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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82) 마지막 때 [계 22:11-12]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3.07.07
요한계시록 강해도 이제 거의 마무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증거한 말씀을 통해 여러분이 가장 뚜렷이 기억해야 할 내용은 ‘마지막 때’라고 할 수 있지요.

인류가 영원히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아니고 이 땅의 문명이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시작된 인류의 역사에는 반드시 끝이 있으며 그 끝이 곧 다가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때를 알리는 경고가 온 세상에 널리 선포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고 주님 맞을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전도자들이 마지막 때를 경고한다 해도 모든 사람이 듣고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단 12:10에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했습니다.

선한 것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선포되는 말씀을 들으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죄에서 떠나 정결한 마음을 이뤄갑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지혜 있는 사람이지요. 반면에 악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여전히 악을 행하며 점점 더 악해지지요. 검은 것은 더 검게, 흰 것은 더 희게, 육은 더 육으로, 영은 더 영으로 그렇게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입니다.

계 22:11 전반절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믿는 사람들이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전해도 그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불의와 더러움 속에 거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귀한 독생자의 생명까지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을 받고 받지 않고는 각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지요.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강제로 의롭게 만드실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복음을 들어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도 그를 살리실 길이 없지요. 불의한 사람은 그대로 불의하게, 더러운 사람은 더럽게 남겨둘 수밖에 없습니다. 불의하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고전 6:9-10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이런 불의한 일들이 계속 쌓이면 더러운 일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더러운 것’은 사람의 도리에서 벗어나며 난잡하며 방탕한 것들을 말하지요. 예를 들어 음행의 경우에도 일반적인 음행을 넘어서 인륜을 저버린 일들, 입에 담기도 민망한 일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조차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지저분하고 충격적인 일들을 범하는 것이지요. 이런 것은 음행 중에서도 더러운 것에 속합니다.

다른 예를 들어 시기의 경우에도 그 정도가 지나치면 더러운 행함이 나옵니다. 상대를 시기하는 마음이나 그로 인해 상대에게 악을 행하는 자체도 이미 불의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투기가 지나쳐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없애려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종종 사극 같은 데서 보면 궁중의 여인들끼리 시기하여 주술적인 행동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상대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화살을 쏘거나, 상대의 인형을 만들어서 바늘로 찌르는 등 악한 영의 힘을 빌려서라도 상대를 해치려 하지요. 이런 저주하는 행동들도 더러운 것에 속합니다. 불의한 마음과 행함이 도를 지나쳐서 보통 사람들의 양심으로는 용납하기 어려운 더러운 일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마지막 때가 될수록 세상의 불법과 불의는 더 심해지고 죄악의 전파 속도도 빨라집니다. 수십 년 전, 아니 십여 년 전만 해도 너무나 수치스럽게 여겼던 일들을 이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당당하게 행하지요. 한 번, 두 번 불의하고 더러운 일들을 접하게 되면 그렇게 보고 듣는 것이 마치 씨를 뿌린 듯이 마음에 심어집니다.

양심이 무뎌져서 악한 것을 보아도 경계하지 못하고 어느새 자신도 물들어서 따라하게 되지요. 착하게 자란 평범한 아이들도 나쁜 친구들을 만나 함께하게 되면 이 아이가 악하게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나쁜 친구들이 때리고 욕하고 훔치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놀라고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익숙해지고 아직은 양심에 찔리더라도 친구들을 따라 자기도 악을 행할 수 있게 되지요. 그렇게 한 번, 두 번 따라하다 보면 점차 양심의 가책도 사라집니다. 이제는 자기도 자연스럽게 욕하고 때리고 담대하게 훔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악으로 관영한 세상에 거하면서 불의와 불법을 계속 보고 들으니 점점 더 깊은 죄 가운데로 빠져 들어갑니다. 세상 어디서도 깨끗한 곳을 찾아볼 수가 없지요. 그런데 이런 세상에서도 선한 양심 속에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계 18:4에 보면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했습니다. 죄악 된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만나 주십니다. 빛 가운데 거하게 하시고 어찌하든 자기를 지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지요.

이렇게 하나님을 믿고 죄를 버려가는 사람들에 대해 설명하신 것이 본문 11절 후반절의 말씀입니다.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했지요.

‘의로운 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대로 순종하여 행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자’는 말씀대로 행할 뿐 아니라 온전하게 변화된 사람입니다. 말씀을 온전히 이루어 세상과 구별되며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지요.

이처럼 의로운 자와 거룩한 자는 그 깊이가 다릅니다. 성결을 이룬 사람들 중에서도 영의 사람과 온 영의 사람이 서로 다른 것과 같지요. 말씀대로 순종하는 의로운 차원을 넘어 진리에 속한 모든 분야를 두루 갖췄을 때 ‘거룩하다’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행하면서 깨우치는 만큼 성령의 감동하심 속에 주님의 마음과 성품을 닮아갑니다. 주님의 마음과 성품을 닮으면 말이나 행동도 품위 있고 아름답게 나오지요. 선에 속한 지식과 주의 교양을 갖추어 말과 행실에서 책잡을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상황에 처해도 하늘의 지혜를 받아서 경우에 맞게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구요.

벧전 1:15-16에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의로우며 더 나아가 거룩함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거룩하게 산다는 것이 자기 의지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죄악과 접하기 싫다 해서 세상과 분리되어 살 수는 없지요. 자신이 원치 않아도 쉽게 악한 것을 보고 들으므로 죄와 악에 무감각해져 가는 것입니다.

더구나 안타깝게도 오늘날은 죄를 지적하는 교회가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교회에서 죄를 지적한다 해서 성도들이 다 죄에서 떠나는 것도 아니지요. 말씀을 들을 때 양심에 찔리기는 하지만 결단하여 돌이키지는 못합니다. 지옥이 무서워서 하나님을 떠나지는 못하지만 죄를 버리지도 못하고 교회와 세상의 중간에 머물러 있는 것이지요.

설교 중에 죄를 지적받고 마음이 불편해지면 어떤 사람들은 아예 죄를 지적하지 않는 교회로 옮겨갑니다. 이런 세상이니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고 죄를 지적하지 못하는 교회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교회에서 죄를 지적해도 자기를 지키지 않고 세상에 물드는 사람들은 여전히 불의하고 더러운 채로 남아 있지요. 이런 현실 속에서도 의롭고 거룩하게 자신을 지키려면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또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딤전 4: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한 대로 말씀과 기도 속에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하지요. 그러면 선과 악의 갈림길에 섰을 때 말씀으로 분별할 수 있고 기도의 힘으로 선을 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선택의 순간에 불의와 타협하게 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 안의 성령이 탄식하는 것을 느낍니다.

마음이 답답하고 곤고해지므로 ‘무엇이 문제인가?’ 돌아보고 회개할 수 있지요. 교회에 다닌다 하면서 불의를 행하는데 곤고함도 없고 두려움도 없다면 이는 분명히 잘못된 신앙입니다. 의롭고 거룩하게 자신을 지켜야 하는데 불의하고 더러운 모습으로 심히 물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불의에서 떠나고자 노력하던 성도들도 한 번, 두 번 마음을 내어주기 시작하면 원수 마귀 사단이 그 틈을 놓치지 않습니다. 각종 예배에 다 나가던 사람이 이제는 간신히 주일과 금요철야만 나가고, 때로는 주일 대예배만 근근이 드립니다.

기도 시간도 한 번, 두 번 빠지기 시작해서 마침내는 아예 쉬어 버리게 됩니다. 충만함이 없으니 구역이나 기관 모임도 빠지게 되고, 남의 눈을 의식해서 억지로 나간다 해도 이 사람 저 사람과 걸리고 감정이 상하지요.

그러다보니 영에 속한 일들은 조금씩 줄이고 반대로 세상을 하나하나 취하기 시작합니다. 충만할 때는 버린 것 같았던 것들도 이제는 다시 취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으로 빠져들다가 중한 질병이나 큰 시험 환난이라도 오면 이때라도 돌이키면 다행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런 상황에 처하면 회개하여 돌이킬 힘도 없고 하나님 앞에 담대함도 없으니 세상 방법을 구하지요. 그러다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기도 하구요. 이 시간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생명의 길에서 멀어지는 분이 한 분도 없으시기 부탁드립니다. 날마다 의롭고 거룩하게 변화되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온 영과 혼과 몸을 흠 없게 보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 말씀에서 여러분이 한 가지 더 기억하실 것이 있습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게” 하라는 것은 어차피 그들은 사망으로 갈 것이니 그냥 내버려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에서는 끊임없이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진리를 먼저 알고 생명을 얻은 여러분도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하지요. 아무리 전해도 듣지 않는 사람이라도 여러분 편에서 먼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영원히 죽느냐 영원히 사느냐 영생이 걸린 문제입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기회를 보아서 다시 전도해야 하지요.

이 시간 여러분이 방주를 만들던 노아의 마음을 한번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마 24:38-39에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지상의 모든 혈육 있는 생물들이 종류대로 들어가는 방주였으니 얼마나 규모가 컸겠습니까? 이 거대한 방주를 만드는 긴 세월 동안 노아는 틈이 나는 대로 곧 임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평안한 세월이 지속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심판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 말을 믿는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노아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지요. 방주가 점점 완성되어 감에 따라 노아의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게 타들어갔을지 여러분은 상상이 가십니까?

다만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말을 듣고 방주 안에 들어와 구원을 받게 하려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얼마나 간곡하게 권면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노아가 외치고 외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때가 이르고 홍수가 시작되니 노아는 더 이상 외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방주의 문을 닫아야만 했지요. 여러분은, 이 시대의 노아처럼 외쳐야 합니다. 먼저 믿고 구원의 방주에 들어왔으니 온 세상 사람을 이 구원의 방주에 들이고자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노아의 시대에는 듣고 회개한 사람이 없었지만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는 아직 구원받을 영혼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사랑으로 기도와 관심을 쌓아갈 때 변화될 영혼들이 많이 있지요.

여러분은 이번 주간에 몇 번이나 입을 열어 복음을 전했습니까? 실족한 영혼들과 전도할 영혼들을 위해서는 하루에 얼마나 기도하시는지요? 세계 선교를 위해, 민족복음화를 위해 기도할 때는 얼마나 간절하게 중심의 기도를 올리십니까?

구원의 문이 닫히기 전에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시고자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애를 태우시는지 여러분이 느낄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배가 떠나기 전에 울리는 마지막 뱃고동처럼 여러분의 외치는 소리가 여러분이 있는 곳곳마다 퍼져나가야 할 것입니다.

계 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천국에는 각 사람이 일한 대로 받는 상이 있고, 사람마다 받는 상이 다르지요. 어떤 사람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전혀 맞지 않는 말을 합니다. “천국에서 무슨 서열이 있느냐?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이고 똑같은 대우를 받는 것이 공평한 것이라”고 주장하지요. 상 받기를 사모하는 것이 욕심이요 바르지 않은 마음인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천국에도 분명히 큰 자, 작은 자가 있습니다. 상에도 큰 상, 작은 상이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천국에서 더 큰 자가 되기를 원하시며 더 큰 상 받기를 사모하기를 원하십니다.

쉬운 비유를 들어 보지요.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약속을 합니다. “얘들아 너희가 이번 시험에 80점 이상 받으면 게임기를 사 주마, 90점 이상 받으면 신형 컴퓨터를 사 주고, 100점을 받으면 방학 때 유럽으로 가족 여행을 가자” 이렇게 차등을 두어 약속을 했지요.

이런 약속을 하는 부모의 소망은 할 수만 있다면 모든 자녀가 다 100점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다 잘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상을 약속하는 것이고, 약속한 상을 모두가 받을 수 있기 원하지요.

부모님의 마음을 아는 자녀라면 이런 약속 주신 부모님께 감사해서 더 좋은 성적을 거두려고 열심히 노력합니다. 어떤 대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랑에 보답해 드리는 것이고 반면에 이런 자녀가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가 부모님께 뭘 얻으려고 공부하는 것이 아닌데요.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만큼만 공부할래요. 그런 상 안 받아도 괜찮아요. 하면서 별로 부모님의 약속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뭘 얻으려는 욕심도 없고, 부모에게 요구하지도 않으니 철이 든 자녀인 것처럼 말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모의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고 부모의 사랑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지요. 부모의 입장에서 이런 자녀를 보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풍성한 상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상 받을 길을 모두에게 알려 주시며 우리가 다 큰 상 받기를 기대하고 계시지요. 그 약속을 고대하며 기쁨으로 천국길 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천국에서는 모든 사람의 영광과 서열이 같고 상급도 다 동일하다”고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서운케 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까지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게 하여 좋은 상을 받지 못하도록 만들게 되지요. 그러니 혹여 구원을 받는다 해도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히 11:6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니니라” 했습니다. 각 사람의 행한 대로, 일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모든 상들을 풍성히 받아 누림으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전 9:25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을 소망하여 성결을 이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 천국을 믿고 소망한다면 또 아버지의 사랑을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성결되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니지요.

사도 바울이 천국을 한 번 본 후로는 세상 어떤 고난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새 예루살렘도 아니고 낙원을 보았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천국의 소망이 충만했지요.

모세는 궁전에서 공주의 아들로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더불어 고난 받기를 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상이 얼마나 큰지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 상은 썩어질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며, 세상 어떤 영광보다도 영광스러운 상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여러분은 잘 아십니다. 이 땅에서의 인생만 비교한다면 부자와 거지 중 당연히 부자의 삶이 복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과를 보면 정반대입니다. 부자로 살다가 지옥에 가는 것보다는 거지로 살다가 천국에 가는 것이 백 번 낫지요.

더구나 여러분이 듣는 성결의 복음은 거지처럼 비천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도 그 삶을 변화시켜 주는 능력의 말씀입니다. 천국의 영광을 누리게 할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마음껏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말씀이지요.

천국의 영광에도 해처럼 빛난 영광, 달의 영광이 있고, 별과 별들의 영광이 다르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사람은 약속하신 상을 온전히 다 받을 것이요 적게 행한 사람은 조금만 받을 것입니다.

한 번뿐인 여러분의 삶을 기왕이면 해처럼 빛난 영광에 전부 투자하는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삶을 마치는 마지막 순간에 ‘내가 정말 잘했구나! 내가 정말 복된 길을 택했구나!’ 하며 영원히 감사의 찬송을 드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07-06 오후 4:45:18 Posted
2023-07-08 오전 2:26:46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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