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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79) 새 예루살렘 [계 21:25-22:2]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3.06.16
새 예루살렘 성에는 열두 개의 큰 진주문이 있고 문마다 엄위한 천사장이 지킨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한 이후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에덴동산의 동편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이는 악한 영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였지요. 그런데 새 예루살렘은 천사장이 지키지 않는다 해서 누군가 침략하거나 질서를 깨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 성과 성안에 사는 이들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지키는 것이지요.

계 21:25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는 밤이 없음이라”

“밤이 없다”는 것은 “어둠이 없다”는 뜻입니다. 천국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가득하여 항상 환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또 영적인 의미의 어둠도 없지요. 곧 어둠을 주관했던 원수 마귀사단이 무저갱에 갇혀서 나올 수가 없고 죄악도 사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의 침입으로 인해 새 예루살렘의 성문을 급히 막아야 한다거나 공격에 대비해서 걸어 잠가야 하는 일은 없지요.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사실 평소에는 “문마다 한 진주”라는 말씀대로 하나의 큰 진주로 만들어진 문이 닫혀 있는 상태이지요. 누군가가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 그 앞에 서면 자동으로 양쪽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천국에 밤이 전혀 없다면 사실은 “낮”이라는 단어 자체도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이 세상에 여자가 없고 모두가 남자라면 굳이 여자와 반대되는 남자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지요. 그냥 사람이라고만 하면 됩니다.

그런 것처럼 밤이 전혀 없다면 밤과 반대되는 개념도 필요가 없으니 굳이 낮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육의 세상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므로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천국에 대해서도 낮이라고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계 21:26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

지난 시간에 살펴본 24절에서는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땅의 왕들”은 영적인 서열이 높은 사람들입니다. 새 예루살렘에서 주님과 함께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을 누릴 사람들이지요.

반면에 오늘 본문 26절에 나오는 “사람들”이란 새 예루살렘에 살게 될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아담 이후로 경작의 역사 속에서 만국 곧 지구상의 모든 나라 백성 가운데 구원받은 사람들을 총칭합니다.

새 예루살렘이 아닌 3천층이나 2천층, 1천층에 거하는 사람들도 때를 좇아 새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가 있지요. 이럴 때는 그들도 나름대로 자신이 이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렸던 것을 가지고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가족들이 모여 앉아 있을 때 자녀들이 잘한 일이 있으면 부모님 앞에서 서로 자랑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저 1등 했어요, 시험에서 100점 맞았어요,” 혹은 “선생님께 착하다고 칭찬받았어요,” “미술 대회에 나가서 상 받았어요”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랑들을 할 때 자랑하는 자녀도 기쁘지만 그 자랑을 듣는 부모님도 흐뭇하지요.

이처럼 이 땅에서 경작을 받을 때 하나님께 영광 돌린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므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를 행하며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더 많이 돌린 사람이라면 그만큼 천국에서도 더 존귀한 자리에 들어왔을 것이구요. 사람마다 이런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계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여기서 “속된 것”은 무엇입니까? 속되다는 말은 “거룩하게 구별된 것”과 반대되는 것을 말하지요. 속된 사람들은 고귀하고 가치 있는 목표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기보다는 쾌락적인 것, 정욕적인 것, 당장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취합니다.

또한 쉽게 남을 판단하고 헤아리며 원망, 불평의 말을 쏟아내는 것을 봅니다. 자기 생각에 맞지 않거나 자기 유익에 맞지 않는다 싶으면 즉각적으로 판단하고 정죄하지요. 상대 입장에서 이해해보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하므로 상대를 판단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가증하다”는 것은 사전에 보면 “괘씸하고 미운 것, 매우 불쾌한 것”이라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가증하다”는 표현이 여러 가지 경우에 나옵니다. 예를 들어, 새나 짐승, 고기들 중에도 “가증하다” 하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가증한 것들을 “먹지 말라” 하셨지요.

이런 것들은 그 근본된 성질 가운데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한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금하신 것입니다. 또 우상이나 우상 숭배에 관련된 물건, 우상 숭배자들의 풍습이나 악행들도 “가증하다” 하십니다. 그 밖에 음란하고 더러운 죄들에 대해서도 “가증하다” 표현하시지요.

이런 것뿐 아니라 이중적인 마음 곧 간사하고 변개하는 마음도 하나님 앞에 가증한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있으면 선이 어떤 것인지 배워서 알아도 그 선을 좇아 행하지는 못합니다. 자신에게 손해가 올 것 같으면 선한 것을 지키지 못하고 변개해 버리지요.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악한 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악하고 속된 것을 “옳다” 말하거나 옳은 것을 “잘못 되었다”고 하며 중상모략을 하는 경우도 있구요. 이처럼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가증한 마음을 가지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거짓말하는 자”가 나옵니다. 오늘날 세상에 어둠이 너무나 만연하므로 사람들이 크고 작은 거짓말을 쉽게 하면서 스스로는 깨닫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지요. 자기 잘못이나 부끄러운 일을 숨기기 위해 사실과 다르게 말하기도 합니다. 또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상대에게 해를 입히는 거짓말도 쉽게 하지요.

골 3:9-10에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했습니다.

물론 초신자들 중에는 아직 버리지 못한 옛사람의 습관 속에서 종종 거짓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깨닫고 회개하여 돌이키면 용서받을 수가 있지요. 그러나 믿음이 성장하는 만큼 자신을 새롭게 하여 거짓말을 다 벗어 버려야 하고, 거짓된 속성 자체를 벗어 버려야 합니다.

신앙의 경륜이 있고 “믿음 있다” 하면서도 여전히 거짓말을 하고 있다면 이는 미지근한 신앙에 머무르는 것이고 점점 더 진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 정도가 심해지면 구원조차 받을 수가 없게 되지요. 성경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도 거짓말하는 자라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하는 자도 거짓말하는 자라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도 거짓말하는 자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속되거나 가증한 것, 거짓된 것들을 속히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런 죄성들의 근본 뿌리까지 다 뽑아버려서 날마다 더 좋은 천국을 침노해 들어가야 하지요.

계 22:1-2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생명수 강은 새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듯 흐르지 않는 듯 잔잔하게 흘러가지요. 새 예루살렘에서 3천층으로, 2천층, 1천층, 낙원까지 천국의 모든 처소를 돌아서 다시 새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요 4:14를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물이 있어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요.

그런 것처럼 예수님께서 주신 물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데 이 물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천국에 들어온 모든 영혼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을 얻었지요.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천국의 강을 “생명수 강”이라 이름 붙이신 것입니다. 이 생명수 강이 천국을 두루 돌아 흐르는 것은 천국에 있는 모든 영혼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게 살 수 있음을 나타내지요.

이 생명수 강은 수정같이 맑다 했습니다. 수정에 빛을 비추면 찬란하게 반사되는 것처럼 생명수 강물의 수면은 눈부시게 반짝거립니다. 이 땅의 바다나 호수 물결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광경을 보아도 심히 아름답지요. 하물며 천국의 생명수 강은 얼마나 더 아름답겠습니까? 생명수 강의 물을 마시면 너무나 감미롭고 온몸에 충만함이 더욱 넘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지요. 원래 하나님께서 지구를 만드실 때 주신 물도 처음에는 이 생명수 강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이 땅의 모든 것들이 저주받을 때 물도 함께 저주를 받아 변질되었지요. 그래서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생명수의 물맛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주셨던 물의 맛은 여러분이 장차 천국에서 직접 마셔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의 생명수도 처소에 따라 맛이 다릅니다. 생명수의 성분 자체는 동일하지만 각각의 처소에서 느끼는 만족감과 행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어 똑같은 한 잔의 물을 마셔도 산을 오르기 전에 마시는 물맛과 산을 다 올라 정상에서 마시는 물맛이 다르지요.

이처럼 같은 생명수 강물인데도 천국의 각 처소마다 이를 마실 때 느끼는 만족감이 다른 것입니다. 이 생명수 강의 양쪽에는 정금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 생명나무가 심겨 있어서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습니다. 강물과 길이 바로 인접한 것은 아니고 그 사이에 금모래 은모래가 빛나는 모래사장이 펼쳐지지요.

그러면 이 생명수 강의 양편으로 길을 내어 두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로 천국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보좌 있는 곳을 쉽게 찾아올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생명수는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시작된다 했지요. 그러니 광활한 천국 어디서나 생명수 강가의 길을 따라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하나님의 보좌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 땅에서 영생수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았기에 천국에 이르게 된 것을 나타냅니다. 온전히 말씀을 따라 살면 결국 천국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 하나님의 보좌 앞에까지 이르게 되지요.

요 14:6에 “내가(예수님께서)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동시에 천국의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 끝이 아니라 이 땅의 삶이 다할 때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천국으로 가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통 표지판을 그대로 따라가면 정확하게 목적지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천국의 새 예루살렘까지 곧장 갈 수 있도록 안내하는 명백한 표지들이 성경 말씀 안에 들어있습니다. “무엇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 버리라, 지키라”는 말씀들이 바로 최단시간에 새 예루살렘까지 이르게 하는 표지판들이지요. 그 표지판대로만 길을 따라가면 너무나 쉽게 새 예루살렘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의미를 나타내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생명수 강가 양편에 정금길을 두셨 습니다. 그 길을 따라 생명수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에 이르도록 설계하신 것입니다.

생명수 강과 길 사이에는 모래사장이 있다 했지요. 여기에 깔린 금모래, 은모래의 알갱이는 그 감촉이 너무나 부드럽고, 그 위에서 뒹굴고 뛰논다 해도 먼지가 날리거나 옷이 더럽혀지는 일은 없습니다.

모래가 눈에 들어가 아프거나 해를 입는 일도 없지요.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힌다” 했지요. 가로수와 같이 늘어선 생명나무들은 심히 우람하고 큽니다.

생명나무의 종류는 열두 가지입니다. 한 나무에 열두 가지의 실과가 한꺼번에 맺히는 것이 아니라 한 나무에 한 종류씩 실과를 맺지요. 이런 나무가 열두 종류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달마다 실과가 맺힌다는 것은 매달 다른 열매가 맺힌다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가 항상 맺혀있다는 의미입니다.

천국의 나무들은 꽃이나 잎이 피었다 시들고 열매가 맺혔다가 떨어지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항상 잎이 푸르며, 항상 꽃을 피울 수도 있고 항상 열매를 맺을 수도 있지요. 생명나무에도 과실이 항상 맺혀 있고 누군가가 생명나무 과실을 따면 그 자리에 다시 과실이 맺힙니다.

열두 가지 생명나무의 과실은 각각마다 빛과 크기, 모양과 맛이 다릅니다. 창세기 강해 설교에서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 과일과 선악과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지요. 둘 다 일반적인 메론 정도의 크기인데 선악과는 복숭아와 비슷한 분홍빛 과실입니다.

반면 생명 과일은 사과와 비슷한 모양에 아주 빨간색이 아니라 약간의 홍조를 띤 아름다운 과일입니다. 그런데 천국에 있는 생명나무는 붉은 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열두 가지 색깔이고 모양과 크기도 다 각각이지요.

같은 붉은 빛이라 해도 에덴동산의 것과 천국의 것은 서로 차이가 나구요. 천국의 처소에 따라 생명수의 맛이 다른 것처럼, 생명 과실의 빛깔이나 아름다움도 공간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나무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또 하나님께서는 왜 생명나무의 실과를 열두 가지로 만들어 두셨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이어서 설명하겠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생명수 강가에는 세상 어느 곳보다 아름다운 경관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보석으로 장식된 황금 벤치도 무수히 있지요. 여러분이 원한다면 생명수 강 물 속에서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수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강 속에서 헤엄치던 오색찬란한 물고기들이 반기듯이 여러분을 따라오기도 하지요. 찬란한 빛으로 반짝이는 생명수 강의 물결을 사랑하는 주님과 나란히 앉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할까요?

혹은 정금길을 거닐면서 천사들과 함께 찬양을 올리기도 하고, 이 땅에서 못 다한 얘기를 나눌 수도 있지요. 여러분은 그 강가를 누구와 함께 거닐고 싶으십니까? 이 시간 한 천사장이 새 예루살렘에 들어와 거하는 성도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의 일부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맑은 생명수 강에 흐르는 이 물에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이 드리워 있고 아버지의 눈물과 위로가 담겨 있으며 이 아름다운 생명수 강물로 인하여 아버지의 보호하심과 따사로운 손길이 이곳을 두루 돌며 아버지의 영광이 만백성에게 넘치나이다.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이 많은 영혼들 각각에게 아버지의 영광을 드리우며 그 얼굴마다 아버지의 은혜의 빛이 가득하나이다. 모두가 기뻐하며 감사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찬송하며 그 영광을 찬양하나이다.

하나하나의 영혼들이 아버지의 은혜를 입어 그 능력 속에 사랑을 입어 이처럼 정금 같은 자들로 나와서 아버지 앞에 아름다운 찬양을 드리는 자들로 이루게 하심에 감사하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그 이름이 영화로우시며 세세토록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나이다. 주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고 성령의 사역을 온전케 하셨으며 이 영혼들을 이곳에 들이기까지 그 인내와 참으심이 오늘날 이렇게 많은 열매를 내게 하셨나이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하나이다. 아버지 하나님 찬양하나이다. 이와 같이 입을 열어 찬양하나이다. 많은 영혼들의 입가에 웃음이, 많은 영혼들의 얼굴에 평안함이, 많은 영혼들에 아버지의 영광이 드리워 있음에 감사하나이다.

하나님의 이름과, 주의 이름과 성령의 이름이 그 위에 있사오니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나이다. 모든 것에 온전하고 완전하셔서 이처럼 아름다운 열매를 내신 아버지를 찬양하나이다. 찬양하나이다. 찬양하나이다.”

장차 천국에서는 천사들뿐 아니라 여러분도 늘 찬양을 드리며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천국에서 부르는 찬양은 이 땅의 찬양과 전혀 다릅니다. 거칠고 격한 음색이나 가락이 아니라 너무나 부드럽고 맑으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듯한 감동이 깃들어 있지요.

이 땅에서도 찬양을 만드는 사람들이 그 마음에 얼마나 천국이 임했는지에 따라 영감 가운데 천국의 찬양에 더 가깝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마음으로 지은 찬양일 때 하나님께서 더 기뻐 받으시지요.

찬양을 부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인 기교를 자랑하고 자기의 재능을 드러내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성결을 이뤄나가는 그런 마음의 향이 담겨야 합니다. 그런 향이 없으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지요. 아무리 목청껏 아름다운 소리를 내어도 허공을 치는 기도와 마찬가지로 가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이 땅의 사는 날 동안에도 귀한 천국을 주신 하나님께 중심의 찬양을 끊임없이 올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장차는 여러분 모두가 새 예루살렘의 생명수 강가를 거닐면서 천군 천사와 함께 소리를 모아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06-15 오후 1:36:31 Posted
2023-06-23 오후 3:19:18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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