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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분량

제목
믿음의 분량(12) 믿음의 4단계 [롬12:3]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06.01.15
오늘은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믿음의 4단계에 대해 살펴보면서 믿음의 성장에 중요한 마음과 중심, 그릇에 대해 증거하고자 합니다.

1. 믿음의 단계에 따른 행함의 차이

성령받고 구원받은 믿음의 1단계와 말씀대로 행하려고 노력하는 믿음의 2단계를 거쳐 계속적으로 노력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할 수 있는 믿음의 3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렇게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마음에 있는 죄성 자체도 벗어 버리게 되면 믿음의 4단계에 들어서게 되는데 4단계에 이르면 하나님께서 너무나 바라시는 영의 사람으로 입문하게 되는 것이지요.
믿음의 4단계는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물론 믿음의 3단계에서도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하신 말씀대로 계명을 지켜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으나 아직 마음의 죄성까지 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은 민망하지요. 정결한 마음으로 믿음의 4단계에 이를 때 담대하게 "주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도 그 고백을 기뻐 받으십니다.

예를 들어, 데살로니가전서 5:16-18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했는데 믿음의 2단계에서는 이 말씀을 들어서 알지만 시험 환난을 만나면 기뻐하지 못하고 불평하며 기도를 쉬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3단계에서는 어려운 일을 만나도 말씀대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지요.
물론 3단계 초입에서는 연단이 심히 감당하기 어렵게 여겨질 때 중심에서 기뻐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때로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나" 하며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곧 이런 생각을 물리치고 말씀대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3단계이지요. 그러다가 3단계 중반 이상이 되면 이런 생각은 거의 들지 않고 마음에서부터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4단계의 믿음이 되면 심히 고난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맞는다 해도 중심에서 기쁨이 샘솟게 되지요. 범사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현실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막막하다 해도 마음은 항상 기쁘고 행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체가 행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체가 즐거운 것이지요. 믿음의 3단계가 말씀대로 기뻐하고 감사한다 해도 4단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선하고 섬김이 승해서 상대의 마음을 편케 하기 원하며 상대가 무엇을 요구하면 다 들어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상대가 너무 무리한 것을 요구할 때는 원하는 대로 들어 주기는 하지만 그래도 "너무 힘들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그러나 상대를 지극히 사랑할 때는 물불을 가리지 않으며 자신이 심히 힘들고 어려운 입장이라 해도 전혀 힘들다 여기지 않습니다. 상대를 기쁘게 해 주려는 마음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행하는 믿음의 4단계에 들어와야 하나님께서 인간을 경작하시는 목적을 어느 정도 이루었다 말할 수 있으며 이때부터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믿음의 성장에 중요한 요소들 : 마음, 중심, 그릇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도 신앙의 발전이 너무나 더딥니다. 수년이 지나고 십년이 지나도 여전히 믿음의 2단계나 3단계 초입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지요. 반면 어떤 사람은 처음 은혜를 받은 이후로 말씀을 듣는 대로 결단하여 죄악을 버려나가며 신속하게 영의 마음을 이뤄 나갑니다.
이런 차이가 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각 사람의 타고난 마음이 다르고 타고난 중심, 그릇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마음에 비진리가 얼마나 많고 적은가, 또 얼마나 좋고 큰 그릇인가, 중심이 곧고 아름다운가는 천차만별이지요. 이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과 들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는 것, 그리고 새긴 말씀을 어떻게 행하는지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먼저,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원래 아담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씨와 그 씨를 감싸고 있는 진리의 지식들이었지요. 그런데 범죄한 후로 마음에 있던 진리의 지식들이 빠져나가고 대신 비진리의 지식들, 곧 죄와 악이 채워졌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담긴 죄악이 그 후손들에게도 전해지고 또 후손들은 살아가면서 새로운 죄악들을 마음에 스스로 받아들이게 되지요. 그러니 사람의 마음에는 조상에게 물려받은 기 속의 악과 자라나면서 심어지고 만들어진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악이 적은 사람은 그만큼 버릴 것이 적으니 성결도 빨리 이룰 수 있는 것이지요.

다음으로, 중심이란 마음이 굳어진 것으로서 중심에 따라 근본적인 면에서 얼마나 간절히 선을 추구하는지가 달라집니다. 마치 자석 중에서도 철을 끌어당기는 힘이 강한 것과 약한 것이 있는 것처럼 중심이 곧고 선한 사람은 근본적으로 선한 것, 온전한 것을 사모하기에 진리를 들을 때 쉽게 "아멘" 하며 마음을 다해 순종하므로 신속하게 성결을 이뤄가지요.
비유를 들어, 밭의 토질이 기름진 옥토라면 씨를 뿌렸을 때 쉽게 싹이 나고 자라며 좋은 열매도 많이 맺을 수 있습니다. 반면에 척박한 토질에는 씨를 심어도 잘 나지 않고 열매를 맺는다 해도 부실합니다. 물론 밭이 옥토라 해도 잘 개간되어 있지 않아서 흙이 굳어져 있고 잡초가 무성하다면 씨를 뿌린다 해도 당장 좋은 열매를 거두기는 힘이 듭니다. 그렇지만 농부가 개간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척박한 땅보다는 기름진 옥토가 잡초나 가시떨기를 뽑기도 쉽지요.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중심은 좋게 태어났는데 악하고 힘든 환경에서 자라므로 마음에 비진리가 많이 입력된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잡초가 많은 밭과 같아서 연단받아 죄를 버리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중심이 좋은 사람은 똑같이 비진리를 갖고 있다 해도 성결되고자 마음만 먹으면 그만큼 더 쉽게 결단하여 버려나갈 수 있지요. 사람이 볼 때는 악하고 거친 것 같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중심이 좋은 사람은 장차 어떻게 변화될 것을 아시므로 연단을 통해 깨끗하게 하시고 귀하게 쓰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릇이란 사람의 마음을 담고 있는 자체이며 본래의 자기 모습 그대로를 말합니다. 그릇의 재질이 무엇인가, 곧 금그릇인가 은그릇인가, 혹은 질그릇인가는 중심에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면, 그릇의 크기는 얼마나 진리에 속한 것들을 그 안에 많이 담을 수 있는가와 상관이 있지요.
이처럼 중심과 그릇은 대체로 긴밀하게 연관됩니다. 드물게는 중심이 특별히 더 좋거나 그릇이 특별히 큰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중심이 좋은 사람은 그릇도 그만큼 크고 아름다우며, 그릇이 크고 좋은 사람은 중심도 곧고 아름다운 경우가 많지요.
그릇이 크면 마음씀이 그만큼 넉넉하므로 한 가지 진리를 들었을 때 더 많은 분야에서 온전히 진리로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문자적으로만 제한하여 듣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까지 이해하여 순종하고자 하기 때문이지요.
그릇이 크고 좋은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의미를 마음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그대로 마음에 일궈서 믿음이 쑥쑥 성장하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지 않고 자신의 틀과 의에 맞는 말씀만 받아들이면 믿음의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많이 듣고 배웠다고 해도 오히려 그로 인해 마음이 높아지며 자기 의와 틀이 더 단단해져 버리기도 하지요.
예를 들면,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 낮아지고 섬기라"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 받는 사람은 여러 가지 생각을 동원하게 됩니다. 여전히 마음에는 자신이 더 잘난 것 같고 상대의 부족함이 보이지만 "섬기라"는 말씀을 들었으니 어떻게 하면 될 것인가, 계산을 하게 되지요. 자신의 마음 안에 교만은 그대로 두고 표면적으로 상대를 섬겼다고 말할 수 있도록 겉으로만 행할 것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까지만 해 주면 섬긴다 할 수 있을까? 그렇게까지 섬겨 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처럼 번번이 계산하고 생각해야 하니 얼마나 번거로운 일이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자기 입장에서는 열심히 섬겼다 해도 그 마음 자체가 낮아져서 섬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섬김받는 편에서도 상대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으며 불편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마음에서부터 스스로를 낮추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섬기는 것인지를 생각하며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 자체가 낮아지면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저절로 겸비하게 나오고 상대의 입장을 존중하며 배려하는 자세가 되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되면 굳이 어떻게 섬겨 줄까 고민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아도 상대방은 여러분을 대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편안함과 쉼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중심과 그릇에 대해 이해하기 쉽도록 일상적인 비유를 한 가지 더 들어보지요. 부모님이 자녀에게 "방이 더러우니 청소를 해라, 물건을 아무데나 두지 말고 제 자리에 놓아라" 말씀하면 어떤 자녀는 자신이 더럽힌 것이 아니라며 순종하지 않는 것을 봅니다. 또 어떤 자녀는 보이는 곳에 흐트러진 물건들만 잘 안 보이는 곳에 적당히 밀어 넣는데 이런 경우는 부모님의 말씀에 마지못해 순종하는 시늉은 하지만, 정작 부모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 마음에 받지도 못한 것입니다.
만약 부모님의 말씀에 정말 순종하기 원하는 중심이고 그릇이 크고 아름다워서 부모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는다면 어떻게 할까요? 보이지 않는 곳까지 구석구석, 깨끗하게 청소할 뿐 아니라 항상 방을 청결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게 되지요. "청소해라" 하는 말씀의 내면에는 안 보이는 부분까지 깨끗하게 하기를 원하시며, 항상 깨끗하게 하라는 의도를 깨닫고 그 뜻을 마음으로 받아 순종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집안만이 아니라 자신의 습관 자체를 바꿔서 정리 정돈하는 사람, 깨끗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지요.
범사에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다른 사람의 말을 마음으로 받아 작은 일 하나라도 진실하고 충성스럽게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마음으로 받고 쉽게 그 뜻을 받들어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거나 당장의 책망을 피해보려고 눈가림만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마찬가지가 되기 쉽지요.
비록 마음과 중심, 그릇이 타고 나는 것이라 해도 여러분이 얼마나 선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가, 또 범사에 마음을 어떻게 크게 쓰는가에 따라서 마음 그릇과 중심이 변화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변화되는 만큼 성결되는 속도도 점점 더 빨라지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디모데후서 2:20-21을 보면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했습니다. 금그릇이든 은그릇이든, 그릇이 크든 작든,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 그릇을 깨끗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음에 선을 쌓아가고 부지런히 죄악을 벗어 버리면 버릴수록 좋은 중심과 큰 그릇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더 간절히 사모하며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고자 노력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은혜와 능력을 주시고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이처럼 도우시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날마다 더 좋은 중심으로, 더 귀하고 아름다운 그릇으로 신속하게 변화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06-01-16 오후 8:27:43 Posted
2019-09-09 오전 11:37:31 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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