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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78)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석과 열두 진주 문 [계 21:21-24]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3.06.09
지난 시간에는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석과 열두 진주 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천국을 구성하는 보석들이나 진주, 정금, 이런 재료들은 각각마다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했지요.

예를 들어 누군가의 집이 ‘홍보석’으로 장식되었다면 이는 단순히 그 빛과 색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렇게 장식된 것만이 아닙니다. 그 천국 집의 주인이 이 땅에서 경작받는 동안에 일구어낸 홍보석 같은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 보석이 장식된 것 자체가 벌써 그 집 주인에게 큰 위로와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보석에만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작은 꽃잎 하나, 풀잎 하나에도 하나님께서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섬세하게 담아 놓으셨지요.

우리가 이 땅에서 숨 쉬며 살아온 하루하루와 그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 드려진 모든 생각과 마음, 말과 행동의 결과물로서 천국이 이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은 인간 경작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신 온전한 열매를 얻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증거가 됩니다.

곧 그 성의 기초석인 열두 보석은 성안에 들어간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이 보석처럼 아름답다는 증거이지요. 진주로 된 성문은 그 문을 통과하는 자녀들이 진주 같은 인내를 이뤘다는 증거가 되구요.

각 사람이 들어가게 될 집의 규모와 장식들은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했으며 어떤 믿음으로 영광 돌렸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천국이 공의대로 이뤄졌기에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더 의미 있고 감동적인 것입니다.

계 21:21 후반절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이더라”

이 땅의 길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아스팔트길도 있고 블록이나 잔디가 깔린 길도 있으며 그냥 흙 위에 난 길도 있지요. 새 예루살렘 길도 다양합니다. 보석이 블록처럼 깔린 길도 있고, 향기로운 꽃들이 마치 양탄자처럼 폭신폭신하게 깔린 길도 있지요.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서 길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재료는 정금입니다. 그 정금길이 “맑은 유리와 같다”는 것도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 사람들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마음이 맑은 사람, 곧 청결하고 성결된 사람들이 그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맑고 깨끗한 마음을 이루는 만큼 점점 더 높은 차원의 천국을 침노해 들어갈 수 있지요.

또한 이 길을 이루고 있는 ‘정금’은 영적으로 ‘소망’을 나타낸다 했습니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사는 매순간,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게 됩니다. 새 예루살렘에만 소망을 둔 사람들은 어떤 신앙의 도전을 만난다 해도 그 소망으로 인해 모든 싸움에서 승리하지요.

이처럼 오직 천국에 소망을 두고 티 없이 맑고 청결한 마음을 이뤄내야만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생명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라야 새 예루살렘의 정금길을 거닐 수가 있지요.

요 14:6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변화되어 나가야 그 사람은 생명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천국에 가서 정금길을 걷게 되면 지나간 삶의 여정을 되새기게 되지요. ‘내가 참된 것에 소망을 품고 옳은 길을 따랐으므로 마침내 이 길을 걷게 되었구나’ 하고 정금길을 걸을 때마다 감동에 젖어드는 것입니다.

계 21: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사도 요한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갔을 때 가장 궁금한 것은 하나님의 성전이었습니다. ‘성곽만 해도 이렇게 화려하고 아름다운데 성안에 하나님의 성전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기대하며 찾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나님의 성전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생각할 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요. 육의 세상에서 사람들이 경작을 받을 때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의 집 곧 성전으로 갑니다. 물론 영이신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시므로 성전 건물 안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어디에나 계십니다.

또 고전 3:16에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했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이 우리 안에 하나님께서 임하시므로 우리 마음이 성전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마음 안에도 성령님이 계시며 하나님은 세상 어디에나 계시다고 해도 아무래도 육을 입은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성전이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특정한 장소를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성전으로 구별해 놓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는 성막이나 성전에 하나님의 법궤를 두시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후에 구약의 성전은 이방인들에 의해 훼파되었습니다. 법궤를 모셔놓았던 성전은 그림자요,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본체이십니다.

요 2:21에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하여 예수님의 몸을 성전이라 하셨지요. 말씀 자체요,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으니 그림자인 성전은 훼파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의 성전을 다시 이루기 위해 통곡의 벽에서 기도하고 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후에도 여전히 눈에 보이는 성전은 필요합니다. 사람들이 성전 곧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요. 그러나 천국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느끼기 위해 어떤 장소를 정해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의 실체를 직접 뵐 수 있고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뵐 수 있습니다. 또한 천국에서는 어디를 가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지요. 아버지 하나님과 주님의 마음은 천국이라는 공간 전체를 다 품고 계시구요. 그러니 별도의 성전이 필요 없고 하나님께서 또 어린양께서 친히 성전이 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더 이상 속죄하는 제사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성전에 나가서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 들어온 사람들은 이미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 온전한 선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더 이상 율법의 형식에 매일 필요가 없고 속죄하는 절차도 필요 없지요.

곧 새 예루살렘 안에 성전이 필요 없다는 말은 이 성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제 죄 사함을 받아야 하는 마음이 아니라 진리로만 가득 찬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새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천국 처소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온전히 성결되지는 못했다 해도 천국에 올 때는 진리의 마음만 가지고 왔으니 이들도 더 이상 죄 사함을 받을 필요가 없구요.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 예전의 대성전에 대한 설교를 떠올리므로 혹 이상하다고 생각하신 분이 있으신지요? 이 땅에서 대성전을 지어 하나님께 크게 영광을 돌리고 나면 그 성전은 장차 천국에도 이뤄진다 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다”고 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대성전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오해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새 예루살렘에 대성전이 있는 이유는 예배하기 위해서 성전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지요. 물론 천국의 대성전 안에서도 여러분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고 일종의 기념비적 건물로써 지어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이 대성전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린 역사를 기리기 위해 그대로 재현해 놓은 건물이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당시의 갈릴리 호수나 골고다 언덕이 천국에 재현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참고로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교회는 단순히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거룩하게 구별된 장소이지요. 그러므로 믿음 있는 분들이라면 교회에 나올 때는 가장 정갈한 모습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는 마음으로 성전에 나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성전 안에서는 오직 말씀과 기도, 찬양과 간증 등,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만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세상적인 농담이나 잡담, 비속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적인 사업이나 거래를 해서도 안 되구요. 또 부모님들은 어린아이들이 혹여라도 성전 안에서 악한 말이나 행동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서 돌봐야 할 것입니다.

예배실 안에서는 더욱 언행을 삼가야 하지만 마당이나 식당 같은 부속 장소들도 하나님의 성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전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그 안에서 합당치 않은 일을 행하면 이는 곧 하나님 앞에 무례히 행하는 것이고, 원수 마귀 사단의 송사거리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계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해와 달을 두신 것은 인간 경작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는 낮과 밤이 있고, 빛과 어둠이 교대로 나타나지요. 이런 상대적인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선악을 알게 하시고 영과 육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에 선과 악, 육과 영의 모든 것을 밝히 아십니다. 악은 조금도 없는 선 자체이시지만 악의 속성에 대해서도 너무나 밝히 아시고, 온전한 영이시면서도 썩어지고 변질되는 육의 속성을 다 아시지요.

그러나 피조물인 사람은 악과 육에 대한 것을 직접 체험해 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몸이 아파봐야 건강의 소중함을 압니다. 가난의 고통을 겪어봐야 부유한 것을 마음에서부터 감사할 줄 알지요.

마찬가지로 육을 겪어봐야 영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습니다. 악을 겪어봐야 선이 얼마나 좋은지 알 수 있지요. 아담이 악을 전혀 체험하지 못했던 에덴동산에서의 삶은 불완전한 삶이었지요. 고통이나 불행을 모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상대성을 체험할 수 있도록 선악과를 허락하셨습니다. 생령이었던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으므로 육으로 변질되고 경작을 받게 된 것이지요. 이 땅에서 죄로 말미암은 고통과 썩어질 육의 것들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얼마나 좋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절절히 느낄 수 있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육을 체험하는 것으로 끝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육이 얼마나 헛된지를 깨달았으면 그다음에는 죄악 가운데서 벗어나 영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지요. 그러지 못하면 계속 육에 머물다가 결국은 영원한 사망 곧 지옥 불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는 어둠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지요. 하나님은 이런 사실을 아시기에 이미 구원의 길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곧 독생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셨다가 때가 차매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영접하여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은 장차 빛의 공간인 천국에 영원히 살게 되지요. 천국에는 어둠이라는 자체가 없으므로 해, 달, 별 같은 것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온 천국을 가득 채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 21:23 후반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는 등이 되신다 했지요.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하게 되었을 때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때도 요 1:3에 보면 “만물이 그로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했지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지 만물을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도 주님과 함께 창조하셨고, 인간 경작과 구원의 섭리도 주님과 함께 이루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도 바로 예수님이셨지요.

이렇게 주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지음 받았고, 주님으로 인해서 구원의 길을 얻어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던 죄의 담을 헐어주시므로 믿음대로 응답받을 수 있게 하신 것도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시지요.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릴 때도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우리에게 구원도, 응답도, 축복도 없으며 하나님께 어떤 영광도 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비취는 등이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 21: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만국이라는 것은 천국의 개념이 아니라 이 땅의 개념이지요. 천국에서는 나라나 민족, 인종이 상관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았다면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든, 흑인이나 백인이나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이지요. 이처럼 세계 만국에서 구원받은 모든 영혼들이 천국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영광의 빛 가운데 다니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땅의 왕들’이란 이 땅에서 경작받는 동안 영적으로 성도들의 머리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성도들의 머리라면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이렇게 중한 직분을 가진 분들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육적인 직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자격을 갖춰야 하지요.

마 18:18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이 땅에서 교회의 중한 직분을 맡았으면 장차 천국에서도 큰 자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땅에서도 중한 직분을 받고, 직분에 합당하게 충성하다 천국에 가면 천국에서도 더 큰 자가 될 수 있지요. 그러나 이 땅에서 높은 직분을 받았다 해서 하나님 앞에도 다 인정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땅에서 맨다 해도 진리에 합당하게 매야 천국에서도 매이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장로로 안수 받을 때 참으로 그가 장로에 합당한 사람이라면 주님께서도 그 시간에 함께 안수하십니다. 영안이 열려서 보면 그가 안수를 통해 장로로 인침 받는 순간 주님의 손이 함께 안수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러나 합당하지 않은 사람의 경우에는 주님께서 함께 안수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아무리 중한 직분을 받았다 해도 그 마음이 성결과 거리가 멀고 직분에 합당한 자격을 갖추지 않는다면 천국에서는 머리된 영광을 누릴 수 없지요. 오히려 직분이 높은데도 불구하고 영적인 서열이 낮으므로 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 3:1에는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하셨지요. 그러나 열두 기초석처럼 아름다운 마음을 일군 사람은 스스로 머리 되고자 하지 않아도 뭇 사람들에게 머리로서 인정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존귀한 자들이라 땅의 왕들이라 인정받게 되지요. 이러한 존귀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빈손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정성껏 예물을 마련하여 나갑니다. 옛날 대제국에서 황제가 생신을 맞이하면 여러 나라의 제후들이 진귀한 예물을 준비하여 황제에게 나가지요. 자기 나라에서 가장 좋은 소산물이나 구하기 힘든 보배들을 힘껏 마련하여 왕의 기쁨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땅의 왕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드리는 예물은 바로 ‘영광’입니다. 본문에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했지요. 그들이 이 땅에서 경작받는 동안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일들이 있지요.

이렇게 영광 돌린 행적들이 다 각자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은 기도 쉬는 죄를 범치 않으려고 굶주린 사자 굴에 던져지는 편을 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므로 상처 하나 없이 사자 굴에서 살아나왔지요.

반면 다니엘을 모함하여 죽이려 했던 사람들을 사자 굴에 던지자 굶주린 사자들이 그 뼈까지 부서뜨렸습니다. 이를 본 왕은 온 백성에게 조서를 내려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에 이르렀지요. 이렇게 크게 영광 돌린 사건이 바로 다니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이 됩니다.

물론 이 외에도 다니엘의 삶 속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린 일들이 더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영광 돌린 일들을 가지고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시면서 천국 백성들 앞에도 칭찬하며 그를 드러내십니다. 그러면 천국 백성들도 다 함께 기뻐하고 그처럼 영광 돌린 사람을 칭송하지요.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국에서는 영원한 삶을 살지만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이 땅에서 경작 받은 날들을 잊어버리지는 않습니다. 천국을 이루는 모든 요소요소들이 결국 각자가 경작 받은 세월들 속에서 나온 결정체요 기념물과 같기 때문입니다.

진주 문을 통과할 때는 ‘내가 어떤 인내의 세월을 거쳐 이 귀한 천국에 들어왔는지’ 정금길을 걸을 때는 ‘내가 어떤 믿음의 길을 걸어왔는지’를 떠올리게 되지요. 여러분의 집 안에 있는 하나하나의 초목과 꽃들, 집을 이루는 재료들과 장식, 가구들, 모든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집 안에는 벽화와 같은 그림, 조각들을 통해 집 주인의 행적을 기록해 놓기도 하지요.

이처럼 천국 곳곳에 지나간 신앙의 여정이 다 깃들여 있으니 어찌 경작의 세월들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세월이 갈수록 경작의 날들을 잘 승리하여 천국에 들어온 감동과 감사가 더욱 진해지게 되지요. 그리고 때를 좇아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각자가 하나님 앞에 영광 돌렸던 일들로 인해 칭찬과 존귀를 얻으므로 행복이 더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장차 어떤 영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시겠는지요? “나는 이처럼 내 믿음을 지켰고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며 살았나이다.” 하고 하나님께 드릴 예물이 잘 준비되고 있으십니까?

여러분 모두가 대형 손수건 집회의 강사가 되어야만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대성전을 이루는 건축 위원장이 되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지요. 하나님께서는 큰 것은 큰 것대로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각자가 영광 돌리는 것을 기쁨으로 받아주십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날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속히 성결을 이루고, 맡겨진 모든 사명에 온전히 충성하여 여러분의 매순간이 귀한 예물과 같이 하나님께 열납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착하고 충성된 아들, 딸”이라 칭찬받고 장차 하나님의 보좌 가까이 거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06-08 오후 3:36:44 Posted
2023-06-12 오후 3:06:29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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