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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해

제목
요한계시록 강해 (84) 두루마기를 빠는 자 [계 22:14-15]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3.07.21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영적으로 신랑 되신 주님의 신부입니다. 장차 신랑 되신 주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시면 우리는 흠도 점도 없으신 어린양을 신랑으로 맞아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요. 이 혼인 잔치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예복을 갖춰야 합니다. 영광스럽고 거룩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그에 맞는 거룩한 단장을 해야 하구요.

계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여기서 두루마기란 바로 주님의 신부들이 입어야 할 예복이지요. 예복을 입으면 자세가 반듯해지고 행실도 평소보다 품위 있게 변합니다. 마음가짐도 달라지구요. 영적으로 이 예복 곧 두루마기는 우리의 행실을 말합니다.

주님을 믿기 전에는 두루마기가 검은색입니다. 온갖 죄악에 찌들어서 새까만 색이지요. 주님을 믿고 나면 이 검은 두루마기를 맑은 물로 부지런히 빨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할례하며 거룩한 행실로 신부 단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거룩한 행실을 가지려면 먼저 그 마음부터 변화되어야 하지요. 그래서 결국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은 죄악으로 더럽혀진 마음을 정결하게 할례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했습니다.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했지요. “생명나무에 나아간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이때 문들을 통하여 간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함에 따라서 더 좋은 천국으로 침노해 들어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낙원의 문으로 들어가 1천층으로, 다시 2천층으로, 3천층으로, 이렇게 문들을 통과해서 들어가지요.

두 번째 의미로 문들은 새 예루살렘의 열두 진주문을 말합니다. 여러 단계의 천국 문들을 통과하면 마침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지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이유는 다만 구원받은 성도들을 얻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낙원이나 1천층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성결을 이루어 새 예루살렘에 거할 참 자녀들을 얻으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영혼들이 이 진주문을 통과할 수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 문들은 아무나 통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왕정 시대에 왕이 사는 도성에는 문을 지키는 군병들이 있었습니다. 성에 들어가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은 통과할 수가 없었지요. 더구나 궁전의 문을 당당히 통과하려면 그만큼 더 큰 권세와 지위가 필요합니다.

천국의 문을 통과할 때도 합당한 자격이 필요합니다. 곧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가 있어야 하며 단계마다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갈수록 더 큰 권세가 있어야 하지요. 이 권세는 바로 두루마기를 빨아 거룩하고 성결되어 하나님을 닮은 만큼 위로부터 임합니다.

또 권능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능력 권능도 마찬가지. 내가 얼마큼 두루마기를 빨아서 더 성결로 들어갔느냐? 더 영으로 들어갔느냐에 따라서 바로 능력도 주어지고 권능도 주어지는 것이라 이 말이에요.

더구나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려면 더욱 큰 권세가 필요하구요. 여러분이 이렇게 해서 문들을 통해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권세를 얻었다면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그 증거가 나타납니다. 영혼이 잘된 만큼 가정과 일터에 영육 간에 축복을 받습니다. 또 가는 곳마다 성령의 역사가 불같이 따르며 어둠과 질병의 세력들이 물러가지요.

막 16:17-18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셨지요.

이 말씀처럼 참으로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런 표적을 나타낼 권세와 능력이 따릅니다. 뱀과 전갈을 밟으며 악한 영들의 능력을 제어할 권세가 있지요. 두루마기를 온전히 빠는 자들은 이 땅에서도 이런 권세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권세를 여러분 모두가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지만, 반대로 두루마기를 빨지 않는 자들은 너무도 복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생명나무에 나가지도 못하고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가지도 못하여 성 밖에 남겨지게 되지요. 한 번 성령을 받았고 직분이 있다 해도 두루마기를 빨지 않으면 구원조차 받을 수가 없습니다.

계 22: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15절 말씀을 보면 두루마기를 빨지 않는 대표적인 유형이 나오지요. 아무리 “주여, 주여” 고백했던 사람이라 해도 여전히 세상의 더러움 가운데 머물러 있었으므로 결국 성 밖에 버림받는 것입니다.

먼저 개들은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벧후 2:22에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했습니다. 개는 더러운 배설물을 먹기도 하고, 자기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기도 합니다.

이처럼 더러운 죄악을 버린다 하면서도 자기 마음을 지키기 못하여 다시 취하는 사람을 개에 비유합니다. 어떤 사람은 연단을 크게 받으면 좀 변화된 것 같다가도 얼마 후에 보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시험 환난이 오면 잘못을 회개했다가도 얼마 지나면 또 같은 죄를 짓고 회개한다고 하지요. 이런 사람들도 나름대로 기도생활을 하며 마음의 할례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마음에 변화가 없습니다.

두루마기를 빨았다가 더럽히기를 반복하므로 결과적으로 볼 때는 아예 빨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더럽습니다. 이런 경우는 오히려 초신자보다 더 안 좋은 상황일 수도 있지요. “이제 안 그럴게요, 버릴게요. 이렇게 기도해 놓고 반복해서 어겼으니 번번이 하나님께 거짓말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 한때 열심히 마음의 할례를 했다 해도 현재는 마음의 할례를 하지 않고 멈춰 있다면 이 역시 자칫하면 구원받기가 어렵습니다. 신앙생활은 마치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열심히 노를 저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노 젓기를 멈추면 배가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지요. 아래로 떠내려가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미지근하고 정체된 신앙은 그 자리에 멈춰 있는 것만이 아닙니다. 반드시 세상 정욕과 불의가 틈타게 되지요. 성령의 충만함이 떨어지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마음을 채우지 못하니 뭔가 허전하고 적적합니다. 그러니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육을 다시 찾아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계 3:16에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하셨지요. 이렇게 미지근한 신앙은 하나님이 토하여 내쳐 버린다고 말씀하는 거예요. 차가운 신앙도 문제이지만, 미지근한 신앙도 차가운 신앙과 마찬가지로 버림받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술객, 행음자, 살인자, 우상숭배자,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에 대해서는 계 21:8에서 설명했습니다. 이 시간에는 간단하게만 살펴보고, 더 자세한 내용은 <요한계시록 강해>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술객”은 단지 점치거나 악한 영과 교통하는 사람만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닌다 하면서도 사단의 역사를 단호히 차단하지 않고 계속 받아 나가는 사람들을 말하지요. 사단은 비진리의 생각을 통해 역사합니다. 사단이 역사하는 악한 생각이 떠오르면 즉시 사단의 역사를 차단하고 진리의 생각으로 바꿔야 하지요.

그러지 않고 비진리의 생각을 통해 사단의 역사를 계속 받아나가면 점점 더 깊은 어둠의 역사를 받게 됩니다. 처음에는 사단의 역사였지만 나중에는 마귀의 역사를 받게 됩니다. 그러다 결국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여 귀신의 역사를 받기도 하지요. 신접하는 술객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가증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행음자의 경우도 육적인 행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행음도 경계해야 하지요. 물론 행음도 구원받지 못하겠지요. 영적인 행음도 경계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성도들이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여 세상을 취해 나가는 것입니다.

약 4:4에는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한때 열심히 신앙생활 했던 사람이라도 세상에 마음을 하나씩 내어주기 시작하면 그 하나가 둘이 되고 또 셋이 됩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점점 커지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어지지요. 더구나 이런 사람들은 혼자서만 세상을 취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의 성도들까지 미혹하여 함께 세상 것을 맛보게 하고 하나님께 열심 내던 마음이 식어지게 하지요.

자, 육의 부부라 할지라도 서로 사랑할 때는 다른 이성에게 한눈을 팔지 않습니다. 하물며 영적으로 우리의 신랑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처럼 거룩하고 존귀하신 신랑을 두고 신부가 어찌 세상에 한눈을 팔 수 있습니까?

창조주요 만유의 주가 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티끌 같은 인생들을 향해 사랑을 주셨습니다. 범죄한 우리를 위해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를 참혹한 십자가의 형벌에 내어주셨지요. 또 성령을 주셔서 변화되게 하시고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능력을 주십니다. 말할 수 없는 천국의 영광을 예비하시고 영원히 그곳에 함께 살기를 기다리고 계시지요.

이런 사랑을 알면서 성령을 받았고, 은혜를 체험했으면서 어떻게 주님을 배신할 수 있습니까? 명예와 권세, 물질이나 정욕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하고 예배를 멀리한다면 그는 주님의 사랑을 떠나 행음하는 사람입니다. 원수 마귀 사단이 우는 사자같이 달려들어 이런 사람을 자기의 밥으로 삼게 되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대충대충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다해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시지요. 우리 삶의 100퍼센트를 다 하나님을 위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되 모든 것이 가하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쪽을 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살인자들이 나옵니다. 육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뿐 아니라 영적인 살인도 큰 죄가 됩니다. 영적인 살인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째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미움을 드러내지 않고 마음으로만 미워했다 해도 영적으로는 살인과 동일한 근본에서 나온 것이지요.

둘째로 진리를 잘못 가르쳐서 형제를 실족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양 떼를 가르칠 때 “사람이 죄를 다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냥 ”믿습니다“ 하고 고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설명했다고 합시다. “죄를 벗어 버리기 힘들다, 좀 편하게 신앙생활 하고 싶다.” 하던 사람은 얼른 그 말을 마음에 받아들입니다.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적당히 타협하며 살려고 하지요. 이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여 함께 사망으로 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사망의 길로 가게 된 책임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 보지요. 교회의 머리 되는 일꾼들이 성전 안에서 오락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나 세상 사업에 대한 대화를 했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초신자들이 이런 장면을 보면 그래도 되는 줄 알고 따라할 수가 있습니다.

혹은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운 성도들도 머리 되는 분들이 그러는 것을 보면 자신들도 경계하지 못하고 따라 할 수가 있지요. 이럴 때 물론 비진리를 행한 당사자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 된 입장에서 본이 되지 못하고 실족하게 만든 사람들도 그 책임을 피할 수는 없지요.

막 9:42에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했습니다. 가르치는 입장에 있는 분들은 더욱 더 이런 말씀들을 기억하여 삼가 절제하며 근신해야 하지요.

셋째로 주의 종이나 일꾼 된 입장에서 맡은 영혼을 잘 돌보지 못하여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맡은 양 떼는 항상 영적인 꼴을 먹여서 믿음이 성장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쉼 없이 영혼들을 돌아보며 시험 들지 않도록 늘 지켜주고 축복을 받도록 기도해 줘야 합니다.

이렇게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할 때는 그가 맡은 양 떼가 파리해지거나 심지어 하나님을 떠나는 경우도 생기지요. 이런 것도 결국 하나님 앞에서 살인한 것과 같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렇게 책임이 중하므로 “아무나 선생 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책임이 중하니 사명을 사모하지 않겠다.’ 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양 떼를 맡고자 하는 마음이 당연히 생깁니다. 최선을 다해 감당했을 때는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진 것인 만큼 영광이지요.

다음으로 우상 숭배에 관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우상 숭배는 어떤 형상 앞에 나가 절하거나 미신적인 행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닌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점을 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재미삼아 한 번 해봤다”고 하면서 미신적이고 주술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정의 화평을 위해서 어쩔 수 없다”면서 제사상 앞에서 절을 하기도 하구요.

그러나 이런 것들도 결국은 악한 영과 접하며 숭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심히 가증한 일이며 “별 생각 없이 그랬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영적인 의미의 ‘우상’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영적인 의미의 ‘간음’도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우상 숭배와 영적인 간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는 그 사람의 믿음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에 따라 다릅니다.

비유를 들어 남녀가 사랑하여 결혼까지 했는데 어느 날 아내가 남편 외에 다른 이성을 사랑하여 마음을 내어주었습니다. 그러면 간음이 되지요. 이처럼 영적으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며 어느 정도 믿음 있고 체험도 있는 일꾼이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면 이는 영적인 간음입니다.

그런데 아직 믿음이 연약한 초신자 때는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도 적습니다. 예전에 사랑하던 세상 것을 한 번에 다 버리기가 힘들지요. 여전히 그대로 취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고 실제로 버리지 못하여 계속 취하기도 합니다.

우상 숭배란 이처럼 믿음이 연약하여 아직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초신자가 물질에 집착하여 아직 주일을 성수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골 3:5 후반절에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한 대로 물질이 그에게 우상이 되어 있는 것이지요. 점점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수록 이런 우상을 하나하나 버리게 되고 그런 만큼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천국을 사기 위해 자신의 모든 소유까지 팔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주님을 영접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믿음이 자라지 않고 여전히 세상을 더 사랑한다면 어찌될까요?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자라지 않으면 얼마 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믿음도 계속 성장하지 않고 늘 우상을 섬기고 있다면 결국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할 수가 없지요.

또 7년 환난 때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도 우상 숭배의 죄로 인한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받는 사람도 있고 핍박 때문에 두려워서 받는 사람도 있지요. 어느 쪽이든 간에 짐승의 표를 받는 것은 결국 짐승에게 경배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7년 환난에 떨어진 사람 중에 어찌하든 구원을 받으려면 짐승의 표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거짓말을 좋아하고 지어내는 자”가 나옵니다. 육적인 거짓말도 벗어 버려야 하지만, 영적인 거짓말은 더욱 중한 죄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면서 어둠 가운데 행하는 것 등이 다 거짓말에 속하지요.

요 8:44에 보면 마귀에 대해서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 했습니다. 거짓말을 좋아하고 지어내는 자들은 마귀에게 속한 것이지요.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크고 작은 거짓말 속에 파묻혀서 살지만 성도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구원만 받는 것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을 사모하는 여러분은 거짓의 근본 뿌리까지 뽑아버려야 하지요.

거짓말과는 좀 다른 종류처럼 보이는 비진리 중에도 그 근본을 살펴보면 거짓이라는 큰 뿌리에서 나오는 것들이 많습니다. 약속을 임의로 어기는 것, 한 번 정했다가도 자기 유익을 좇아 변개하는 것, 정도를 걷지 않고 불의와 타협하는 것, 외식하는 것, 동문서답하는 것, 이런 것들도 결국 진실하지 않은 마음에서 나오지요. 거짓이라는 큰 뿌리 하나만 뽑아내도 많은 비진리들이 벗어질 수가 있습니다.

또 거짓말을 좋아하고 지어내는 자에는 7년 환난 동안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묘하게 미혹하는 세력들도 포함됩니다. 적그리스도와 짐승을 돕는 거짓 선지자의 세력을 말하는 것이지요. 이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종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을 속여 원수 마귀 사단의 종이 되게 합니다. 이들은 결국 유황 못에 들어가게 되고, 이들의 미혹을 받은 사람들도 성 밖 어둠에 버려지게 되지요.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개들과 술객들, 행음자들, 살인자들, 우상 숭배자들,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들이 성 밖에 있다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사소한 거짓말을 한두 번 했다고 해서, 혹은 미움을 아직 못 버리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는 회개할 때 용서받을 수 있지요. 그러나 신앙생활을 오래 하고 직분을 받아 가면서도 계속 그런 죄성들을 버리지 않고 있다면 이럴 때는 구원을 확신할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미지근한 신앙에 머물다가 결국 구원받지 못할 상황에 처하기 쉽지요. ‘그러면 어느 정도까지가 구원받고, 어느 정도까지는 구원을 못 받는가?’ 이런 것을 궁금해 하실 분이 있으신지요? 새 예루살렘을 사모하는 여러분이라면 이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죄성을 어느 정도까지만이 아니라 온전히 다 벗어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반드시 두루마기를 깨끗이 빨아 큰 권세를 얻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3-07-20 오후 1:46:05 Posted
2023-07-28 오후 3:18:04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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