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응답서비스

요한계시록 강해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77) 새 예루살렘 성 열두 기초석 [계 21:19-21]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3.06.02
본문 19절부터는 새 예루살렘 성 열두 기초석의 내용이 나옵니다.
열두 기초석은 열두 개의 보석으로 이뤄졌으며 각각의 보석들은 특별한 영의 마음을 상징합니다. ‘팔복’과 사랑장의 ‘사랑’,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의 영적인 의미가 열두 보석 안에 모두 담겨 있지요.

이 열두 보석이 상징하는 마음을 종합하면 ‘완전한 사랑’이 됩니다. 이는 곧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요, 주님의 마음이지요. 새 예루살렘의 기초석이 열두 가지 보석으로 이뤄진 것은 그 안에 들어간 사람들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곧 이들은 이 땅에서 경작 받는 과정 가운데 열두 보석 하나하나에 담긴 마음을 이뤘고 그래서 아버지와 주님을 닮은 사람들이지요. 어느 한 분야도 부족하지 않은 온전한 마음, 완전한 사랑을 이룬 사람이라야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보석들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천국 설교에서 여섯 시간에 걸쳐 자세히 설명했기에 오늘은 간략하게만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기초석은 ‘벽옥’입니다.

‘벽옥’은 ‘믿음’을 상징하지요. 새 예루살렘 성벽의 재료도 벽옥이라 했는데 이때의 벽옥은 ‘믿음의 5단계’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기초석으로서 벽옥이 상징하는 믿음은 ‘영적인 믿음’을 나타냅니다. 영적인 믿음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중심에서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한번 믿은 것을 변함없이 믿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변함없이 믿기에 항상 순종의 행함이 따르는 것이지요.

반면에 육적인 믿음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이론과 지식에 맞는 것만 믿습니다. 또 처음엔 “믿습니다” 고백하지만 막상 어려운 현실을 맞게 되면 의심하지요. 기도하다가도 중간에 포기해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다 하면서도 한두 번 해보다가 그만두기도 하구요. 영적인 믿음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지식이나 생각과 달라도 백프로 믿고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무조건 말씀대로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기초석인 ‘남보석’은 ‘곧음과 절개’를 나타냅니다.

이는 진리 안에서 한 번 뜻을 정했으면 세상의 어떤 유혹이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진실 자체의 마음이지요. 풀무불에 던져진다 해도 우상 앞에 절하지 않았던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그런 마음입니다.

사자굴에 던져질 상황에 처했으면서도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았던 다니엘 또한 이 남보석과 같은 마음을 이룬 사람이구요. 차라리 생명을 잃을지언정 진리를 저버릴 수는 없다는 초연하면서도 곧고 숭고한 마음을 바로 짙푸른 남보석의 빛깔로 나타낸 것입니다.

세 번째 기초석은 ‘옥수’인데 옥수는 ‘결백’과 ‘희생적인 사랑’을 상징합니다.

이는 허물 없는 깨끗한 마음을 나타내며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을 뜻하지요.

아무 소망도 없는 늙은 시어머니를 섬기며 끝까지 붙좇았던 모압 여인 룻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진실하게 사랑했기에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시어머니로부터 뭔가 돌려받을 수 없다 해도 다 내어줄 수 있었지요.

육의 사랑은 상대를 위해 희생한 만큼 자신도 상대에게 받기를 원합니다. 기대했던 것만큼 돌려받지 못하면 서운해 하며 상처받고 상대를 원망하지요. 그러나 진실한 사랑을 이루면 진리 안에서 내 것을 다 희생하고 내주더라도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는 사랑을 이뤄야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 기초석 ‘녹보석’은 ‘의와 푸르름’, ‘정의롭고 깨끗함’을 상징합니다.

이는 엡 5:9에 나오는 ‘빛의 열매’와 같은 빛깔입니다. 곧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함께 어우러진 것이 바로 녹보석의 빛깔이지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참된 의는 선(善)과 의(義)와 진실이 겸해진 것입니다.

착하기만 하고 의가 결여될 때는 우유부단해지거나 불의와 타협할 수도 있습니다. 또 의만 있고 선이 결여될 때 자칫하면 자기 의와 틀을 고집하게 되어 하나님의 뜻과는 멀어지기 쉽지요. 남을 판단, 정죄하거나 융통성 없게 행하기도 합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만 치중하여 생명을 살리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착함과 의로움이 겸비되어야 하며 이것이 진실하게 곧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한결같을 때 온전한 빛의 열매가 맺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홍마노’는 ‘충성’을 상징합니다.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꼭 해야 하는 만큼만 한다면 이것은 충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급여를 받는 일꾼이 자기 업무를 잘 감당하는 것도 충성이라 할 수 없지요. 그저 자기가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자신의 업무는 물론 시키지 않은 일까지도 마음을 쏟아 성실하게 이뤄 낼 때라야 비로소 “충성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는 것이지요. 교회는 물론 가정과 직장 그리고 자신이 속한 모든 곳에서 다 충성할 때 온 집에 충성한다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충성하려면 의로운 마음과 희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보다 전체와 상대를 위해 의로운 쪽을 택하며 그 의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냥 충성만 아니라 ‘온 집에 충성’을 이루기 위해서는 여기에 선(善)한 마음이 더해져야 합니다. 선한 마음이 있는 만큼 어떤 한 분야에 치우치지 않고 두루두루 마음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사명이 있으면 각각의 사명에 나름대로 경중을 두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비중을 많이 두는 사명에는 충성하지만 그 외의 사명들에는 상대적으로 충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그 소홀한 분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서운히 여긴다 해도 ‘나에게는 저 일보다 이 일이 더 중요하니까 그들이 서운해도 어쩔 수 없지’ 합니다.

그러나 선이 많이 임할수록 어찌하든 모든 분야를 다 감당하려고 노력하며 마음을 넓게 써 나갑니다. 그런 마음 씀을 느낄 때는 비록 직접 함께하는 시간이 적다 해도 관련된 사람들이 서운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쁜 와중에도 이렇게 마음을 써주시니 감사하다.” 하지요. 이처럼 선한 마음이 임하면 자신이 속한 어느 한 분야도 소홀하게 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선인지 알면서도 행치 않을 때는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온 집에 충성이 되는 것입니다. 혹여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있지만 자신의 열정이 예전과 같지 않고 영적인 진보가 더딘 것처럼 느껴지는 분들은 이 분야를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영혼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얼마나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지 또 정녕 선한 마음으로 모든 분야에 충성하는지,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온 집에 충성하는 보석 같은 마음을 이뤄야 이 땅에서도 축복의 그릇이 준비되며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자격도 갖춰지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홍보석”은 “열심과 정성”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한 열정적인 사랑’을 나타냅니다.

천국의 홍보석은 핏빛처럼 아주 붉으면서도 매우 투명합니다. 홍보석처럼 열정적인 사랑을 대표할 만한 사람은 바로 사도 바울이지요. 바울은 한 번 주님을 만난 후 일평생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았습니다.

사람으로서는 차마 감당하기 어려운 무수한 핍박과 환난을 당하면서도 그 열정이 식어지지 않았지요. 자신이 받는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가 더 염려하는 것은 오히려 연약한 영혼들과 교회들에 대한 일이었구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만 있다면 어떤 고난이나 희생도 무릅쓰며 자기 생명조차 아까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여러분에게도 이 홍보석과 같은 열정적인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일곱 번째 기초석은 ‘황옥’으로 ‘자비(慈悲)’를 나타냅니다.

이는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거나 용서할 수 없는 사람까지도 진리 안에서 선으로 이해하며 용서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있으면 편벽됨이 없습니다. 싫은 사람이나 미운 사람도 없고 걸리거나 불편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것을 선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이해해 주며 포용하여 포근히 감싸주는 마음이 바로 자비이지요.

아무리 흉악한 죄인을 볼 때도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배신할 줄 알면서도 끝까지 그를 품고 돌이킬 기회를 주셨지요. 또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자기를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 오히려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와 같은 자비의 마음을 이룬 사람이라야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덟째 ‘녹옥’의 마음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마음’입니다.

이는 억지로, 힘들게 참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악이 없고 오직 선만 가득하여 “참는다”는 말조차 필요 없는 참음이지요. 하나님의 약속이 열매로 드러나기까지 큰 역경을 만나도 참아내며 아무리 오랜 세월이 걸려도 끝까지 인내합니다.

어떤 영혼을 전도하거나 갈무리할 때도 그가 변화될 것을 믿고 견디며 끝까지 참아주지요. 또 자기 마음을 할례 할 때도 마침내 성결의 열매를 딸 때까지 오래 참습니다. 스스로 변화가 더딘 것처럼 보일지라도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감사하면서 끝까지 일궈갑니다. 이렇게 오래 참아서 마침내 거두는 열매가 바로 새 예루살렘의 영광인 것입니다.

아홉째 담황옥은 ‘양선(良善)’을 나타냅니다. 양선은 ‘성령 안에서 선(善)을 추구하는 마음’입니다.

이는 세상의 ‘양심’과 비슷한 말이지요. 양심은 옳고 그름이나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기 나름의 기준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의 양심은 시대마다, 나라마다, 개인마다 달라지지요. 반면 ‘양선’의 마음이 선악을 분별하는 기준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마음으로만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이 겉으로 드러날 때라야 진정으로 양선이 임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곧 마음에 선을 사모하는 만큼 모든 말도 덕스럽고 행실도 은혜로워서 선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게 되지요. 선한 사마리아 인과 같이 선한 일을 행함으로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줍니다.

누구에게도 들레거나 부딪히지 않습니다. 악하고 화평을 깨는 사람들을 봐도 그들을 외면하거나 꺾어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상한 갈대도 꺼져가는 심지도 긍휼히 여기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선하게 대하지요. 이런 양선의 마음이 있을 때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열 번째 비취옥은 ‘절제‘를 상징합니다.

아무리 몸에 좋은 음식이라 해도 과식하면 오히려 탈이 납니다. 운동이 건강에 좋다고 하지만 절제하지 못하므로 오히려 해가 되기도 하지요. 육적인 분야만 아니라 영적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질서를 좇아 절제가 이뤄져야 합니다.

기쁨도, 사랑도 절제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성령의 주관을 받아 어떤 일을 한다 해도 무조건 즉각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때와 방법까지 주관을 받아야 하지요.

비록 영으로 들어온 사람이라 해도 절제를 통해 모든 분야가 전체적으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더구나 아직 영으로 들어오기 전이라면 육신의 정욕을 철저히 절제하고 오직 성령의 소욕을 좇아야 하는 것이구요.

열한 번째 기초석인 ‘청옥’은 ‘청결함’을 상징합니다.

이는 ‘마음에 죄가 없는 상태’ 즉 ‘어떤 흠도, 점도, 티도 없는 깨끗한 마음’을 나타내지요. 우리가 몸을 청결히 하려면 물로 씻듯이 마음을 청결하게 할 때도 영적인 물로 씻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결케 해야 하지요.

히 10:22에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에 ‘버리라’, ‘하지 말라’ 하신 대로 순종하면 점점 마음에서 비진리와 악이 씻겨 나갑니다. 또한 ‘하라’, ‘지키라’ 하신 말씀대로 순종하면 계속해서 맑은 물을 공급받는 것과 같아서 세상 죄악에 다시 물들지 않고 늘 깨끗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순진한 어린아이의 맑은 눈빛을 바라보면 보는 사람의 마음도 상쾌해 집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녀들을 바라보실 때 하나님의 마음도 그러합니다. 자꾸 보고 싶고 더 함께 하고 싶으시지요. 이처럼 함께하고 싶으시기에 새 예루살렘으로, 하나님 보좌 가까이로 이끌어 들이시는 것입니다.

열두 번째 자정 곧 자수정은 ‘온유’를 나타냅니다.

이는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있는 큰마음’ 입니다. 솜털같이 포근하고 부드러워 많은 사람이 그 안에 깃들여 쉴 수 있는 마음, 모든 것을 선으로 이해해 주고 사랑으로 감싸 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모두를 포용할 수 있다 해도 그것이 마음속에만 있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 온유함을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내야 하지요. 온유함이 담긴 말과 행함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힘을 얻고 따뜻함과 마음의 쉼을 느낄 수 있을 때 그것이 ‘덕(德)‘이 됩니다.

덕 있는 사람은 영적인 권세를 갖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서 진리로,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 이런 마음이었기에 수백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도 능히 이끌어갈 수 있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열두 가지 보석이 상징하는 영의 마음을 간략히 살펴보았습니다.

믿음, 곧음, 희생, 정의, 충성, 열정, 자비, 오래 참음, 양선, 절제, 청결, 온유 등 이 모든 영의 마음을 종합하면 ‘완전한 사랑’이라 했지요. 새 예루살렘의 기초석도 또 성 안의 집을 꾸미는 보석들도 단순히 예쁘고 화려하다 해서 아무 보석이나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섭리가 깃들여 있지요.

또한 여러분이 다시 한 번 기억하실 것은 새 예루살렘의 보석들은 이 땅의 보석들과는 광채나 아름다움이 다르며 이름도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석 하나하나를 만드실 때 그 안에 영적인 의미를 담아서 그 의미에 맞는 색과 광채를 나타내셨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열정적인 사랑’을 상징하기 위해서는 그 의미를 잘 표현할 수 있는 핏빛처럼 붉고 투명한 보석을 만드셨지요. 우리가 이 보석을 보기만 해도 하나님을 위하여 불타오르는 열정이 연상됩니다.

또한 그 열정으로 인해 우러나는 고귀한 충성의 행함이 떠올라서 감동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영광스런 빛과 광채들을 이 땅의 보석에서 어찌 느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보석들 하나하나에 하나님께서는 천국의 언어로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그 이름이 각 보석의 빛과 결합되어 보석 자체의 위엄과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천국의 보석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이 땅의 언어로 하나하나 묘사하기도 어렵고 천국에서 불리는 보석의 이름들을 알려준다 해도 우리가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후세 사람들이 최대한 이해하기 쉽도록 이 땅의 보석 중에서 가장 비슷한 보석의 이름으로 기록한 것이지요. 이러한 열두 기초석의 의미를 떠올리며 그 보석 같은 마음들이 여러분 안에 얼마나 임했는지 늘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내가 과연 새 예루살렘에 얼마나 근접해 있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21절에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했습니다.
성벽이 높고 두꺼운 만큼 이 열두 개의 문도 매우 크기 때문에 가까이에서 보면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입니다. 큰 아치형의 문 전체가 영롱한 빛을 내는 거대한 하나의 진주로 만들어져 있고 황금 보석으로 된 손잡이가 달려 있습니다.

진주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많이 들어서 아실 것입니다. 조개 안에 이물질이 들어와 연약한 살점을 파고 들 때 조개는 고통을 참으면서 진액을 짜내어 이물질을 감싸게 됩니다. 이렇게 진액으로 한 겹 한 겹 감싸낸 결과가 바로 영롱한 진주로 나타나지요.

이런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도 새 예루살렘에 들어올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많은 인내의 시간들을 견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기 안에 있는 비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연단이라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곧 여러 가지 환경 속에서 자신의 죄악을 발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이지요.

이런 연단을 받아 자신을 발견할 때는 마음이 심히 아프고 힘이 들기도 합니다. ‘내가 이렇게 악한가?’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에 잠시 낙심하기도 하지요. 그럴 때도 힘을 내어 기도하고 금식하며 진액을 짜내어 하나님께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한 꺼풀씩 미움을 벗겨내는 만큼 사랑이 맺혀가지요. 힘을 다해 혈기와 감정을 벗겨내는 만큼 온유가 맺혀갑니다. 이렇게 자신의 죄악을 벗어 버리기 위해 진액을 다해 노력할 때 결국에는 성결된 영의 마음을 이루게 됩니다.

자녀들이 연단 받고 고통 받을 때는 누구보다도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시지요. 그런데도 이 과정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자녀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오려면 이렇게 자신을 발견하여 버리는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함을 아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연단을 허락하시고 자녀들이 조개가 진액을 짜내듯이 힘쓰고 애쓰며 성결을 이뤄가는 과정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냥 보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능력을 더해주셔서 새 예루살렘까지 들어올 수 있도록 이끄시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연단이 힘들다 해서 불평하고 한탄하거나 “이제는 다 포기하고 싶다” 하는 낙심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든 일을 겪는다 해도 오히려 “내가 이것을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로 능히 이길 수 있나이다, 반드시 아름다운 성결의 열매로 나와 아버지께 기쁨이 되겠나이다,” 이처럼 감동의 고백으로 기도해 나가는 것입니다.

또 진리대로 순종만 해나가는 사람들은 어떤 어려움이 온다 해도 마음에 충만함을 잃지 않습니다. 깊은 중심에서 여전히 기뻐하고 감사하므로 ‘이것이 연단이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승리할 수도 있지요. 모든 연단을 이기고 통과하게 되면 결국은 개선장군과 같이 눈부신 영광 가운데 이 진주 문을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를 담아 하나님께서는 새 예루살렘의 문을 문마다 한 진주로 만들어 주신 것이지요.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의 날들이 아무리 험하다 해도 장차 살게 될 영원한 천국에 비하면 잠시 잠깐에 불과합니다. 불같은 연단이 있어도, 혹은 세상에 어떤 좋은 것들이 있다 해도 세월이 지나고 보면 모두가 순간에 불과하지요.

이런 사실을 진정으로 마음에 깨달으면 이기지 못할 연단이 결코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천국에 대해 많은 말씀들을 들었고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압니다. 그 모든 지식들을 하나하나, 여러분의 마음에 소망으로 쌓아 가시길 바랍니다.

히 6:19에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했습니다. 어떤 시험 환난의 폭풍이 몰아친다 해도 이 소망이 여러분의 영혼을 꼭 붙잡아 새 예루살렘의 항구까지 인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소망의 말씀들을 붙잡고 끝까지 승리하여 반드시 진주 문을 통과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 예루살렘, 여러분의 처소에서 무한한 위로와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06-01 오후 2:26:46 Posted
2023-06-07 오후 1:33:33 Updated

다음 글 요한계시록 강해 (78) 이전글
이전 글 요한계시록 강해 (76) 다음글
이전 페이지 인쇄하기 글자크게 글자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