떤 향을 올려드릴지가 바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정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올리는 감사와 경배의 향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의 향이 얼마나 진하고 아름답게 담겨져 있는지요? 늘 주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찬양하는 여러분의 입술이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와 기쁨의 찬양이 끊이지 않는 여러분의 입술이 되시기 바라고요. 많은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리는 것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거기에 담긴 마음의 향이라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잡혀서 차꼬에 채여 깊은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과 실라가 밤중에 하나님을 찬미했던 그 찬양의 향이 얼마나 진하고 아름다웠겠습니까? 하나님을 감동시켜 드리기에 충분했지요. 이처럼 설령 어렵고 힘든 현실의 상황이 있다 해도 그 가운데 올려 드리는 기쁨과 감사의 향이 진정 하나님을 감동시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늘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아름다운 찬양의 향이 끊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장차 아버지 보좌 앞에서도 그 진한 마음의 향을 담아 찬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11-09 오전 10:56:17 Posted
2023-06-07 오후 1:32:25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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